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알겠습니다, 아이린 님. 안내하겠습니다.”
결심한 듯 조안 경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단주가 소환한 것은 몽마뿐만이 아니었는지, 그새 어린아이 몸집만 한 악마들이 이곳저곳을 휘젓고 있었다.
“히힉, 놀자. 놀자!”
“우리랑 같이 놀아!”
알록달록한 모자와 복장을 갖춘 악마들은 마치 광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 손엔 나팔을 들고 쉴 새 없이 불어 대는 것 역시 영락없는 광대였다.
얼핏 보면 어린아이가 광대 코스튬을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았다.
귀밑까지 길게 찢어진 입과 흰자위까지 온통 시커먼 눈은 저것들이 마물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것들 역시 몽마의 일종입니다. 닿는 순간 기생해 생기를 빨아먹으려 들 테니 조심하십시오.”
조안의 경고대로,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광대에게 당한 듯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몹시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얼굴이었다.
“저렇게 된 이들은, 빠른 시간 내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꿈을 통해 영원히 마계로 빨려 가 버릴 겁니다.”
어린아이 같은 몸집과는 다르게 무시무시한 놈들이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이안을 찾았다.
전장 한가운데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그를 찾는 건 쉬운 일이었다. 나이트메어는 곳곳에서 보라색 피를 줄줄 흘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안!”
이안의 이름을 외쳤지만, 내 목소리는 나에게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뿌! 뿌!
광대 모양 악마들이 각자 쥐고 있던 나팔을 냅다 불기 시작한 것이다.
뿌! 뿌뿌!
“으윽…….”
지독한 나팔 소리에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광대들은 작고 기괴한 치어리더들처럼 저들끼리 탑을 쌓아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 저 너머에 있는 이안이 보이지 않았다.
“윽, 이것들이…….”
“아이린 님! 귀를 막으십시오.”
조안 경의 외침에 나는 순순히 내 귀를 틀어막았다. 나팔 소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기괴하리만큼 섬뜩했다. 분명 사악한 기운이 섞여 있으리라.
조안 경이 광대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광대가 달려와 빈자리를 메웠다. 점점 더 광대들의 수가 늘어났다. 수적 우위를 확실히 점한 광대들이 신이 난 듯 히죽거렸다.
“나가! 나가!”
“우리가 너희보다 많아. 너희보다 세.”
“꺼져! 꺼지라구!”
광대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댔다.
조안 경의 검에 맞으면서도 광대들은 물러날 줄을 몰랐다. 그저 더 시끄럽게 조잘거릴 뿐이었다.
혹시, 우리가 이안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도록 명령받은 건가? 그런 의심이 뇌리를 스쳤다.
“꺼져! 꺼져!”
“꺼져 버려!”
광대들의 째지는 외침과 나팔 소리에 귀를 막았는데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나도 이런데 귀도 막지 못한 채 싸우고 있는 조안 경은 어떨까.
조안 경이 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사태는 쉽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 건지 광대들은 나가떨어지는 수보다 합세하는 수가 더 많았다.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이런 녀석들에게 발이 묶여 있을 때가 아닌데.
“꺼지라구우! 꺼져, 꺼져!”
밉살맞은 어린아이가 목쉬도록 징징대는 목소리. 더는 듣기 힘들었던 나는 깨물고 있던 입술을 풀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
“너희들이나 꺼져 버려!”
질끈 눈 감은 채 외치자,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이 일순 고요해졌다.
휘청이는 몸의 중심을 잡으며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나팔 소리에 너무 노출돼서인지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더는 들리지 않아서 다행…… 응?’
그제야 완전히 눈을 뜬 나는 순간 멍하니 굳었다.
조안 경이 아무리 베어 넘겨도 꿋꿋이 몸으로 탑을 쌓던 놈들이, 죄다 뒤로 벌렁 넘어져 있었다.
“뭐, 뭐야.”
당황한 나는 입술을 더듬었다. 태풍이라도 쓸고 지나간 듯 바닥에 나동그라진 광대 녀석들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조안 경이 해치운 건가 싶어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조안 경은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처럼 혼란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그녀 역시 정확한 사태 파악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징그러운 골칫덩이들은 사라졌다.
“아이린!”
그때, 내 이름을 외치는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든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늘 달빛을 받은 듯 은은히 빛나던 이안이 밤처럼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변장 때문에 검게 물들인 머리와 검은 가면 때문만이 아니었다.
