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정신 차려. 정신 차리자.’
호흡이 조금씩 가빠 왔다.
이대로라면 나와 밀착해 있는 이안 역시 내 이변을 알아챌 터였다.
나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러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왜 이렇게 숨쉬기가 답답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환기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이 방의 습도를 재면 평균치를 훨씬 웃돌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본능적으로 자기방어에 사로잡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제 고작 반년 남았네요.”
하필 이 이야기가 튀어나오다니.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반년’이 의미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의 계약 기간밖에는.
‘하고 많은 화제 중 하필 계약 얘기냐고!’
나는 순발력 없는 내 머리를 몹시 탓했다.
이안 역시 난데없는 화제에 당황한 걸까. 몇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계약이 끝나면.”
잠시 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뭘 하실 계획입니까?”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안이 내게 계약 뒤의 일을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
‘계약이 끝난 뒤라.’
사실 아직 크게 생각해 둔 것은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는 데 급급했기에.
하지만 대충 윤곽은 잡혀 있었다. 사실 해야 하는 일이 하나밖에 없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내 집. 내 지구.
내 친구 소연이가 기다리는 곳으로.
방법은 모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 도서관에서 다른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뒤져 본 적도 있지만 성과다운 성과는 얻지 못했다. 나와 같은 일을 당한 사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 더 맞았다.
계약이 끝나 수도를 떠나게 되면, 내게는 계약금 말고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맥도, 기반도. 그저 일 년간 이곳 사람들과 쌓은 추억만이 남겠지.
그것만을 지닌 채 쓸쓸히 연고 하나 없는 곳을 떠돌고 싶진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하지만 이안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글쎄요. 귀농이나 할까 봐요.”
농담하듯 내가 말했다. 이안이 부디 넘어가 주길 바라면서.
“이안 님께 받은 돈으로 땅을 엄청 크게 사서요. 옛날부터 땅 부자가 꿈이었거든요.”
“당신이 농사를?”
머리 위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노골적인 웃음소리에 묘한 고집이 발동했다.
“네. 전 고구마를 좋아하니까 고구마 농사나 지을까 봐요. 양지바른 곳에서 고구마 왕이 돼야지.”
실없는 소리를 하자, 어쩐지 반대로 기분은 싱숭생숭해졌다.
계약이 끝나기까지 이제 고작 반년가량이 남았다.
반년 뒤면, 이안은 애초 약속했듯 나를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본인마저도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왜 자꾸 괜한 생각이 드는 거지.’
입술을 깨문 나는 묘한 기분을 몰아내기 위해 일부러 더 실없는 소리를 했다.
“제가 없어지면 그래도 약간은 심심하시겠죠? 고구마 농사가 잘되면 들고 찾아올게요. 사 주셔야 해요.”
헛소리를 나불대자 이안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뇨, 오지 마십시오.”
“왜요? 저렴하게 드릴 건데요. 비싸게 사 주시면 더 좋지만.”
“그래도 오지 마십시오.”
단호한 대답에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입을 다물자 침묵이 맴돌았다.
몇 초 뒤 이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계약이 끝나면, 그대는 수도 근처에 발도 들이지 마십시오. 나를 아는 티도 내지 마십시오.”
이안의 목소리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담담한 이야기에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목석 아니랄까 봐, 농담도 안 받아 주네.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던 나는 문득 숨을 멈췄다.
‘아.’
깨달음이 머리를 덮쳤다.
이안이 아무리 목석이어도 농담 하나 통하지 않을 정도로 벽창호는 아니었다.
그는 정말 내가 계약 이후 수도에 얼씬도 하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자신과의 관계를 단절하길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나를 위해서일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구나.’
조금 전의 담담한 당부는 그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이안은 원작의 흐름대로 반역을 일으킬 것이다.
여태 많은 일이 원작과 어긋났지만 그것만큼은 틀어질 리 없었다. 그 복수만을 위해 이안은 아주 오랜 기간 숨죽인 채 칼을 갈아 왔으니까.
그리고 그의 그런 복수는 성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안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아무리 이안의 능력이 출중하다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나라의 모든 군권과 권력을 틀어쥔.
성기사단의 병권과 이안 자신의 능력을 모두 합해서라도, 황제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확신할 순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경우의 수에 넣고 있었다.
