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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79/161)

79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경매 내내 행사를 주관하던 곰 인형이 거기 서 있었다.

“……마탑주 님이시죠?”

“헉. 어떻게 아셨지.”

곰 인형, 아니. 리젤로가 뻔뻔스레 너스레를 떨었다.

“멜로디 양의 집에서도 인형으로 절 놀라게 한 전적이 있으시잖아요.”

“그랬죠, 참. 하하하. 지금 내 진짜 몸은 북쪽 동토에 있거든요. 북녘 마탑과 교류를 해야 해서요.”

“아, 네. 그러시군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마탑주의 개인 사정을 알게 되었다.

관심 없는 티를 내자 곰 인형이 쿡쿡 웃었다.

“물건부터 전달 드려야겠네요. 저로선 솔직히 좀 기뻤어요. 물건이 진정한 주인을 찾은 것 같았달까.”

“진정한 주인?”

“성마석을 발견한 건 고객님이시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발견한 건 리칼리온 마을 사람들이지, 제가 아니죠.”

“고객님이 아니라면 동굴 속 마을 사람들은 전부 죽고, 그대로 성마석과 함께 묻혔을지도 모르는데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그나저나, 왜 성마석을 경매에 내놓으신 거죠?”

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일반인 손에 들어갈 만한 물건이 아니란 건 탑주님이 제일 잘 아실 텐데요.”

“그 물건은 실패작입니다.”

곰 인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현재 우린 성마석을 정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북녘 마탑과 교류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아무튼, 성마석에 담긴 마력이 워낙 어마어마하다 보니 정제하는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 과정에서 실패작도 꽤 나오고 있죠. 고객님께서 십사만 골드를 쾌척하신 그 물건 같은.”

곰 인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정확히 말하면 고객님의 부군께서 쾌척하셨죠. 음. 솔직히 두 분의 사이가 진짜 사랑으로만 이루어진 관계일까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오늘 일을 보니 의심이 좀 가시긴 했어요. 최소한 부군께서는 고객님께 꽤 진심이신 것 같네요.”

역시 사랑조차 돈으로 치환하는 리젤로의 발언다웠다.

십사만 골드에 리젤로는 나를 향한 이안의 사랑을 의심 없이 믿어 버린 모양이었다. 굳이 정정해 줄 필요 없는 착각이기에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맞아요. 그분이 절 좀 많이 아끼시죠. 그나저나 물건부터 건네주시겠어요? 남편이 절 애타게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안이 날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면 정말 식은땀이 흘렀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온 용건은 성마석을 건네받는 것뿐만이 아니기에 더 그랬다.

“뭔가 조급해 보이시네요? 알겠습니다! 물론 건네드려야죠.”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 곰 인형이 어딘가로 손짓했다.

그러자 저편에서 황금색 쟁반 같은 것이 날아오더니 내 앞 테이블에 안착했다.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베테랑 웨이터처럼 곰 인형이 사근사근 쟁반 위 돔을 열었다.

무지개를 한데 뭉쳐 놓은 듯한 보석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예쁘긴 하네요.”

“그렇죠? 실패작이긴 하지만 겉모습 하나는 마음에 들더군요. 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이 보석엔 묘한 기능이 하나 더 있답니다.”

“기능?”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곰 인형을 올려다보았다.

리젤로가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정제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성마석엔 일반 마석보다 훨씬 많은 마력이 담겨 있습니다. 인체에 해를 끼칠 만큼은 아니지만요. 아무튼, 보석 자체가 지닌 마력이 너무 큰 탓인지 미묘한 부작용이 생겼는데요.”

“부작용이라면……?”

곰 인형이 제 머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성마석의 마력에 묻혀 이걸 지니고 있는 사람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부작용입니다. 멀쩡히 대화를 나눴는데도 몇 시간 뒤면 존재가 잊히더군요.”

“그런 부작용이 있다고요?”

나는 놀란 눈으로 성마석을 내려다보았다. 곰 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개량해서 암살 길드 같은 곳에 팔아먹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그 같은 부작용을 인위적으로 더 만들어 낼 순 없더군요. 백만분의 일 확률로 생성된 실패작이 그 물건입니다.”

곰 인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고객님께 딱히 쓸모가 있는 부작용은 아니겠군요. 역시 그냥 관상용으로 써 주세요.”

글쎄.

나는 가만히 성마석을 들여다보았다.

리젤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물건은 내게 아주 유용해질 수도 있었다.

‘내가 이안의 비호를 받는 건 앞으로 고작 반년.’

반년 뒤면 누구의 보호도 받지 않은 채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가장 위협적인 건 역시 나인이었다.

‘부작용이 진짜라면 추적을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될지도 몰라.’

어쩌면 남의 십사만 골드로 생각지도 못한 굉장한 보석을 손에 넣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여섯 시를 울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야.’

내가 이 고생을 해 가며 리젤로를 만나려 노력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탑주님. 실은 탑주님의 고견을 구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제 조언이 필요하신가요?”

곰 인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영광이네요. 무슨 일인가요?”

