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61)

80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예? 그게 도대체 무슨.”

“감히 성녀에게 저주를 걸 만한 사람이 당신의 부군 말고는 생각이 안 나서 말이지요. 그냥 성녀도 아니고, 무려 이안 에스테반을 남편으로 둔 성녀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도통…… 애초에 저주에 걸린 게 저 자신이란 말씀도 드린 적이 없는데요.”

나는 곤란하게 웃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속으론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리면서.

‘갑자기 훅 들어오네. 능구렁이 같은 인간……!’

“흐음. 뭐, 저야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곰 인형이 까맣게 반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고객님과는 벌써 이런저런 친분이 쌓여 있지 않습니까? 곤란에 처하신 거라면 얼마든지 손을 내밀 용의가 있어요, 저는.”

“참 감사한 말이지만, 내미실 필요 없답니다. 저는 지금 제 삶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거든요. 이안 님과도 당연히 행복하기만 하고요. 그분이 제게 저주라니, 나 참…… 상상이 심하세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이안이 내게 저주를 걸다니.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 가정이었다.

“그런 말씀 마시고 가을의 정령화를 어떻게 구하는지나 말씀해 주세요.”

“뭐. 간단하죠. 정령화는 희귀한 재료이지만 우리 탑에서 상시 취급하는 물품 중 하나이니, 일 층에 내려가셔서 구매하시면 됩니다. ‘가을에 채취된’이라는 단서를 꼭 붙이시고요.”

‘쉽다.’

그저 돈 주고 구매만 하면 된다니. 걱정했던 것보다 아주 쉬운 해결책이었다.

깊이 차오르는 안도감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객님. 기억하세요.”

곰 인형이 비밀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언제나 성녀님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요.”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야 고객님이 궁금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곰 인형이 방긋 웃었다.

리젤로의 목소리에는 순도 백 퍼센트의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학자인 그가 얼마나 집요한 탐구심을 지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 순간 본능적으로 소름이 등골을 내달렸다.

저 호기심은 나 개인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성녀라는 내 지위를 향한 것일까.

‘원작에서도 리젤로는 성녀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었지.’

돋보기로 관찰당하는 실험실의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묘하게 올라오는 긴장에 나도 모르게 꾹 주먹을 움켜쥐던 순간이었다.

“소, 소, 소, 손님―!”

퍼석!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무언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홱 바라보았다. 바로 문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지.”

곰 인형의 미간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리젤로가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맞닥뜨렸다.

“이, 이안 님?”

이안이 오른손에 든 검으로 바닥을 내리찍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처참히 깨져 있는 광경에 나는 기겁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내가 대신 물건 받아 와도 된다며, 기다리겠다며!

왜 잠시 들어가 있는 동안 남의 집 바닥을 부수고 있는 건데!

“아. 나오셨습니까.”

이안이 태연히 나를 돌아보았다.

“벌레를 좀 잡고 있었는데. 들렸습니까?”

벌레? 뜬금없이 웬 벌레?

시선을 아래로 내린 나는, 그제야 이안의 검 끝에 웬 검은색 도마뱀 같은 것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대체 뭐지?’

그건 도마뱀처럼 생기긴 했으나, 정말 도마뱀 같지는 않았다. 시커먼 연기처럼 생긴 그것은, 마치 도마뱀의 그림자만을 뚝 떼 온 것처럼 이질적인 생김새였다.

“비싼 대리석인데…… 이게 무슨 짓이신지요? 손님.”

리젤로가 물었다. 늘 여유작작하던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그제야 이안이 곰 인형을 돌아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곰 인형을 훑어본 이안이 냉소를 머금었다.

“아, 그래. 어쩐지. 단순한 사회자가 아니었나.”

이안의 입가가 이죽거렸다.

“사람들 앞에 본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는 악취미는 들어 알고 있지. 당신이 마탑주인가?”

대뜸 이안이 곰 인형의 정체를 짚어 냈다.

속으로 기겁하는데, 리젤로가 고개를 기울였다.

“곧잘 알아보시네요. 보통 거기까지 바로 추측하진 않는데?”

“무생물을 이렇게까지 자유자재로 움직일 만한 마력이라면 당신뿐이겠지.”

“하하. 저희 탑의 마법사들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 아닌가요?”

이안이 귀찮은 눈으로 곰 인형을 노려보았다.

“잡설은 됐고. 아이린. 이리로 오시죠.”

이안이 내게 까딱 손짓했다.

검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하도 살벌해 보여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이안 곁에 섰다.

