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무슨 말이냐면.”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던 리젤로가 미소 지으며 막다른 벽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음 순간, 나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대성당의 장치 중 몇몇은, 우리 마탑의 마법으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리젤로의 손이 닿은 벽에서부터 황금색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빛은 생명을 가진 듯 꾸물거리며 움직이더니, 머지않아 복잡한 문양을 지닌 마법진으로 변했다.
“이게 무슨…….”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스멀거리며 움직이던 빛이 마법진을 완성시킨 순간, 벽이 낮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을 이룬 석재들이 서로 맞물리고 또 어긋나며 움직였다.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작동하기 시작한 벽이 조금씩 걷히더니, 머지않아 그 너머의 공간이 드러났다.
“아…….”
신비로운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걷힌 벽 너머엔 새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까지 닿을 만큼 키가 큰 책장이 시야 끝까지 가득했다. 고동빛 책장들은 한눈에도 오랜 세월이 묻어 있음이 느껴졌지만, 그만큼 중후하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제한 구역 서가라는 걸.
그걸 깨닫자마자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하하. 걱정되시나요?”
“당연하죠. 제한 구역의 뜻이 뭔데요.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면 안 되는 구역이잖아요!”
“그럼 얼른 들어갈까요? 들키지 않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리젤로가 벽 안으로 훌쩍 한쪽 발을 들였다.
나는 당황해서 외쳤다.
“저기요!”
“또 남편이 있어서 안 된다는 말을 하실 건가요?”
리젤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도회장의 테라스에 단둘이 가자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도서관인데. 세상에서 가장 흑심 없을 것 같은 장소 아닌가요?”
내가 왜 망설이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리젤로가 우물쭈물하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장담하는데, 한 시간 정도 둘러보는 정도로는 절대 안 들킬걸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설득이었다.
하지만 말하는 주체가 마탑주이다 보니, 그 성의 없는 설득에 마음이 혹했다.
나는 제한 서가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끝없이 펼쳐진 저 책장들은 그야말로 지식의 보고일 것이 분명했다. 내가 찾는 성흔에 대한 지식 역시, 저 안엔 가득 펼쳐져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저 역시 들어갈 자격이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탑주님은 저보다 더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에이. 엘룬 신께서는 지식이란 모두에게 평등히 나누어져야 한다고 가르치셨는걸요.”
리젤로가 뻔뻔한 얼굴로 성녀인 내게 엘룬 신의 교리를 운운했다.
“제한 구역 서가를 만든 것도 관리가 어려운 서적들을 격리하기 위해서이지, 지식 자체를 감추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교리서에서 엘룬 신의 지식에 대한 철학을 들은 것 같기는 했다. 저 사람이 왜 믿지도 않는 종교의 교리까지 외우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마탑주의 도움을 받아 제한 구역에 들어왔다는 걸 들켜선 안 될 텐데.’
“뭐 하시나요, 성녀님. 시간이 많지 않은데요? 안전한 시간을 대략 1시간 정도로 잡자면, 이제 57분 남았습니다.”
리젤로가 솜씨 좋게 나를 채근했다. 나는 질끈 주먹 쥐곤 결심했다.
‘……잠깐만, 정말 잠깐만 둘러보는 거야.’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 제한 구역 안으로 발을 디뎠다. 금지된 공간에 발 들였다는 생각에 소름이 쭈뼛쭈뼛 솟았다. 그런 나를 지켜본 리젤로가 빙그레 웃었다.
“저는 그저 고객님을 돕고 싶어 온 것뿐이지, 딱히 염탐할 생각은 없기에 그냥 얌전히 있겠습니다.”
의외로 리젤로는 서적들을 탐독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저 흥미로운 눈으로 나만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 쏟을 여유가 없었다.
‘성흔…… 성흔이라.’
보아하니 서가는 발행 연도순으로 정리된 것 같았다.
성흔은 주로 고대 선조들에게서 발현되었다는 수석 신관의 말이 떠올랐다. 자연스레 나는 보다 오래된 서적이 모여 있을 깊숙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훑어본 책등에는 골치 아픈 제목들이 많았다. 『수사학의 기본』, 『수호진 개론』 같은 이론서부터 시작해서, 아예 읽을 수조차 없는 글씨까지.
빠르게 책등을 훑던 나는 문득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성녀의 역사』
‘……이건.’
이전에도 읽은 적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그때 읽었던 책과는 양장도, 글씨체도 달랐다.
나는 마치 홀린 듯 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책장을 펼치자, 낡디낡은 책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감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차를 읽어 내려갔다. 다행히 책은 보존 상태가 무척 좋아 읽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목차는 대부분 처음 듣는 성녀의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고대의 성녀들이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잊힌 인물들이 대다수인 듯했다.
끝까지 목차를 읽어 내려간 나는, 마지막 줄에서 멈칫했다.
‘성녀 아그네스……?’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서 들었더라…… 아. 그래.
곧 나는 멀지 않은 과거에서 이 이름에 대해 읽었던 기억을 떠올려 냈다. 마찬가지로 『성녀의 역사』를 읽었을 때였다.
‘예지의 성녀, 였지.’
그때 성녀 아그네스는 아주 오래된 인물이었으므로 책의 앞장에 자리했다.