나는 짧게 심호흡한 뒤, 해주약의 재료에 대해 먼저 털어놓았다.

위험한 선택이었다. 나는 내가 저주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해주약 제조에 실패한 이상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보이어 산 정령화와, 카쿨타 진액. 오르비 열매라…….”

재료 이름을 들은 리젤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과격한 조합인데. 정확한 레시피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해주약의 레시피를 모두 리젤로에게 전했다.

곰 인형의 까만 눈이 생기로 반짝거렸다.

“흥미로운 레시피군요.”

리젤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흥미로운데. 꽤 신선하기도 하고…… 음. 발상이 기발해. 과감하면서도 절제됐군.”

혼자만의 세상에 빠진 리젤로가 중얼거렸다. 레시피를 제작한 게 또 다른 자신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는 열심히 자화자찬했다.

잠시 뒤 그가 홱 나를 바라보았다.

“누굽니까? 이 레시피를 고안한 게.”

“그건…….”

“누군지 알려 주세요. 꼭 알아야겠습니다. 저와 이야기가 아주 잘 통할 것 같거든요.”

그야 잘 통하겠지. 자기 자신이니까.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리젤로를 진정시켰다.

“그, 여행 중에 어쩌다 만난 귀인께 전해 들은 건데…… 연락처 같은 건 나누지 않았어요. 저도 그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나요? 나이대는?”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죄송해요. 어쩌면 그분이 제 기억에 손을 대셨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신상이 알려지는 걸 굉장히 꺼리셨거든요!”

“그렇습니까? 하긴.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천재들은 대개 괴팍하니까.”

갑자기 스스로를 괴팍하다며 욕한 리젤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칫. 세상은 역시 넓군. 나만 한 천재가 또 있을 줄이야.”

“…….”

리젤로의 멈추지 않는 자화자찬에 나는 흐린 눈을 했다.

그때 리젤로가 번쩍 고개를 들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시간제한 저주를 해주하는 약은 왜 필요한 겁니까?”

깜짝 놀란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리젤로는 레시피의 정확한 용도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해주약의 제작자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지만.”

나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은 척 침착한 눈으로 리젤로를 마주 보았다.

“말씀드릴 수 없겠어요. 제가 궁금한 건 그저 왜 해주약이 정상적으로 제조되지 않는 것뿐입니다.”

“비밀이라는 거군요…… 흐음.”

리젤로가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에 빠졌을 때의 버릇인 듯했다.

“뭐. 알겠습니다. 고객님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은 금방 드릴 수 있겠군요.”

“네? 정말인가요?”

“예. 정상적으로 제조해도 마지막 단계에서 황금빛으로 액체가 변하지 않는 게 고민이시죠?”

“맞아요. 맞아요!”

나는 용한 무당을 만난 것처럼 열띠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면 들여다본 듯 상황을 저렇게 정확히 파악하는지, 이 순간 그가 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유는 간단해요. 재료가 틀렸거든요.”

“재료가……?”

나는 혼란스레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내가 준비한 재료는 완벽했다. 원작 속에서 여주인공이 제조에 성공했을 때와 전혀 다를 게 없는 재료들이었다.

“네. 틀렸어요. 고객님께선 다른 정령화를 쓰셨거든요.”

“다른 정령화라뇨?”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보이어 산의 정령화는 정령의 정기가 담겨 있기로 유명한 약재였다.

보이어 산은 정령들이 살기로 이름난 곳인데, 안개에 자욱히 가려져 있어 평상시엔 등반조차 어려운 산이다. 게다가 정령화는 절벽 끝에만 나는 습성이 있어 채취가 무척이나 까다롭다고 들었다.

그렇다 보니 굉장히 값이 나가는 재료지만, 종류가 나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보이어 산은 정령들이 서식하는 영산이죠. 다들 그렇게만 알고 있지만, 사실 매번 같은 정령들이 살고 있는 건 아니랍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계절마다 활동하는 정령이 달라요. 가령 지금 같은 여름이면 여름잠을 자는 정령들은 자취를 감춘 상태겠죠. 그렇다 보니 그것들이 내뿜는 정기도 종류가 다르죠.”

“그런…….”

나는 혼란스레 중얼거렸다.

그런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만약 리젤로의 말대로 계절마다 다른 정령이 활동하는 거라면, 정령화 역시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고객님께서 가져오신 레시피는…… 다른 재료들의 성분을 따져 봤을 때, 아마 캐더피의 정기를 머금은 정령화가 필요할 듯하네요.”

“캐더피?”

“가을에 나타나는 정령입니다.”

가을.

그 말에 머릿속을 스치는 묘사들이 있었다.

원작에서 여주인공이 한창 활약하던 시기가 바로 단풍이 얼룩진 가을이었다.

“그런 차이가 있었다니.”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머릿속에 안개가 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고객님.”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내게 리젤로가 말을 걸었다.

“그 저주는, 혹시.”

비밀을 속삭이듯 음험하고 은밀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곰 인형의 까만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군께서 건 저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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