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61)

84화

“아이린 님?”

내가 한참 말이 없자, 수석 신관이 의아한 듯 나를 불렀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누구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묘하도록 강한 확신이 한눈팔 수 없도록 심장을 옥죄었다.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확신이.

그때 어떤 목소리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희들이나 꺼져 버려!’

그건 내 목소리였다.

광대들의 울음소리와 나팔 소리에 질릴 대로 질린 내가 폭발하듯 내뱉었던 외침.

이어 또 다른 목소리도 떠올랐다.

‘오지 마!’

다가오는 도마뱀의 입안에서 목도한 악몽에 겁먹어 나도 모르게 내지른 외침이었다.

그 뒤엔 어떻게 되었었지?

눈을 떠 보니 망가진 장난감 성처럼 우르르 무너져 내려 있던 광대들의 탑이 떠올랐다.

벽에 부딪힌 듯 배를 까뒤집고 나동그라져 있던 도마뱀도 떠올랐다.

애매하게 형체만 잡혀 있던 확신이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 조금만 더 형태를 갖춘다면 손에 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단단해진다면…….

“아이린 님? 괜찮으신 겁니까? 아무래도 많이 편찮으시긴 한 모양이군요.”

수석 신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단장님께서 오늘 저녁 아이린 님의 침실에 왕진 와 줄 것을 부탁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네? 뭐라고 하셨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내 정신을 ‘이안’이라는 단어가 끄집어냈다.

“이안 님이 뭘 하셨다고요?”

“제게 직접 아이린 님을 진찰하라 명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안 님이, 저를…….”

나는 천천히 이마를 찌푸렸다.

이안은 분명 요즘 나를 이상할 만큼 감싸고 있었다. 그저 계약 관계에 불과한 우리 사이를 생각하면 묘하리만큼.

“진찰해 주셔서 감사해요, 신관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 님, 약을 받아 가시지요. 원인은 모르겠으나 목이 상당히 상하셨습니다.”

“네, 다시 들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일단 실례할게요.”

이 의구심을 지금 당장 파헤쳐야 할 것 같았다.

수석 신관은 나를 더는 잡지 않았다.

치유실을 빠져나간 나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빠른 내 보폭을 조안 경이 바로 뒤에서 따라붙었다.

“조안 경. 지금 시간에 이안 님은 어디 계실까요?”

“……보통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대답하는 조안 경의 목소리가 조금 묘했다.

나는 잠시 조안 경을 돌아보았다. 조안 경 역시 광대 사건 때 함께 있었지. 혹시, 그녀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일단은 이안을 추궁하는 게 먼저야.’

설령 조안 경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안보다 많이 알고 있진 않을 거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안의 집무실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서쪽 건물 이 층의 가장 끝에 위치한 방. 배치부터 관계없는 자들의 출입을 배척하고 있는 그 방으로 나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집무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나를 바라보더니 흠칫 자세를 바로 했다.

마침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오던 루시안이 날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린 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안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이곳까지 오신 걸 보면 급한 용건이신 모양이군요. 단장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시기는 합니다만…….”

루시안이 난처한 듯 말꼬리를 흐리며 집무실 안을 돌아보았다.

그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모셔 와라.”

이안의 목소리였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얼른 양옆으로 물러나 정중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순간 속으로 놀라움을 삼켜야 했다.

안에는 이미 수많은 손님이 와 있었다. 하나같이 기사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상석에 앉아 있던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등장한 나를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던 기사들 역시 덩달아 일어나 내게 정중히 묵례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하지.”

이안의 말에 기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단장님.”

“돌아가라. 밤 안에 전갈을 보낼 테니 기다리고.”

“……예. 단장님.”

기사들은 더 묻지 않고 고개 숙여 명령을 따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들이 차례로 내게 묵례하며 떠나갔다. 마지막 기사가 떠나며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머지않아 집무실 안에는 나와 이안만이 남았다.

“그래서.”

이안이 나를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오후 햇살을 받아 한층 짙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이린.”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곳까지 오기로 결정했을 때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이안이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이 분명하니, 어떻게든 그걸 캐내야겠다는 일념으로만 가득했다.

그러나 막상 이 사람을 앞에 두니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말 없는 나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슬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럽니까, 당신. 이번엔 무슨 사고를 벌였죠?”

“……사고를 벌이다뇨?”

“꽤 규모가 큰 사고였나 본데. 그래서 말을 못 꺼내고 있는 겁니까?”

