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황후가 주최한 무도회라니. 전혀 몰랐다.
요즈음은 정말 너무도 바빴기 때문에.
아덴이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전부 다 참석한 무도회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창 만인의 관심을 받고 계시는 아이린 님께서 등장하시지 않아, 폐하께서 다소 아쉬워하시는 것 같더군요.”
나는 흐린 눈으로 아덴을 올려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기억을 전부 까놓은 채 묻고 싶었다.
근 한 달간 나는 성기사단장에게 들쳐 업혀서 마족들 한가운데를 돌파하고, 원작 남주인공을 만나고, 암흑 경매에 강제로 참가한 데다가, 나인이라는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한 달 내로 남편에게서 피를 내라는 협박까지 받았는데, 과연 내가 무도회에 연연할 정신이 있었겠느냐고.
내가 대답 없이 빤히 저를 바라만 보고 있자, 아덴이 또 안타까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아이린 님께서는 수도의 귀족 문화가 아직 익숙지 않으시겠죠. 수도의 사교계는 역사가 워낙 오래된 만큼, 거추장스러운 예법이나 불문율이 별처럼 많기는 합니다. 아이린 님께서 적응하지 못하신 것도 당연해요.”
나는 슬며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말꼬리가 길고도 길지만, 전하고자 하는 뜻은 한 마디로 이거였다.
‘너 같은 촌뜨기가 적응하기엔 수도 사교계는 너무 세련됐지.’
딱히 반발심이 일진 않았다. 이곳 귀족 문화에 쓸데없는 예법이 많다는 건 백번 공감하는 바였으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 중이랍니다.”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아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을 생각이 뭔지는 뻔했다. ‘이 촌뜨기, 비꼬는 것도 못 알아들었나?’ 뭐, 이런 거겠지.
나는 계속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미소와 함께 아덴을 올려다보았다. 음료까지 마시고 나른하던 차에, 발톱 세운 살쾡이의 등장은 솔직히 귀찮지만은 않았다.
다시 꽃처럼 상냥한 미소를 장착한 아덴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런 예법들이야 배워 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저희도 도움을 드릴 수 있죠. 안 그래요, 비욘틴 공작 부인?”
비욘틴 공작 부인이라.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에 나는 머릿속을 뒤져 보았다.
‘아, 그 황제파.’
대성당에 도착한 초반, 제국 정세를 배울 때 비욘틴 공작가에 대해서도 외운 기억이 났다.
비욘틴 공작 가문은 꽤 잘나가는 세도가로, 친황제파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원작에서 딱히 비중 있는 가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제국에서 존재감이 적은 가문도 아니었다.
‘새로 사귄 친구가 꽤 잘나가는구나?’
어쩐지. 콧대가 전보다 높아진 것 같더라니.
비욘틴 공작 부인이라 불린 사람은 마치 튤립처럼 우아하게 생긴 레이디였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은 매일 관리받는 태가 났고, 녹순 같은 초록색 눈동자와 햇빛 한 번 안 본 듯한 하얀 피부는 청초함 그 자체였다.
내가 자신을 쳐다보자 비욘틴 공작 부인이 살포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 님께서 원하신다면, 물론 도와드릴 수 있지요.”
제국 정세 시간에 배우기로, 황제의 회의실을 안방처럼 들락날락하는 비욘틴 공작과 달리 그 부인은 아주 얌전하고 조용한 성격이라고 했다.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실제로 보니 난처해하는 눈빛에서 순수함이 느껴졌다. 그 순수함은 코델리아와 약간 비슷한 궤를 띠고 있었다.
방법이야 모르겠지만 아덴에게는 이런 종류의 착한 사람들 마음을 잘 휘어잡는 요령이 있는 모양이었다.
“감히 조언을 드리자면, 아이린 님.”
아덴이 또 예의 그 꽃 같은 미소를 장착한 채 말을 걸었다.
“하루빨리 황후 폐하를 찾아뵙는 게 좋을 거예요. 그분은 성녀로서도 아이린 님의 선배이시고, 사교계에서도 까마득한 선배이신데…… 아직 먼저 찾아가 인사드린 적은 한 번도 없으시죠?”
아덴이 걱정된다는 투로 말하자, 비욘틴 공작 부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난감한 빛을 띠었다.
그녀가 만류하듯 끼어들었다.
“새로 임명된 성녀이신 만큼, 많이 바쁘실 테니까요. 황후 폐하께서도 괘념치 않으실 거예요.”
“그분이야 마음씨가 하해와 같으시니 물론 괘념치 않으시겠지만, 그렇다고 아랫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덮어 둬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황후를 언급할 때마다 아덴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비욘틴 공작 부인과 친해지며 황후의 세력과도 꽤 친분을 쌓은 모양이었다.
