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저를…… 요? 대모로? 엘, 흐흠! 아니. 그분이 절 지목했다고요?”
하마터면 엘리엇이란 이름을 말할 뻔했다. 그 이름은 세례식에서 받은 세례명이라 아직 쓸 수 없는데.
얼른 얼버무리자 다행히 아네트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네에.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이린 님? 생각 있으세요?”
“대모라니……. 제가 그런 역할을 맡아도 될까요?”
그냥 대모가 아니었다.
무려 원작 남주인공의 대모였다.
너무 어마어마한 역할에 듣기만 해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내 물음을 아네트는 다소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후후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물론 세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 다른 분의 세례식에 대모로 참석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긴 해요! 하지만 아이린 님은 무려 예지의 성녀님이신걸요. 아이린 님의 대자가 되는 건 누구든 영광일걸요?”
“으음. 으음……!”
나는 턱에 손을 대고 격렬히 고민에 잠겼다.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욕심도 피어올랐다.
‘내가 엘리엇의 대모가 된다니.’
원작을 수차례 읽은 독자로서 엘리엇은 내게 남동생 같은 존재였다. 잘됐으면 하고, 애틋한, 만약 남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은 존재. 나 혼자만의 비밀이지만.
원작 속에서 엘리엇은 대모를 얻지 못했다.
당시 그는 평생 길거리에서 자라 온 탓에 사회적 관계를 맺는 법에 익숙하지 못했고, 지나치게 출중한 능력 때문에 또래 기사들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그 탓에 대모 역할을 부탁할 만한 인맥을 쌓지 못했었다.
북적거리는 예배당에서 혼자 세례받던 엘리엇의 묘사가 유독 쓸쓸히 읽혔기에 마음이 쓰였다.
‘엘리엇이 수도로 올라와서도 스스로가 혼자임은 변함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었지.’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레 내 안의 욕망을 인정했다.
일생에 단 한 번 있을 세례식에서, 엘리엇을 혼자 쓸쓸히 두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저, 하고 싶어요. 그분의 대모.”
“앗, 정말인가요?”
아네트가 환히 웃었다.
“잘됐어요. 그분께서 정말 좋아하시겠네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엘리엇은 왜 나를 대모로 지목한 걸까? 첫 만남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의문을 가지면서도, 내심 원작 남주가 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흐뭇하기는 했다. 어쩔 수 없는 애독자이긴 한 모양이었다.
* * *
“안 됩니다.”
철벽같은 거절에 나는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았다.
“안 된다고요?”
점심시간, 나는 함께 식사하던 이안에게 지나가듯 대모 이야기를 꺼냈다.
허락을 받고자 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전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설마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네. 반대합니다.”
“왜죠?”
이안은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좁히더니,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곤 말했다.
“생각보다 부담되는 역할입니다. 여러모로. 그런 일에 굳이 심력 쏟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녀석이 왜 굳이 당신을 지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념하라 이르겠습니다.”
“상관없어요, 전. 부담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고요. 제가 괜찮다면 문제 될 건 없지 않아요?”
“아시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린. 대모가 된다는 건.”
이안이 미간을 굳히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세례식에서 대자에게 직접 축성을 내려 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축성엔 당연히 성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고요.”
“아…….”
“굳이 얼굴 한 번 본 꼬마를 위해 그런 수고를 쏟으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성력이라는 단어에 나는 기가 죽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례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었다. 이곳의 대모를 지구에서의 대모 역할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력으로 엘리엇에게 직접 축성을 내려 줘야 하는 역할이라면, 나는 불가능했다. 남자주인공이 가장 중요한 날, 능력 하나 없는 가짜에게 축성받게 할 순 없을 테니까.
“왜 그렇게 그 아일 신경 쓰시는 겁니까?”
이안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살짝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그 아이가 수도로 오게 된 것엔 제 책임도 조금은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약간 신경이 쓰이는 것뿐이에요.”
엘리엇이 활자로 만난 내 자식 같은 녀석이란 말을 할 순 없었기에, 나는 눈을 내리깔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 내 표정을 뭐라고 해석한 걸까.
잠시 침묵하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네?”
이안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의 대부. 제가 대신하겠단 이야깁니다.”
“네? 이안 님이요?”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성기사단장이 직접 세례를 내려 주는 경우도 있나요?”
“없진 않습니다. 전 안 해 봤지만. 말씀드렸듯 성가신 일이라.”
“그런데 왜……?”
제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처럼 구는 이안이 자기 입으로 성가시다고 한 일을 나서서 떠맡는 게 놀라웠다.
이안이 묘하게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하겠다고 하면 당신도 더는 신경 쓰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대는 은근히, 아니. 대놓고 고집이 쇠심줄 같으니.”
