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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5/161)

75화

“아이, 참.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애교스럽게 고개를 갸웃한 아이린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안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눈을 깜빡거리는 건 아이린이 거짓말할 때 종종 나오는 버릇이었다.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군.’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걸까.

이안은 무표정 뒤로 기막힘을 삼키며 아이린을 마주 보았다.

“내일, 저희가 만난 지 170일째 되는 날이잖아요.”

170일?

이안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내일은 정말 아이린이 그의 침실에 떨어진 지 정확히 170일 지난 날이 맞았다.

이안은 제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170일이라, 그랬습니까.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어머, 무심하셔라. 저희가 만난 지 딱 170일 되는 기념일이라니까요?”

이안의 반응은 이번에도 같았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레하트 제국에는 부부간에 챙기는 기념일이 결혼기념일과 각자의 생일 외에 딱히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반응 없는 이안에게 아이린이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기념일이니 이름값을 해야죠. 기념하러 가요, 저희.”

“170일을 말입니까?”

“그럼요. 17은 예로부터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잖아요? 특별한 날짜니 당연히 기념해야죠.”

만난 날짜로 기념일을 챙기는 문화를 아예 겪어 보지 않은 이안에게는 아이린의 주장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안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린을 보니, 어쩐지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뭐. 이쯤이야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아이린이 어디까지 가나 궁금해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죠. 뭘 하고 싶습니까?”

선선한 대답에 아이린의 눈이 순간 커졌다.

‘통했다!’

170일 기념일은 자신이 생각해도 무리수인 감이 있었는데, 의외로 시작이 무난했다.

하지만 과연 다음 제안까지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이린이 도전적인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보는 동안, 시종들은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들었어? 들었어?’

‘만난 지 170일째 되는 날짜라서 기념해야겠대. 너무 귀여운 발상이셔.’

‘근데 기념하는 기준이 뭐야? 여태 특이한 숫자면 다 기념해 오셨나? 50일, 100일, 뭐 그런 것도?’

‘몰라. 그러셨나 봐. 어쩜. 서로를 만난 게 두 분껜 그만큼 특별한 사건이었단 거지!’

베테랑 시종들답게 눈짓만으로 빠르게 마음을 교환한 시종들은, 아이린이 입을 열자 얼른 다시 귀를 기울였다.

“사실 하고 싶은 게 있긴 해요.”

“잘됐군요. 뭡니까?”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한 걸 하고 싶은데…….”

아이린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훔쳐본 시종들이 또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나저나 오늘 성녀님, 너무 아름다우시지 않아?’

‘그러게. 원래도 아름다우시지만 오늘은 뭔가 또 다른 느낌이셔.’

‘원래 저렇게 성숙해 보이셨나……?’

흰 계열 옷을 즐겨 입던 평소와 달리 남빛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은 아이린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마냥 청순하게만 보이던 성녀님께 저런 면모도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특별한 일?”

묘하게 굳은 목소리로 이안이 물었다. 아이린이 눈웃음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아시나요? 마침 딱 내일부터 연인들을 위한 축제가 열린다더군요. ……마탑에서요.”

‘마탑?’

‘마탑!’

그 단어에 시종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당과 마탑은 서로 배척하는 집단은 아니었지만, 딱히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다.

성녀와 성기사단장이 서로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찾는 장소가 마탑이라니,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 축제라면 인정이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죄>.

이름 한번 거창한 그 축제는 마탑이 개최하는 축제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날 마탑에서는 연인들을 위한 온갖 행사와 상품들을 볼 수 있었다. 한 해 내내 그날만 기다리는 연인들이 제국에 수두룩할 정도였다.

시종들은 눈짓을 교환하며 고갤 끄덕거렸다. 그 눈짓엔 모두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반면 이안의 낯빛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마탑?”

“네. 기억하시죠? 일전에 제게 약조해 주셨잖아요. 마탑이 궁금하다면, 이안 님께서 직접 구경시켜 주시기로요.”

이안은 낮게 헛웃음을 쳤다.

그래. 그랬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린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 그녀가 마탑에 가려고 몰래 외출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자신은 아이린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었다.

그 이야기를 이제 와서 꺼낸다, 라.

이안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아이린을 내려다보았다.

“묘하게 마탑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부인께서는.”

“하하, 아뇨. 마탑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죄’ 축제가 궁금한 거죠.”