날 제 뒤로 가린 이안이 리젤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부인껜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난데없는 이안의 추궁에 나까지 깜짝 놀랐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안 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그저 낙찰받은 물건을 받으러 온 것뿐인걸요! 이 곰 인형님께서 설마 마탑주님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어요.”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곰 인형으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그런 나를 이안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어색한데.”

“어색하다뇨?”

나는 억울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반대로 이안의 눈은 가늘어졌다.

나를 빤히 관찰하며 이안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설마…….”

들켰나?

가슴이 서늘해진 순간이었다.

“으앗!”

검은색 도마뱀의 상체가 내게 홱 뛰어들었다.

하체는 이안의 검에 꽂힌 그대로, 상체만이 분리되어 내게 달려든 것이다.

소름 끼치는 모습에 나는 허둥지둥 뒷걸음질 쳤다.

“어딜 감히.”

이안이 대리석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허공을 내리그었다.

검의 궤적은 정확히 내게 달려들던 도마뱀의 상체를 반으로 갈랐다.

“허, 헉……!”

눈앞에서 펼쳐진 검무에 나는 넋을 잃었다. 도마뱀이 달려들었다는 것보다도, 허공을 날던 그것을 귀신같이 베어 버린 솜씨에 더 소름 끼쳤다.

“괜찮습니까?”

이안이 찌푸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반쯤 넋 놓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안이 검에 통달했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직접 그 실력을 목격하게 될 때면 새삼스럽게 놀라게 된다.

‘인간은 맞는 거냐고……!’

공 하나 던질 때도 허우적거리는 내게 이안은 그저 외계인처럼만 보였다.

이안이 이번엔 리젤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집안 관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냉소를 머금은 이안이 이죽거렸다.

“날파리 들끓는 집에서 혼자 사는 건 상관없지만, 내 부인께서 피해를 입으실 뻔하지 않았나.”

난데없이 한 소리 들은 리젤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런 게 숨어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집주인으로서 조금 부끄럽긴 하군요.”

“남을 초대하기 전엔 집 안 청소부터 하는 게 상식이란 것도 모르나?”

“상식으로 말하자면, 남의 집 바닥재를 박살 내는 것도 손님으로서의 예의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리젤로가 이안이 박살 낸 대리석 바닥을 지적했지만, 이안은 뻔뻔히 비웃음만을 머금었다.

“집안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내가 구태여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었겠지.”

성기사단장과 마탑주가 서로를 향해 날 선 빈정거림을 주고받고 있었다. 행여나 불똥이 튈까 무서운 광경이었다.

멀리 도망치고 싶은 광경에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레 손을 들고 물었다.

“그, 그래서…… 아까 그건 대체 뭐였던 건데요?”

모로 봐도 수상해 보이는 생물체에게 습격을 받을 뻔한 입장으로서, 묻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종의 정령입니다. 서식지가 마계라는 게 문제지만.”

“네? 마계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내 눈의 휘둥그레졌다.

“마계에서는 흔한 벌레의 일종입니다. 이쪽 세계에서 발견됐다는 건, 누군가 소환 의식을 거행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흐음…….”

“의도적으로 소환된 생물이란 말씀인가요?”

“저런 별것 없는 벌레를 일부러 소환하진 않았을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악마를 소환할 때 그 여파로 함께 끌려 들어온 놈이었겠죠.”

그 말에 지하 무도회에서 있었던 소환 의식이 떠올랐다.

그때 함께 마계에서 끌려온 놈이었던 걸까?

“한두 마리가 아니다. 광장에서도 발견됐었으니.”

“정말입니까?”

“착시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본 게 맞았던가 보군.”

방금까지 살벌히 으르렁거리던 둘이 이번엔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곰 인형이 마탑주라는 걸 알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하대하는 이안의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이안은 황족이고 리젤로는 아무튼 제국민이니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탑주를 저렇게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사람은 대륙에서 이안이 유일할 것이다. 아마 황제조차도 못 저럴걸.

잠시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

도마뱀의 두 동강 난 상체가 아닌, 이안의 검에 꽂혀 있는 하체에서 슬금슬금 머리가 돋아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안과 리젤로는 대화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분명 도마뱀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둘을 향해 소리치려던 순간, 다시 돋아난 그것의 머리가 검에 꽂힌 제 몸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도마뱀의 검은 입이 나를 삼킬 듯 쩍 벌어졌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빨도, 혀도. 그저 무저갱처럼 깊은 어둠뿐이었다.

그 안과 눈이 마주친 나는 순간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아…….’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엄마 없이 처음 잠들었던 기억. 처음 체벌 받았던 기억. 고아원의 언니 오빠들에게 따돌림당했던 기억. 슬펐던 기억들, 악몽 같던 기억들…….

그것들이 한꺼번에 내 머릿속을 덮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