“…….”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엘리엇의 대모가 되어 주지 못하는 걸 마음 쓰는 것 같아 자신이 대신 그 역할을 맡겠다고?
이안 에스테반이, 내게 그런 친절을 발휘한다고?
정말 다행이긴 했다. 무려 성기사단장인 이안이 그 역할을 대신해 준다면 텃세 부리던 녀석들도 엘리엇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북적거리는 성당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일 역시 겪지 않게 되는 거다.
엘리엇에겐 참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러지?’
의구심을 가득 담은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내 표정에 이안이 살짝 움찔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런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이안 님. 요즘 꽤 이상하게 행동하시는 것 알고 계세요?”
“……무슨 말입니까?”
이안이 굳은 목소리로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내 의구심에 이미 불이 붙은 뒤였다.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으시죠?”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군요.”
“아니, 분명 있으세요.”
나는 하나하나 증거를 제시했다.
값비싼 보양식을 떼로 들이민 것, 어제 마탑에서 두 다리 멀쩡한 날 공주님 안기로 안아 올린 것. 그리고 오늘 일까지.
영 어색한 가정이라 여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요즘 이안은 나를 과보호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식사나 마저 하시죠. 접시가 하나도 안 비었습니다.”
“말 돌리시는 걸 보니까 더 수상한데요. 분명 있으시죠? 제게 숨기는 것.”
수많은 증거 중에서도 공주님 안기가 제일 수상했다. 이안은 원작에서 여주인공이 가련하게 쓰러졌을 때도 짐짝처럼 어깨 위에 메고 이송했던 인물이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으로서 부인의 건강을 걱정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네?”
“혹여, 제가 부담스러우십니까?”
이안의 벽안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 얼굴로, 저 보석 같은 눈으로 쳐다보며 부담스럽냐고 묻는데 어떤 여자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묵묵히 식사 시중을 들던 시종들까지 그를 흘긋거리며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완벽한 부부 연기를 펼치고 있는 이상, 저 말에 대고 더 추궁할 수는 없었다.
두고 보자. 나는 후일을 기약했다. 이건 이목 없는 곳에 단둘이 남았을 때 꼭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물론, 아니죠.”
나는 애써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당신께 부담을 느끼겠어요? 당신의 관심은 제 삶에 비료이고 양분인걸요, 여보.”
이제 느끼한 말을 줄줄 읊는 데도 이골이 났다. 처음에야 약간 어색했지, 이젠 예전 로맨스 소설에서 읽었던 대사를 재탕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거짓된 미소를 한껏 걸친 채 상냥히 말하자, 식탁 위에 올라 있는 이안의 손가락이 순간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내 대사에 꽤나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이런 반응이 더 날 부추긴단 말이지.’
내가 이안을 놀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니까.
그런 내 속내도 모르고 이안은 입가를 굳히고는 냉수를 들이켰다.
* * *
그날 저녁.
루시안에게 이안의 저녁 일정을 완벽히 확인한 나는, 다시금 심기일전해 화장대 앞에 섰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재료가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다. 아네트에게 부탁해 마련한 가을의 정령화까지, 전부 다.
‘자. 이번에야말로.’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아니. 아니. 그럴 리 없지.
황급히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낸 나는 다시금 레시피를 차근히 따라 했다.
두 번째이다 보니 해주약을 제조하는 손길이 저번보다 조금 더 익숙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 과정을 다시 한번 거친 뒤.
뻐꾹, 뻐꾹, 뻐꾹!
여덟 시 정각을 알리는 뻐꾸기시계 소리와 함께, 유리컵 안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손을 맞잡고 유리컵 안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걸레 빤 물 같던 용액이, 서서히, 아주 서서히 황금빛을 띠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처럼 눈부신 황금빛이었다.
“됐…… 다.”
긴장이 풀리며 나는 가볍게 휘청거렸다.
몇 초 안에 완벽히 황금색으로 변한 해주약은, 내가 본 어떤 보석보다도 황홀하리만큼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디. 냄새는…….”
유리컵 안에 코를 들이민 나는 다음 순간 홱 이마를 찌푸렸다.
이 지독한 식초 냄새. 원작 속 묘사와 똑같았다.
‘드디어 완성했다. 완성했다고!’
코를 찌르는 식초 냄새와 함께 환희가 심장을 뒤덮었다.
나는 유리컵을 경건히 들어 올린 뒤, 질끈 눈을 감고는 크게 입을 벌렸다.
꿀꺽, 꿀꺽, 꿀꺽.
목울대를 울릴 때마다 해주약이 거침없이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맛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지독한 식초 냄새 때문에 이미 후각과 함께 미각까지도 마비된 걸지도 모르지만.
잠시 뒤, 컵을 모두 비운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