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이안의 방을 나선 나는 다시금 치유실을 찾았다. 수석 신관이 돌아온 나를 반겨 주었다.
“다시 와 주셨군요! 금방 진통제를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쉬고 계세요.”
“진통제는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끔 기침이 터져 나오는 것만 빼면, 통증 자체는 없다시피 했다.
“그보다, 제 목에 상처가 있는 원인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데요.”
“안 그래도 저 역시 자료를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수석 신관이 곤혹스레 이마를 찡그렸다.
“성녀님께서 말씀하신 증상대로라면 식도염이나 후두염이 의심되지만, 직접 식도를 관찰한 결과 그런 증세는 발견할 수 없었거든요. 분명 그건 외상 같은 상처였습니다.”
“외상이라니…… 하지만 목 안에 그런 식의 상처가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걸요.”
몸 내부에 외상을 입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으로 읽히지 않는 문장이었다.
수석 신관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이지요. 일반인들에게서는요.”
“일반인들?”
“저는 간혹, 아이린 님과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분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전부 강력한 힘을 지닌 신도들이었지요.”
강력한 힘이라니.
와닿지 않는 설명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수석 신관이 이어 설명했다.
“아이린 님께서는 혹, 성흔이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성흔, 말인가요?”
그런 말은 원작에서도 읽은 기억이 없었다. 내 표정을 본 수석 신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강한 성력을 폭발시킨 뒤, 그 힘을 견디지 못한 몸에 상처가 남는 개념입니다. 아이린 님, 혹 최근 권능을 무리하게 발현하신 적이 없으신지요? 강한 예지를 하셨다거나.”
“아뇨. 그런 적은…….”
그때 다시금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너희들이나 꺼져 버려!’
‘오지 마!’
격렬한 혐오를 담아 내뱉었던 그 외침들. 바로 방금 전 일처럼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자주 발견되는 현상은 아닙니다만, 성흔은 대부분 몸 내부에 할퀴어진 듯한 상처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린 님의 목과 비슷한 증상이지요.”
“……그렇군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치 않은 구석은 많았다. 성흔이 나타나는 이유가 정말 강한 성력을 발휘했을 때뿐이라면 가짜인 내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묘한 직감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게 실마리가 되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단장님께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아이린 님.”
수석 신관의 말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그녀를 돌아보았다.
“성흔은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발현하게 되었는지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저로서도 그 방면에 대해선 지식이 적어, 선현의 지혜를 빌려야 합니다.”
“선현의 지혜라면?”
“성흔은 강력한 성력을 지닌 신도들이 다수 등장한 고대에 많이 발현되었습니다. 그 시절 집필된 의학 서적에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서적들은 보통 도서관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어서요. 십중팔구 제한 구역 서가에 있을 겁니다.”
제한 구역 서가. 나는 그 말을 되풀이했다.
“입장 허가를 받으려면 절차가 꽤 많이 필요한데, 단장님의 명령 한 번이면 모두 생략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린 님께 성흔이 발현된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단장님께선 틀림없이 발 벗고 나서실 겁니다.”
“……글쎄요.”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수석 신관에게 들리지 않을 크기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 이안을 방문했을 때 이미 결론은 났다. 그 사람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나와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것만은 분명했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성녀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안 님께는,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레베카 님께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고견 감사했습니다, 레베카 님.”
나는 레베카를 향해 정중히 묵례했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 더 조언을 얻고 싶다면 다시 들를게요. 그럼 또 뵈어요.”
“아이린 님! 진통제는 정말 필요 없으신가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렇게 치유실을 나서려는데, 한 무리의 발소리가 이쪽을 향해 가까워졌다.
“레베카 신관님, 자리에 계시…… 어머나. 아이린 양?”
치유실 안으로 들어오던 아가씨가 날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반가이 외쳤다.
“코델리아 님. 안녕하세요!”
이게 얼마만의 코델리아인지 모르겠다.
안 본 새 그녀의 미모에 대한 면역이 사라졌는지, 이전보다 그새 금발은 더 화사하고, 녹안은 더 반짝반짝 예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응?’
코델리아 곁을 꿰찬 친우 중, 레이 모나한이 짓궂은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레이, 아니. 리젤로가 장난스레 윙크했다.
“얼마 만이죠, 이게. 수도에 없는 줄 알았어요.”