“……무슨 축제?”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죄!”

이안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정말 그렇게 길고 이상한 이름의 축제가 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이린은 그 눈빛을 모른 체하고 말을 이었다.

“아네트에게서 작년 축제 얘길 들었는데, 정말 재밌었대요. 연인들을 위한 즐길 거리나 볼거리가 별처럼 많다던데요? 특히, 저희처럼 뜨거운 연인을 위한 것들이요.”

아이린이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일견 뻔뻔스러워 보이는 아이린이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제발 대충 넘어가 줘라. 제발!’

어떻게 하면 마탑에 입성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던 차에 아이린은 이번 축제에 관해 알게 되었다.

마침 예전에 이안이 했던 약속도 있겠다, 아이린은 한번 도박수를 던져 보기로 했다. 그녀가 세운 계획대로라면, 그렇게 어떻게든 마탑에 입성하는 데에만 성공한다면 리젤로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죄, 라…….”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서늘히 웃었다.

“내 부인께서 신혼 생활이 슬슬 무료해지시나 보군요.”

보기만 해도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은 미소에 아이린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역시 거절인가?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아이린은 두 번째 강수를 두기로 했다.

“이안 님 때문이잖아요.”

아이린이 돌연 눈을 치켜떴다.

원망하는 것 같으면서도 애교 서린 눈짓에 이안이 순간 흠칫했다.

“이안 님이 요즘 너무 바쁘시니까, 저랑은 시간도 잘 안 보내 주시니까…….”

“아이린.”

“물론 많이 바쁘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저는 조금 이안 님과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아이린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종들 사이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모습이 전부 연기라는 걸 아는 이안은 황당히 아이린을 지켜보았다.

‘무슨 꿍꿍이일까. 이번엔.’

이안은 최근 그 어떤 생물보다도 눈앞에 선 여자의 머릿속이 이해되지 않았다.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한 것 같다고 방심하면 바로 뒤통수를 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분홍색 머릿속에서는 정신없이 계산이 굴러가고 있겠지.

이안은 천천히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마탑이라. 특별히 안 될 이유는 없었으나, 매력적인 선택지도 아니었다. 특히 요즘처럼 흑마법사들이 기승을 부리는 때에는.

무엇보다 아이린이 이전부터 굳이 마탑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신경 쓰이기도 했다.

거절을 말하기 위해 이안이 입술을 연 순간이었다.

“정말 안 될까요? 여보.”

아이린이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정말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아이린이 슬쩍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꿀을 바른 듯한 황금색 눈동자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 묘하게 촉촉이 젖은 눈이 유리구슬처럼 반들거렸다.

따끔.

순간 이안은 약한 전류 같은 것이 가슴께를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

그는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생소한 것을 보듯 기묘한 시선으로.

방금 분명 심장에 약한 충격이 일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착각이었겠거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이안은 그렇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인 그는 제 몸의 변화에 짐승처럼 민감했다.

문득 요즘 이안이 너무 과로하고 있다며 읍소하던 루시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말 자신이 최근 무리를 하고 있는 걸까?

당혹스러운 의문에 사로잡힌 이안은 다시금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린이 다시 달라붙어 왔다.

“네에? 여보.”

또, 따끔.

이안은 반사적으로 아이린으로부터 물러났다. 갑자기 멀어진 이안을 아이린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안 님?”

“알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되돌아온 이안이 입을 열었다.

“네? 뭐가요?”

“함께 가겠다는 이야깁니다. 연인이라면 모두 무죄라니, 법학은 발로 공부한 것 같은 이름의 그 축제 말입니다.”

어쩌면 요즘 자신이 정말 무리하고 있기는 한 걸지도 몰랐다. 겹겹이 쌓이고 쌓인 철야가 마침내 몸에까지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왕 쉬어야 한다면, 제 부인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마탑에 가고 싶어 하는 건지 곁에서 직접 확인하며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정말이세요?”

한편 아이린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정말 이렇게 넘어온다고? 생각보다 더 쉬운데?

“대신.”

이안이 말을 이었다.

아이린은 바짝 긴장했다. 역시 조건이 있구나.

‘그럼 그렇지.’

그 이안 에스테반이 이렇게 손쉬울 리가 없었다.

‘뭐가 됐든 좋다. 와라!’

현재 아이린에게 해주약을 제조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용감해진 아이린은 비장히 이안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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