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61)

67화

* * *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진이 쪽 빠진 나는 흐물거리며 침대에 엎어졌다.

성기사단장이 직접 행한 심문은 고역 그 자체였다.

‘징글징글한 인간!’

대부분의 진실에 거짓을 한 스푼 섞은, 나름 잘 준비된 변명을 들이밀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안은 잘 벼려진 송곳처럼 날카로운 질문으로 내 약점을 콕콕 찔러 댔다.

그래도 여차저차 마무리가 되긴 했다. 내가 대성당 지하 감옥이 아닌 침실에 멀쩡히 누워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인큐버스의 진명이 암흑 경매에 출품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니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참석한 것뿐이다. 그런 진정성 어린 호소에 이안은 몹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무슨 이유에서든 단독 행동은 금물입니다.’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이안이 말했다.

‘그대는 내 계약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내 보호를 받아야 하는 성녀입니다. 본분을 잊지 마십시오.’

저승사자처럼 엄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빨리 풀려났다.

몇 시간 내리 붙잡혀 있을 것도 각오했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중간중간 몸은 괜찮냐는 둥 답지 않게 안부를 묻기도 했었다. 솔직히 훨씬 더 무서운 심문을 각오했었는데, 어쩌면 그동안 이안에게도 그나마 아는 사람이라고 약간은 봐주는 정도의 아량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당분간 나에 대한 이안의 감시가 심해질 거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카쿨타 진액을 못 얻었으니까…… 망할.’

나는 머릿속으로 마탑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비록 암흑 경매 자체가 파투 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자리까지 간 내 성의를 봐서라도 약속은 지켜 주지 않을까?

“아이린 님. 오늘도 서신이 잔뜩 왔어요!”

그때 아네트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신?

마침 마탑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내 귀가 쫑긋 움직였다.

“한번 볼게요.”

“네, 지금 전부 가져다드릴게요!”

잠시 후 아네트가 은쟁반 위에 수북이 담긴 편지 더미를 가져다주었다.

하나하나 발신자를 확인하며 카드들을 뒤지던 나는, 곧 찾고 있던 이름을 발견했다.

‘멜로디 히아신스. 역시!’

일이 그런 식으로 찝찝하게 마무리되었는데 리젤로가 연락을 안 해 올 리가 없었다.

서둘러 카드를 뜯어 보자, 상투적인 안부 인사 뒤에 익숙한 문구가 보였다.

「아, 참. 멜로디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아시죠?」

이전에도 똑같은 문구가 적힌 카드를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아네트를 돌아보았다.

“아네트 양, 너무 피곤해서 이만 자야겠어요.”

“아, 그럼요. 오늘 많은 일이 있으셨으니 얼마나 피곤하시겠어요! 바로 취침 준비해 드릴게요.”

‘많은 일’을 언급하며 아네트의 볼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또…… 또 이상한 생각 한다, 저 애.

하필 저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에게 아까 마차에서의 일을 들켰으니, 전부 내 잘못이었다.

머지않아 침실에는 나 혼자만이 남았다.

다시금 카드를 들여다보자, 역시 문구가 꼬물거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오늘 일은 아쉬웠습니다. 그대의 부군께서 설마하니 깽판을 놓으실 줄은 몰랐네요. 유감.」

정말 유감스러운 듯 필체가 평소보다 뾰족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원하는 것은 보내 드리죠. 사실 저한텐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요.」

난데없는 잘난 척이 미묘했지만, 그럼에도 반가운 내용이기는 했다. 이렇게 순순히 준다고 할 줄은 몰랐으니까.

파투 난 걸 핑계로 또 다른 걸 요구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마탑주 정도 되는 자리에 오르려면 배포가 커야 하나 보다.

‘조만간 만나러 가겠습니다.’

됐다……!

깊은 안도감이 나를 감쌌다.

카쿨타 진액만 얻으면 나인이 건 시간제한 저주를 해주하는 건 따 놓은 당상이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나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만간 만나러 오겠다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약속 장소도, 시간도 정해지지 않았다. 조금 찝찝한 건 사실이었지만 상대는 마탑주였다. 고객을 상대하는 일에서만큼은 진심인 사람이니 제 말은 지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너른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오늘도 침대의 주인은 나뿐이었다. 이안은 오늘 있었던 사건의 마무리를 위해 내 심문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대성당을 나섰다. 오늘 안엔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이게 신방인지, 자취방인지…….’

결혼한 지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이안과 함께 이 방에서 잠이 든 건 손에 꼽는다.

누누이 말하지만, 물론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이안이 있었다면 절대 이렇게 편히 침대에서 뒹굴거리진 못했겠지.

‘그런데 인큐버스의 진명이 담긴 종이는 정말 출품됐던 걸까?’

문득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비록 리젤로의 의뢰를 받고 참석한 자리이기는 하지만, 나 역시 그 종이의 출품 여부는 몹시 궁금했었다.