대체 이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를 대놓고 사고뭉치 취급하는 발언에 발끈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일단은 무슨 일인지 털어놓아야 나도 수습할 수가 있으니―”

“당신을 추궁하러 온 거예요. 이안 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그 얼굴에 대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당신. 제게 숨기는 게 있으시죠?”

“……또 그 이야깁니까?”

“네. 또 그 이야기예요. 이번엔 확실히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물론 많습니다. 그대에게 숨기고 있는 것.”

이안이 냉정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이 내겐 태산처럼 많습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이제 와서 그 부분에 집착하는 겁니까?”

이안이 찌른 곳은 정확한 정곡이었다.

그래. 이안과 나는 그저 불변의 계약석 아래 맹세를 나눈 계약 파트너에 불과했다.

계약 내용을 충실히 이행할 의무만 지킨다면, 그 외 서로에게 숨기는 것 없이 진실을 내보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시작했던 관계고, 끝을 맺을 때까지 그 본질엔 변함이 없을 터다.

“……아니면. 그렇게 부담되었습니까? 내가 그대를 걱정한 게.”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단단히 굳은 결정처럼 짙게 가라앉았다.

“보양식을 먹이고, 보호한 게 어제부터 날 닦달할 만큼 부담인 겁니까?”

“제가 아프다는 것, 알고 계셨죠.”

나는 더 질질 끌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이안의 눈이 순간 커졌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치유실에 다녀왔어요. 수석 신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당신이 그분께 절 왕진하라 명했다고. 제가 목이 아파 치유실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아프다고 했습니까?”

말허리를 덥석 자르고 이안이 물었다.

말이 끊긴 나는 조금 당황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네?”

“목이 많이 아픕니까?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참아 온 겁니까, 그동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이안이 질문을 쏟아 내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프다는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이안은, 마치 나를 정말로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해.

의구심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말없이 이안을 올려다보다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무슨 말입니까. 질문에 대답부터 해요.”

“제가 아프다는 것 자체에 놀라신 게 아니라, ‘많이’ 아프냐고 물어보셨죠.”

나는 조금 전 이안이 물었던 대사를 짚으며 말했다. 이안의 눈이 순간 커졌다.

“혹시 이 통증의 이유까지 알고 계신가요?”

“……아이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제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나는 빤히 이안을 노려보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목이 상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역류성 식도염이나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안은 나보다도 먼저 내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를 치유하라고 수석 신관에게 직접 부탁하기까지 했다.

내 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내 몸인데, 왜 나보다 이안 님이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죠?”

“아이린.”

“뭘 숨기고 계신 거예요? 제게.”

이안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눈을 바라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지금 내게 그 무엇도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는 걸.

이안을 설득하려 입을 연 찰나,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얼음장처럼 차디찬 목소리에 나는 순간 몸을 굳혔다.

마치 무기물을 보듯 감정 없는 눈으로 이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아프면 우리 계약에 차질이 생기니까. 그래서 신경 쓴 것뿐입니다.”

“…….”

“곧 황실에서 수확제가 열릴 겁니다. 그대는 당연히 내 부인으로서 참석해야 하고. 그런데 몸이 아파서야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걱정한 것뿐이라고요?”

“네.”

“아니, 그런 이유에 불과하다면 걱정이라기보단 ‘관리’에 더 가깝겠네요.”

그냥 자신의 체스 말 중 하나인 계약 파트너가 망가지지 않도록 살피는 일이니까.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아이린.”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이해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에게서 내가 캐낼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제 와서 실망할 것도 없었다. 이안의 말은 전부 맞았다. 그가 나를 위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계약서엔 그런 의무까지 포함되어 있진 않았으니까.

‘그래. 마음대로 하라지.’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말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았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즐거운 대화였네요.”

“아이린. 얘기 좀 하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잠시만 주십시오.”

“죄송하지만 지금부터 조금 바빠질 예정이어서요. 할 말이 있으시다면 저녁 식사 시간에 부탁드릴게요.”

그 말만을 남기고 나는 휙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아이린!”

이안이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거기엔 약간의 복수심도 담겨 있었다.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니. 그냥 계약 상대가 아프면 차질이 생기니까 신경 쓰인 것뿐이라니.’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재수 없는 인간. 냉혈한 같은 인간……!

속으로 이안을 마구 씹으며 나는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이안이 말해 주지 않는다면 내 목이 이 꼴이 된 이유는 내가 스스로 알아낼 생각이었다.

‘내 몸은 내가 챙겨야지. 아니면 누가 챙겨 주겠어.’

닫힌 문 너머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오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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