‘어떤, 기분일까.’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제가 죽을지도 모르는 복수를 위해 십여 년을 잠겨 있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눈을 떠 아직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있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소설 속에서 활자로 보던 것과 달리, 이제 내 눈앞에서 나와 똑같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안을.
‘……내가 만약 작가였다면.’
이안에게 원작과 같은 운명을 선사하진 않았을 것이다.
평생 노력하며 칼을 갈아 온 사람에게 그런 식의 최후를 안배하진 않았을 것이다.
찰랑이는 물처럼 가슴 속을 채우는 열망에 나는 꼭 주먹 쥐었다.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간 정이 들어 버려서? 이안이 가엾어서? 그도 아니면 인류애?
이유는 뭐가 됐든, 나는 이안의 해피 엔딩이 보고 싶었다.
* * *
다음 날, 나는 아네트와 조안 경에게 하루 종일 침실에서만 뒹굴 것을 선언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안에게도 같은 포부를 밝히자, 그는 별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어젯밤 삼킨 성력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 말에 내 앞에 그릇을 놓아 주던 시종의 손끝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다른 시종들 역시 빠르게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뺨이 분홍빛으로 물든 시종들도 있었다.
별생각 없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이안의 말은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성력은 보통 접촉으로 전해지니까.
‘일부러 그런 건가.’
나는 이안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어째 날이 갈수록 고단수가 되어 가는 듯하다. 이 방면에서만큼은 내가 언제나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입을 가리고 하품하며 말했다.
“그러게요, 하암. 간밤은 정말 피곤했어요. 휴, 아직도 졸음이 안 가시네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워만 있었던 네가 피곤할 일이 뭐가 있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곁눈으로 주황 머리 시종의 반응을 슬쩍 확인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겉으로 특별한 티가 나지는 않았다.
‘저 사람이 황제가 심은 간자란 말이지.’
황제도 참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이안을 누구보다 경계하면서, 또 너무나 유용한 그를 내치지도 못한다.
아마 저 시종이 캐내려는 것은 비단 나와 이안의 사이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안 측의 내밀한 정보라면 뭐든 캐내려 들겠지.
나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드물게 이안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세상 바쁜 일은 혼자 다 짊어진 사람인데 날벌레까지 붙다니.
“아무튼, 종일 쉬겠다니 잘됐습니다. 마침 보양식도 새벽에 도착했다 하더군요. 제논, 준비되는 대로 부인 방에 들이도록.”
“예, 단장님.”
제논이라 불린 주방장이 정중히 대답했다.
‘보양식?’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이 나를 위해 보양식을 준비했다니. 대체 뭘까?
나는 대부분의 보양식은 잘 먹는 편이었다. 홍삼이나 도라지 같은 것들은 내 또래들은 쓰다며 질색하고 싫어했지만, 나는 어쩌다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꿀떡꿀떡 잘 받아먹었다. 돈의 맛이라고 생각하면 쓰기는커녕 달더라고.
* *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나는 은접시 위에 놓인 것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걸, 먹으라고요?”
직접 서빙한 주방장 제논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예, 성녀님. 단장님께서 직접 공수해 오신 보양식입니다. 오백 년이나 묵은 용의 발톱이죠!”
오백 년 묵은…… 뭐? 발톱?
나는 시퍼레진 안색으로 은그릇 위에 놓인 것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발톱처럼 생긴 그것을.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진짜 발톱이라니.
아무리 몸보신이 좋아도 이건 너무하잖아!
“한 입 드시는 순간, 향후 오 년 치 기력이 한 방에 충전되실 겁니다. 정말 귀한 음식이죠. 단장님께서 성녀님을 아주 많이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흐뭇해 죽겠다는 얼굴로 제논이 말했다.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발톱을 바라보았다.
‘이거, 신종 괴롭힘……?’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나는 그것의 일부분을 꿀꺽 집어삼켰다.
잠시 뒤, 최고의 보양식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는지, 정말 몸이 신기할 정도로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떠십니까, 성녀님?”
“활력이 샘솟는 기분이에요.”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한순간에 컨디션이 최고조로 올라왔다.
이 기분이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잘된 일이었다. 이안에겐 하루 종일 침대에서만 뒹굴 것이라 공언했지만, 사실 내겐 은밀히 할 일이 있었으니까.
‘오늘이야말로 아무 방해도 안 받겠지.’
오늘 이안은 하루 종일 업무로 바쁘다 했다.
간밤처럼 해주약 제조에 방해받을 일은 없으리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