어쩌면 그것 자체가 이안을 끌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이상했다. 하필 많고 많은 대악마 중에서도 ‘인큐버스’를 콕 집었다는 점이.

리칼리온에 인큐버스가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아는 건 그곳에 출정한 성기사들뿐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조금 쌀쌀한 기분이 들었다.

‘창문이 열려 있나?’

꼼꼼한 아네트가 그런 실수를 했을 것 같진 않은데.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정말 창문이 열려 있었는지, 테라스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쉿.”

“?!”

웬 검은 연기가 내 입을 뒤덮듯 달라붙었다.

고작 연기일 뿐인데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테라스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들으십시오.”

검은 그림자가 말했다.

일전에 한 번, 저것과 같은 그림자를 본 적 있다. 그 그림자는 나인의 하수인이었다.

나인이 침실까지 숨어들었다는 사실에 경악한 내 몸이 차게 굳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그림자가 속삭였다.

“그 연기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일 뿐 당신을 해칠 순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저로서도 대성당에는 침투하는 것이 고작일 뿐, 당신을 공격하기까지 할 순 없습니다.”

뭐…… 지?

위화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그림자는 강압적이기 그지없었던 첫 번째 그림자나, 에드워드 비첸과는 달리 묘하게 정중했다.

“윗선에서 임무의 진척 상황에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

에드워드에게서 펜던트를 받아 든 이후부터, 단 한 번도 이안 근처에 그것을 놔둬 본 적이 없는 나는 다시금 굳었다.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겁니까? 그래야 할 겁니다. 윗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내 착각일까?

그림자의 목소리나 말의 내용은 사무적이고 딱딱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쩐지 다른 나인 길드원들처럼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크게 공포스럽지 않았다.

“연기는 이제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내 입을 가로막고 있던 검은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자유로워진 입술을 열었다.

“……네.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어요.”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나인 측에서 내가 펜던트를 사용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내 새빨간 거짓말에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이번 달 안에는 사술의 밑 작업이 완성될 겁니다.”

이번 달.

그 말에 내 몸이 또 굳었다.

남은 기간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짧았다.

“마지막 남은 단계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도 할 수 있죠.”

그렇게 말하는 그림자의 목소리에, 순간 미묘하게 곤란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 때문에 나는 직감적으로 그림자가 다음에 할 말이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걸 받으십시오.”

그림자가 꿀렁거리며 배 부근에서 무언가를 뱉어 내더니, 그걸 내게 건넸다.

탐탁잖게 받아 든 나는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크리스털 귀걸이?’

물방울 모양 크리스털이 달린 귀걸이는 예쁘긴 했지만, 보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한 번이면 됩니다.”

그림자가 입을 열어 나직하게 속삭였다.

“단 한 번, 그 크리스털 위에 목표물의 피를 묻히십시오.”

목표물.

누굴 의미하는 건지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안의 피를, 여기에…….’

“그 크리스털은 우리 측 흑마법사와 공명하고 있어, 피가 묻으면 소식을 따로 전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저 피만 묻히면 됩니다.”

“…….”

상황이 안 좋았다.

펜던트를 받았을 때보다도 더.

이번 임무는 펜던트처럼 수행 중인 척 꾸며 낼 수도 없었다.

“그자의 피를 묻히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라는 것은 압니다.”

내가 굳어 있는 이유를 다르게 해석했는지 그림자가 말을 이었다.

“단 한 방울이면 됩니다. 이것까지만 수행하면, 윗선에서도 그 이상을 당신에게 요구하진 않을 겁니다.”

“…….”

“……그런다고 자유가 될 순 없겠지만.”

무거운 목소리로 그림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크리스털 귀걸이를 꼭 쥐었다.

머릿속이 터지도록 복잡했지만, 그림자에게 그것을 들킬 수는 없었다.

침착함을 가장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기한은 언제까지인가요?”

“다음 보름달이 떠오를 때까지.”

나는 고개 들어 하늘에 걸린 달을 확인했다.

며칠 전에 꽉 차올랐던 달은, 지금은 조금 가느스름해져 있는 상태였다. 다음 보름달까지는 한 달이 조금 안 남았으리라.

고작해야, 한 달.

“알겠습니다.”

동요를 감추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다로운 임무지만 그때까진 완수하겠어요.”

“이번 일이 끝나면 윗선에서도 당신을 신임하게 될 겁니다.”

나는 차게 웃었다.

나를 겁박하던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런 이들의 신임 따위는 얼마를 가져다줘도 사양이었다.

“용건은 그것뿐인가요?”

“예.”

간결히 대답한 그림자가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지기 조금 전, 그림자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어쩌면 저 그림자가 원래 76번과 아는 사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주먹 안에 들어 있는 크리스털 귀걸이가 손바닥을 콕콕 찔렀다.

제 존재감을 각인시키듯,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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