난데없는 리젤로의 등장에 얼이 빠져 있는데 코델리아가 새침히 나를 흘겨보았다.
어쩜, 서운하다는 말도 이렇게 사랑스럽게 할까.
나는 얼른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었다.
“미안해요, 코델리아 님. 요즘 시간이 없어 살롱에 찾아가지도 못했네요. 그새 절 잊으신 건 아니죠?”
“거의 가물가물해지긴 했어요. 하지만, 뭐.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군요.”
도도히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코델리아가 말했다.
“그런데, 치유실엔 웬일이죠?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나요?”
“그냥, 기관지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서요.”
나는 생긋 웃으며 얼버무렸다. 성흔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내선 안 될 것 같았다.
“저런. 조심해야죠, 환절기인데.”
“신관님 덕분에 많이 나았어요. 코델리아 님께서는 어쩐 일이세요?”
“저는 레베카 신관님께 전할 물건이 있어서. 레베카 님, 여기 있어요.”
코델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품에 안고 있던 상자를 레베카에게 내밀었다. 레베카가 반색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아, 이번 달에도 감사합니다. 코델리아 님의 차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레베카가 웃으며 그 자리에서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우아한 무늬가 새겨진 찻주전자였다.
‘코델리아의 꽃차구나!’
알고 보니 코델리아는 매달 치유실에 제 권능으로 만든 일정량의 꽃차를 기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쩜. 마음씨도 비단결 같지.’
코델리아의 예쁜 마음은 참 감동적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치유실을 떠나야 할 때였다.
“저는 먼저 일어나 볼게요, 코델리아 님. 조만간 꼭 뵈어요.”
“벌써요? ……아쉽네요. 알겠어요. 내 살롱은 매일 여는 그 시간에 열려 있으니, 이번엔 잊지 말고요.”
새침한 당부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치유실을 나서는데, 웬 인기척이 내 뒤로 따라붙었다. 돌아본 나는 흰 눈을 떴다.
“……레이 님?”
리젤로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왜 이러지.’
가짜 신분을 하고, 게다가 성당 안에서 날 아는 척하진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듣는 귀가 있을까 봐 대놓고 말하지도 못하고 나는 발걸음만을 빨리했다. 리젤로가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가는 길이 같으신가 봐요, 하하. 우연이네요. 저 갈림길까지만 함께 갈까요?”
슬슬 떨어져 달라는 말을 돌려 하자 리젤로가 넉살 좋게 말을 붙여 왔다.
“그러게요, 동선이 겹치는군요. 아이린 님께선 어디까지 가시나요?”
“그냥 산책 중이랍니다.”
치유실에서 도서관까지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뻔뻔하게도 리젤로는 도서관 앞까지 날 쫓아왔다.
“오! 마침 저도 책을 빌릴 예정이었는데. 이것 참 우연입니다.”
리젤로가 환히 웃으며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했다.
무슨 생각으로 날 따라오고 있는 거지. 존재만으로 수상한 자이기에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늘따라 끈질긴 걸 보니, 웬만해선 떨어져 나갈 것 같지가 않았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은 제한 구역 서가에 출입할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온 것뿐이다.
나는 리젤로를 무시하고 성큼 도서관 안으로 발을 옮겼다.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사서조차 자리를 비운 듯, 커다란 도서관 내부는 적막으로 가득했다.
고요를 뚫고 나는 수많은 책장 사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제한 구역 서가는 도서관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오 분 정도 걸었을까.
마침내 거대한 도서관의 끝에 다다른 나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도서관 가장 깊은 곳에서 내가 맞닥뜨린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벽이었다.
오면서 내가 뭔가를 놓친 걸까. 아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보인 건 전부 평범해 보이는 책장들뿐이었다.
혹시 제한 구역 서가는 아예 동떨어진 공간에 위치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무렵이었다.
“좀 특별한 책들을 찾으시는 모양이죠?”
내내 말없이 날 뒤따라오기만 하던 리젤로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돌아보자, 그가 반반한 얼굴로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거 아시나요, 성녀님?”
“……뭘 말인가요?”
경계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리젤로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지금은 서로 데면데면한 관계지만, 사실 옛날 옛적 마탑과 성당은 꽤 교류가 많았답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리젤로를 바라보았다.
내 의심스러운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리젤로가 말을 이었다.
“가령 5대 마탑주만 해도, 이 대성당을 지을 때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