소설리스트

87화 (87/161)

87화

“뭐 하시는 건가요? 돌려주세요.”

손짓했으나 리젤로는 어색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제 생각엔 말이에요, 고객님. 세상엔 굳이 알 필요 없는 지식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

“머리에도 용량이라는 게 있을 것 아닌가요? 중요한 정보로만 채워 넣어야죠.”

뭐라는 거야?

제한 서가에 함께 들어가자고 날 설득할 때와는 딴판인 반응이었다. 그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리젤로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이상한 말씀 마시고 돌려주세요.”

“그게…… 고객님. 잠시만요. 잠깐 먼저 좀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뽑은 책인데 왜 자기가 먼저 읽어 봐?

나는 황당한 얼굴로 리젤로를 쳐다보았다. 마침 중요한 대목을 읽고 있던 와중이어서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어서 돌려주세요. 장난할 때가 아니잖아요.”

그러나 리젤로는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책에 코를 박곤 열심히 탐독했다. 기가 막혔다.

문득 ‘혹시’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입을 열었다.

“돌려줘.”

광대들과 도마뱀에게 외쳤던 것처럼 힘 있고 짧은 명령이었다.

리젤로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저한테 언령을 쓰신 거예요, 고객님?”

“안 먹히네.”

나는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긴. 역시 전설 속 성녀가 지녔다는 능력인데 내게 있을 리가 없겠지.

“전 사악한 것이 아니에요. 고객님.”

“사악한 것?”

“여기 그렇게 써 있네요. 언령은 ‘사악한 것’, ‘여신의 뜻에 반하는 것’에만 효력을 미친다고요.”

“어디 보여 주세요.”

홱 손을 내밀었으나 리젤로가 더 날랬다.

책 대신 허공만 부여잡은 나는 분한 얼굴을 했다.

“대체 왜 그러세요. 설마 능력에 대해 알게 되면 부작용이 심해진다는 대목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웃기는 일이었다. 리젤로가 나를 진지하게 나를 언령 능력자라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리젤로는 도마뱀 사건 때 바로 옆에 있었잖아.’

나는 눈을 감느라 도마뱀이 나동그라진 순간을 정확히 목격하지 못했지만, 리젤로는 아니었다.

게다가 리젤로는 저래 봬도 그 대단하다는 마탑의 탑주이기도 했다. 그가 만약 정말 나를 언령 능력자라 생각한다면, 분명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이제야 거기 생각이 미쳤을까?

나는 나의 아둔함을 탓하며 리젤로에게 물었다.

“그때, 도마뱀이 나동그라졌을 때. 탑주님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부 보셨죠?”

“도마뱀? ……아아, 그 정령. 흐흠, 글쎄요. 저도 그때 하필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 마세요.”

나는 대놓고 대답을 회피하는 리젤로를 노려보았다.

이안도 그렇고, 리젤로도 그렇고. 왜 나한테 제대로 된 대답을 안 해 주는 거지?

‘이안…… 그래. 이안도 이런 식이었지.’

문득 떠오른 이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역시 그랬다. 나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 확실한데도 좀처럼 설명해 주지 않으려 했다.

‘설마.’

이안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내게 언령이란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걸.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 그럴 리가.’

내게 전설 속 성녀와 같은 능력이 있다니.

아무리 정황이 충분해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영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걸?’

이미 그런 현실성 없는 일을 겪은 나다. 눈 떠 보니 책 속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보다 더 말 안 되는 이야기가 있을까?

‘심지어 보통 다른 소설 주인공들은 이세계로 가면 뭔가 특별한 능력을 얻던데, 난 그런 것도 없었지.’

능력은커녕 호랑이 같은 성기사단장 침대 위에 떡하니 떨어졌었다. 그때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난 십중팔구 그날 세상을 하직했을 거다. 게다가 내가 들어온 몸은 웬 범죄 길드 놈들에게 협박이나 당하고 있는 신세였지.

워낙 비현실적인 일투성이라 적응하는 데에 급급했지만, 잘 따지고 보면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해. 이렇게까지 불운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지구에든 이 세계에든, 정말 신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 불운만을 몰아 주진 않을 거다. 신에게 양심이란 것이 있다면 내게 좋은 것 한두 개쯤은 선물로 안겨 주지 않았을까?

혹시, 내게 정말 언령이란 능력이 있는 거라면. 그건 이세계의 여행자에게 주어진 특전 같은 건 아닐까?

‘그 정도 능력은 줘야 수지가 맞긴 하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이라니.

굉장히 있어 보이는 능력인 건 사실이었다.

“실험해 봐야겠어요.”