대놓고 나를 아랫사람이라 칭하며 훈계조로 말하는 아덴은 선을 넘을락 말락 넘나들고 있었다. 비욘틴 공작 부인의 한껏 난처해진 얼굴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역시 독 오른 살쾡이의 속 보이는 발톱질엔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덴 님 말씀이 맞네요. 황후 폐하라…… 조만간 인사를 드려야겠죠.”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워낙 정신 팔려 있는 일이 많아 여유를 내기 힘들지만, 황후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는 했다.
로렐라이 블랑시아 레하트. 레하트 제국의 지고한 황후이자, 성녀이며, 최근 십 분 안에 입은 상처를 무위로 되돌릴 수 있는 놀라운 권능의 소유자.
그럼에도 로렐라이는 원작에서 별다른 비중이 주어지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 때문에 나는 황후 로렐라이가 황제의 편인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인물인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아덴 님 말씀대로 제가 수도 사교계에 아는 분이 그리 많지가 않아서요. 사교계의 선배이신 아덴 님이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나는 방긋 웃으며 아덴에게 말했다.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는지 아덴의 입술이 순간 멍하니 벌어졌다.
자신을 코델리아에게 버림받게 만든 날 도와주기는 죽기보다 싫겠지. 하지만 조금 전 제 입으로 나를 돕겠다 한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반쯤 영혼이 나간 얼굴로 아덴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이죠. 하하.”
“그럼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황후 폐하의 무도회라고 해서 크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이린 님이라면 그곳에서도 금방 적응하실 테니까요.”
비욘틴 공작 부인이 반색하며 나섰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원해 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다음에 황후 폐하께서 주최하시는 모임엔 꼭 참여해야겠어요. 여건만 된다면요.”
“저어, 아이린 님. 그럼 혹시 이안 님도 참석하실까요……?”
그동안 아덴 무리에 섞여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가씨가 수줍게 물었다. 나는 눈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아마 그러시지 않을까요? 제가 그런 자리에 혼자 가는 건 두고 못 보시거든요.”
이건 반쯤은 진담이었다.
비록 이유가 질투 때문이 아닐 뿐, 지하 무도회 사건이 고작 얼마 전이니 또 무도회에 참석한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추궁해 올 게 뻔하다.
그런 진실도 모르고 내 대답을 들은 아가씨들이 흥분해선 저들끼리 소곤거렸다.
부인이 코앞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들뜸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이 세계에서 이안은 연예인 비슷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그래요. 실체를 모를 때가 낫지.’
그제 밤, 날 심문하던 무시무시한 눈빛을 떠올린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들뜬 아가씨들 덕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그때 잠시 조용하던 아덴이 화사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런 마음이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마침 제게 아이린 님을 도와드릴 방법이 있어요.”
“정말인가요?”
저 여우가 정말 날 도우려 하지는 않을 텐데?
의구심을 삼키며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덴을 돌아보았다.
“네. 황후 폐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비장의 무기이지요. 그분은 물론 존귀하신 황후 폐하이시지만, 성녀로서의 정체성도 아주 확고하신 분이거든요.”
음.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드는데.
아덴이 꽃 같은 얼굴로 반짝반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린 님께서는 혹 이런 전통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보다 대성당에 위계질서가 강하던 옛날, 새로이 임명된 성녀는 최고참 성녀에게 ‘엘릭서’를 선물하는 것이 전통이었다는군요.”
엘릭서라면 신관들이 환자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성력을 채취해 만들어 내는 영약이었다.
그걸 나보고 황후에게 선물하라는 이야기는, 즉.
“제 성력을 뽑아 황후 폐하께 선물 드리라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나는 웃는 낯 그대로 아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덴의 의도는 뻔했다. 황후에게 바칠 만한 성력이라면 상당수를 채취해야 할 테니, 회복될 동안 꽤나 고역이 뒤따를 터였다. 그걸 노린 얕은수겠지.
하지만 내겐 치명적인 수였다.
‘나에겐 성력이 없는걸.’
성의 표시고 뭐고, 내가 정말 황후를 너무나 존경했더라도 바칠 수 있는 성력이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잘 돌려서 거절해 보자. 꾸며 낼 말을 떠올리느라 머리를 굴리던 때였다.
“그쪽 영식께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난데없이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 한 방향을 돌아보았다.
“앗.”
“어머나.”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레이디들이 깜짝 놀라 소곤거렸다.
놀란 건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레이 모나한, 아니.
레이 모나한의 탈을 쓴 마탑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