그러나 이 책이 쓰일 당시에는 그 정반대였던 듯, 아그네스의 이름은 맨 마지막에 쓰여 있었다.
「아그네스 블루아. 블루아 백작가의 셋째 영애로 태어난 그녀는, 사춘기 무렵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등 일시적인 정신 착란 및 기억 상실 증세를 앓았으나…….」
‘응?’
나는 눈을 한번 끔뻑이곤 다시 그 대목을 들여다보았다.
정신 착란 및 기억 상실 증세라니?
이전에 읽었을 때 이런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땐 그저 그녀가 예지의 권능으로 대마물 전쟁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업적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아그네스 살아생전에 쓰인 책이라 그만큼 더 자세한 정보가 적혀 있는 걸까.’
구세의 성녀 아그네스에게 이런 불행한 사춘기가 있었다는 이야긴 지금 시대 사람들에겐 대부분 금시초문일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마치 마물들의 작전서를 꿰뚫어 읽은 듯한 정확함으로 대마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녀는 예지의 성녀라는 별명을 넘어, 구세의 성녀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성녀 아그네스의 권능은 예지만이 아니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권능을 두 개나 지닌 성녀였다는 말일까?
“호오오.”
옆에서 함께 책을 굽어보고 있는 리젤로가 흥미로워하는 소리를 냈지만, 나는 무시하고 다음 문장을 읽었다.
「성녀 아그네스의 말 한마디에 마물들이 좌지우지되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성녀 아그네스의 발언 중 현재까지 효과가 있다고 밝혀진 말은 다음과 같다.
―오지 마!
―나가 죽어 버려.
―(욕설 심의 삭제)들아, 꺼지랬지!
상기된 발언을 들은 마물은 명령을 수행하듯 즉시 그대로 행동했다.
교단은 이 새로운 능력을 ‘언령’이라 칭하기로 했다.」
“…….”
나는 멍하니 책장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방금 뭘 읽은 거지.
‘언령이라니.’
그 두 글자짜리 단어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하는 대로 마물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그런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었다.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건…….
‘너희들이나 꺼져 버려!’
‘오지 마!’
내가 광대들과 도마뱀에게 외쳤던 말과, 아그네스가 했다던 발언들이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혹시, 설마.
그런 단어가 스멀스멀 머릿속을 점령했다.
‘내가 외쳤던 그 말들이…… 설마.’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목을 더듬어 보았다.
강한 태풍에 밀려난 듯 쓰러져 있던 광대들과 도마뱀. 그게…… 혹시, 어쩌면.
약하게 남아 있던 목의 통증이 새삼스레 도드라졌다. 나는 목울대를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정리해 보았다.
광대들이 쓰러져 있는 걸 보았을 때, 정확한 전후 상황이 어땠지? 도마뱀 때는?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 봐도, 당시 상황이 명확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나는 두 번 다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때마다 목이 아팠어.’
큰 통증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각하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두 번 모두 외치고 나서 기침을 참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황급히 책의 다음 문단을 읽었다.
「다만 이 능력에도 크나큰 단점은 있었다. 성녀 아그네스는 언령을 사용한 뒤면 어김없이 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거기까지 읽은 나는 망부석처럼 굳어 버렸다.
‘목의 통증…….’
역류성 식도염 따위나 걱정했던 몇 시간 전의 내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믿기 힘든 가능성에 나는 그저 멍하니 굳은 채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대단하지 않아요, 고객님?”
잠시 잊고 있던 목소리에 고개 돌리자 리젤로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다니, 요?”
“이 책에 나온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고객님이 성 아그네스의 재림과도 같은 성녀라는 거잖아요!”
“…….”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역대 마탑주들은 자신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됨과 동시에 각성하듯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해지곤 했답니다. 고객님께서도 같은 절차를 밟게 되시는 건 아닐까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이 사람.
리젤로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지나친 정보로 과부하가 걸린 탓에 그를 상대할 여유가 나지 않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어지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한 부작용은 성녀 아그네스가 스스로의 언령에 대해 완전히 자각하게 되며 더욱 심각해졌다.」
‘……응?’
「깨달음과 함께 능력을 완전히 각성하기는 했지만, 그에 따른 반작용 역시 비례하여 심각해진 것이다.」
각성?
방금 리젤로가 입에 담았던 말이 그대로 책에 쓰여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리젤로를 바라보았다. 리젤로는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내가 방금 읽은 바로 그 문장을 읽고 있는 듯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이처럼 신나 보이던 것과 달리, 그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리젤로가 멍한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몇 초가량이 지났을까. 돌연 리젤로가 입을 열었다. 내 뒤를 가리키면서.
“……아니, 이안 님이 여긴 어떻게!”
“헙.”
‘이안이라고?!’
그 이름에 소스라친 나는 화드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서가 안에는 여전히 우리 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휘청일 뻔한 자세를 바로잡았다.
“뭐, 뭐예요. 아무도 없잖…… 응?”
리젤로에게 속닥거리던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방금까지 손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던 책의 존재감이 사라진 것이다. 그 책은 어느샌가 내가 아닌 리젤로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탑주님?”
내게서 『성녀의 역사』를 강탈해 간 리젤로가, 여태껏 본 중 가장 난처한 얼굴을 한 채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