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뭔가 달라졌……나?’
딱히 별다른 것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목구비는 제대로 붙어 있었다.
‘저주가 풀렸다는 걸 알기 위해선…… 아, 그렇지.’
나는 침의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렸다. 드러난 왼쪽 허벅지에는, 우선 육안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는 허벅지를 더듬어 보았다.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희미하게 오돌토돌 만져지던 저주의 흔적이 지금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됐…… 다.”
나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저주의 흔적이 사라졌다. 해주약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됐다!”
마치 둑이 터진 듯 해방감이 쏟아져 들어와 심장을 적셨다.
이 저주는 나인이 내게 매어 놓은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족쇄였다. 그걸 마침내 떨쳐 낸 것이다.
이제 나는, ‘76번’은 더 이상 그놈들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야 하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원래 몸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진짜 아이린 그레이스, ‘76번’을 잠시 떠올렸다. 내 몸의 원래 주인을.
잠깐 스치듯 읽었던 기억 속에서 76번은 몹시 비참한 삶을 살았었다. 그때 느꼈던 서글픔과 서러움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평생 저를 괴롭혀 온 저주가 마침내 사라졌다는 걸 알면, 그 사람 역시 뛸 듯이 기뻐했겠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치곤 정신을 차렸다.
그래. 감상적인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주가 풀렸어. 완전히 자유가 됐다고.’
이제 이안과의 계약만 완수하고 나면, 난 무슨 일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내 목숨이 남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게 생각보다 더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유라는 생각과 함께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졌다.
망할 나인 놈들은 이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 내가 여전히 저들 꼭두각시로 절절매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터였다.
“꼴 좋…… 콜록.”
소리 내어 비웃던 순간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나저나 이놈의 목이 요즘 왜 이러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부터 느꼈던 건데, 이유 없이 목이 불편할 때가 종종 있었다. 칼칼한 느낌 같기도 하고, 뻐근한 느낌 같기도 하고. 아무튼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혹시…….’
문득 든 가정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혹시, 역류성 식도염?’
현대인의 고질병 중 하나라는 역류성 식도염.
나 역시 그 병에 한창 시달릴 때가 있었다. 그때 밀가루와 탄산음료를 모조리 끊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짓을 여기서 또 해야 한다고?’
이 몸, 다른 건 몰라도 건강한 것 하나만큼은 굉장한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요즘 물밀 듯 밀려오는 보양식을 꾸역꾸역 먹고 지쳐 바로 잠든 게 화근이었던 듯했다.
나는 아네트가 매일 간식 시간마다 가져다주는 케이크와 쿠키들을 떠올렸다. 식도염을 낫게 하고 싶다면 그것들과도 당분간은 안녕을 고해야 했다.
“에이. 이 상황에 그까짓 케이크가 대수…… 쿨록.”
목 안을 모래알이 긁는 듯한 아픔에 나는 또 마른기침을 했다.
목을 부여잡은 채 나는 심각히 표정을 굳혔다.
슬슬 방치해선 안 되는 때가 온 걸지도 모르겠다.
* * *
“아이고. 아이린 님이 아니십니까?”
조심스럽게 치유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급 신관복을 입은 아가씨가 깜짝 놀라 나를 반겼다.
엘룬교는 무를 숭상하는 교단이다 보니, 신관들의 성력은 곧 전투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엘룬 교단에도 치유사는 존재했다. 다만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성력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건 아니다. 그건 현재 제국에선 황후 로렐라이만이 지닌 고유한 권능이다. 엘룬 교의 신관들은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의사에 더 가까웠다.
“어서 오십시오.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아, 시찰을 나오신 겁니까?”
신관이 긴장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몸이 불편한 곳이 있어서요.”
“네에? 성녀님께서요?”
신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하신 몸에 편찮으신 곳이 있다니. 당장 진찰을 받으셔야죠. 저희 수석 신관님을 얼른 모셔 오겠습니다.”
“네? 아뇨. 아무나 봐 주셔도 괜찮아요. 큰 병은 아니거든요.”
그냥 목이 좀 따끔거리는 증상에 불과한데 수석 신관을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손사래 쳤으나 신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모셔 오겠습니다!”
“아니…….”
신관을 말려 보려 했지만, 잽싼 그녀는 이미 문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몇 분 뒤, 그녀는 아주 나이 지긋해 보이는 신관을 대동하고 치유실로 되돌아왔다.