나는 열망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정말 내게 그런 능력이 있는 건지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사악한 것에만 발휘되는 능력이라고 했지? 지금 주변에는 없을까?

“고객님, 잠시 진정하세요.”

리젤로가 난처한 얼굴로 나를 말렸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이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말해 주지 않는 거냐고 따지는 내게 굳은 얼굴로 차갑게 내뱉던 얼굴이.

‘이안이 이 책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던 거라면. ……말해 주지 않았던 건, 날 위해서였던 걸까.’

그러고 보면, 능력을 쓸 때마다 내 곁엔 이안이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거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날 병자 다루듯이 안아 들었던 것도, 보양식을 질식할 만큼 밀어 넣었던 것도, 그래서였던 거야?’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떠올리고 보니 마치 그제야 맞는 퍼즐 조각을 찾은 듯 많은 일의 아귀가 맞았다.

나는 허탈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겐 좀 더 쉬운 방법도 있었다.

그냥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면 됐다. 물론 내 부작용은 심해지겠지만,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면 굳이 알고 있는 걸 말하라고 닦달하는 날 상대할 필요도, 날 과보호할 필요도 없었다.

왜 이안은 그런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은 걸까.

효율적인 것만을 그리도 추구하는 사람이.

‘마치 날, 생각해 주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방금 내가 한 생각이 말이 안 된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안의 머릿속은 지금 복수로 가득 차, 안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한 배려 같은 게 들어찰 자리 따위는 없을 테니까.

두서없이 그런 생각들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라, 고객님.”

리젤로가 돌연 표정을 굳히곤 말했다.

“슬슬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누군가 접근하고 있네요.”

“네?!”

나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 허가도 없이, 그것도 외간 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빠, 빨리 나가죠. 얼른!”

“지금부터 천천히 나가면 돼요. 이제 막 도서관 입구에 들어왔으니까.”

“그걸 어떻게…… 설마, 마법적 장치라도 입구에 심어 놓은 건가요?”

리젤로가 애매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 데나 마법 장치를 심어 놓는 건 불법일 텐데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짓을 해 줘서 다행이었지만.

“조용히 나가죠.”

나와 리젤로는 살금살금 제한 서가를 다시 되짚어 돌아갔다.

서가 밖으로 나서자마자, 벽돌들이 다시 엉금엉금 서로 얽히기 시작했다. 십 초도 채 지나기 전 벽 너머의 서가는 갈색 벽에 완전히 막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이린 님?”

저 멀리서 가느다랗게 아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헉, 숨을 멈추곤 리젤로를 돌아보았다. 그가 찡긋 한쪽 눈을 접더니 반대편 책장 뒤로 몸을 숨겼다.

“아이린 님, 여기 계세요?”

아네트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나는 얼른 책장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아, 계셨군요!”

아네트가 화색이 되어선 크게 양쪽 팔을 흔들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요. 아이린 님이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 알려 드리려고 얼른 달려왔어요!”

“무슨 일이라니요?”

달려왔다는 말이 정말인 듯 아네트가 가쁜 숨을 골랐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이안 님과 ‘그 소년’이 대련을 벌일 거래요!”

“……뭐라고요?”

누구랑 누가 대련을 해?

이안과 엘리엇이?

원작 주인공과 미래의 최종 보스가?

맙소사.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볼거리는 놓칠 수 없지.

“얼른 가죠. 어디로 가면 되나요?”

“제가 안내할게요! 따라오세요!”

이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아네트가 활짝 웃었다.

나는 아네트를 따라가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책장 뒤에 숨어 있을 리젤로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 * *

“뭐야, 뭐야.”

“이안 님이 아직 견습도 아닌 녀석과 대련을 해 주신다고?”

“거짓말 아냐? 그렇게 행운아인 놈이 어디 있어?”

연무장에 가까워질수록 쑥덕이는 소리가 커졌다.

머지않아 도착한 연무장엔 이미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비켜 주세요, 비켜 주세요!”

아네트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호쾌히 외쳤다.

당돌한 외침에 뒤돌아본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흠칫 뒤로 물러났다.

“아이린 님이다.”

“단장님은 저쪽에 계십니다! 성녀님!”

“성녀님을 안내해 드려라!”

구경꾼들은 한술 더 떠 나와 아네트를 가장 앞줄 특등석까지 안내했다.

덕분에 인파를 뚫고 앞까지 파고들 수 있게 된 나는, 시야가 트이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저기 있다.’

찾고 있던 사람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워낙 어디를 가든 한눈에 띄는 사람이기에.

백금처럼 빛나는 은발을 발견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