“오오, 정말 성녀님께서 왕림하셨군요.”
수석 신관이 온화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수석 신관 레베카 오닉스라고 합니다. 미천한 실력으로나마 성녀님을 진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디가 편찮으신지요?”
“그게…….”
나는 민망함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목이 조금 불편해서요. 아마 가벼운 식도염이 아닐까 싶은데요.”
“목이 편찮으시다고요?”
“네. 별것 아닌 병증이라 당황스러우시겠지만, 그게 전부예요.”
그러게 수석 신관까지는 필요 없다고 했는데……! 나는 옅은 원망을 담아 하급 신관을 바라보았다.
수석 신관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 저었다.
“가벼운 병증이란 없습니다. 티끌 같던 병환도 방치하면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 갈 만큼 나빠질 수 있죠. 아이린 님, 입을 한번 벌려 보시겠습니까?”
“아, 넵.”
나는 끄덕이곤 입을 크게 벌렸다. 수석 신관이 내 얼굴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좀 민망하네.’
지구에서 역류성 식도염을 진찰받을 땐, 이렇게 직접 의사 선생님이 목구멍을 들여다보진 않았었다.
다소 원시적인 진찰 방식에 민망함을 삼키는데, 수석 신관이 자그마한 수정 같은 것을 내밀었다.
“이것을 혓바닥 위에 올려 드릴 테니, 꿀꺽 삼키시면 됩니다.”
곧 작고 차가운 수정이 내 혀 위로 올라왔다.
그걸 삼키자, 시원하면서 조그마한 것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 식도 안을 탐험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시경……!’
원시적 진찰 방식이라는 말은 취소다. 이제 보니 이 세계의 의학도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내 목 안에 이 세계 버전 내시경을 집어넣은 수석 신관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듯 허공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마 수정과 촉각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원리일까. 마법인가?’
그렇다면 마탑과 성당도 아예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석 신관이 이마를 찌푸렸다.
“으음. ……이건.”
뭐지?
지구에서나 이곳에서나, 의사의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것은 똑같았다.
수석 신관의 심각한 얼굴에 덩달아 심장이 내려앉았다.
설마 식도염이 이미 많이 진행된 걸까?
‘만성 식도염으로 진화한 거면 안 되는데……!’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하던 내게 의사들이 겁주던 것이 떠올랐다. 이대로 계속 악화된다면 만성으로 번질지도 모른다고.
“기침 한번 해 주시겠습니까, 성녀님.”
수석 신관이 시키는 대로 하자, 수정이 매끄럽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신관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린 님. 혹시…….”
‘진짜 만성 식도염?’
한껏 긴장한 채 나는 수석 신관을 마주 보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최근 목 근처를 공격당하신 적이 있습니까?”
“……네?”
나는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공격을 당하다뇨?”
“마치 할퀸 것 같은 상처가 목 내부에 남아 있습니다. 짐작 가는 일이 없으신지요? 전투에 휘말리셨다거나.”
할퀸 듯한 상처라니?
목을 공격당한 기억은 단연코 없었다. 일단 환자의 본분에 따라 의사가 시키는 대로 짐작 가는 일을 뒤져 보았지만, 역시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최근에 휘말린 전투라고 하면…….’
나는 지하 무도회와 어제 맞닥뜨렸던 도마뱀을 떠올렸다. 그 두 사건이 전부였다. 하지만 광대도, 도마뱀도 내 목을 건드린 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두 사건 전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먼저 지하 무도회에서 대치했던 광대들. 수가 굉장히 많아서 조안 경조차 고전하고 있었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그놈들이 태풍이라도 맞은 듯 쓰러져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 당시엔 당연히 조안 경이 처치했겠거니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기는 했다. 분명 조안 경과 기사들은 떼로 몰려오는 광대들에게 힘겹게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눈을 감은 그 잠깐 사이, 각성이라도 한 듯 모조리 물리친 것이 조금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도마뱀 때도.’
그때 역시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내게 달려들던 도마뱀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나는 의심할 것도 없이 이안이 처치한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뒤로 물러나 있던 탓에 그때 이안과 나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안은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달려들었던 도마뱀을 처리한 걸까? 검기를 쓰지도 않았는데.
‘뭐지.’
나는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