바다처럼 새파랗던 그의 눈이 무저갱보다 어두운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빛조차 반사되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저건, 사술의…….’
틀림없었다. 저 기이하리만큼 검은 눈동자는 사술의 흔적이었다.
책 속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묘사를 현실로 마주하는 순간, 얼음을 들이부은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 하는 겁니까, 여기서!”
이안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언제 처리한 건지 뒤에는 나이트메어의 사체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도대체 왜,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젠장. 다쳤습니까? 어딜 다친 겁니까.”
나는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다가와 내게 화내는 이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무서웠다. 내게 화를 내서가 아니라, 흑마법에 물들어 버렸음을 증명하는 듯한 저 모습 자체가 무서웠다.
‘아니야. 아직, 돌이킬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떨려 오는 손끝을 멈출 수 없었다.
“여긴 위험합니다. 피해 계시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아이린? 왜 아무 말이 없습니까?”
“…….”
“아이린. 아이린!”
굳어 버린 내 어깨를 쥐며 이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한결 가까워진 이안과의 거리 때문에 그의 흑안이 더 잘 보였다. 그 심연 같은 어두움에 압도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초간 더 나를 부르던 이안이 거칠게 옆을 돌아보았다.
“젠장. 조안!”
“예, 단장님.”
“성녀님께 무슨 일이 있었나? 상태가 왜 이렇지?”
“그것이.”
조안 경의 목소리 끝이 혼란을 삼키듯 가볍게 떨렸다. 이안이 으르렁거렸다.
“오늘 날 몇 번이나 실망시킬 셈이지?”
“죄송합니다. 무슨 벌이든 받겠습니다.”
조안 경을 힐난하는 이안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고작 날 안 지켰다며 그녀를 탓할 때가 아닌데.
난 기껏해야 광대 녀석들의 시끄러운 나팔 소리에 귀가 좀 아팠던 게 전부였다. 자기 영혼이 잡아먹히기 직전이란 것도 모르고 조안 경이나 혼내는 이안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로 보였다.
‘정신 차리자.’
나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꽉 주먹 쥐었다.
이안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해 보였다. 침착히 생각해 보니 그건 개중 다행인 일이었다.
자신이 남의 꼭두각시가 되는 사술에 걸렸음을 알게 되면, 어디까지가 진짜 자신인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다면 이안은 사술이 파고들기에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 될 터였다.
짧게 심호흡한 나는 이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안 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어 주세요. ……이 건물 전체에 걸쳐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마법진?”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어 말했다.
“잘린 염소 머리와 돼지머리를 발견했어요. 입엔 검은 분필이 물려 있었고요. 무슨 의미인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이안의 검은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한창 전투 중인 제 휘하의 기사들을 향했다.
“……건물 전체에 설치되어 있다고 하셨습니까?”
“네. 틀림없이 봤어요.”
“제기랄.”
낮게 욕설을 읊조린 이안이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규모가 거대한 마법진이라면, 결코 가벼운 수준의 음모는 아닐 겁니다.”
“그렇겠죠.”
“건물 전체라…… 어쩌면.”
이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곳에 모인 성기사들을 모두 제물로 바치는 종류의 흑마법일지도 모르겠군요.”
“…….”
나는 이안의 착각을 정정시켜 주는 대신 진지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저래 뵈어도 이안은 부하를 아끼니, 저런 착각을 한다면 곧장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안이 쯧 혀를 찼다.
“함정이었던 건가.”
“돌이킬 수 있어요. 지금이라면.”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이 안 어딘가에 숨어들어 있을 흑마법사를 찾아내고, 이 장소를 벗어나면 돼요. 돌이킬 수 있으니 일단 침착하세요.”
가장 중요한 건 이안의 심신 안정이었다. 사술에 이미 걸려든 상황에서 동요는 금물이었다.
나는 침착하라 말하며 이안의 팔을 꼭 쥐었다.
타인의 체온은 안정에 도움이 된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므로, 아무리 이안 같은 냉혈한이라 해도 효과가 있을 터였다.
이안이 흠칫 놀라며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뭡니까?”
“이안 님은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어요. 전 이안 님을 믿어요.”
“……흑마법에 당했습니까?”
가장 중요한 건 이안의 안정이기에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안심시켜 주었는데, 이안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제 팔에 얹힌 내 손은 떼지 않기에 나는 그의 팔을 더 꼭 쥐었다.
“일단 흑마법사부터 찾아요, 저희. 이 안에 있을 테니까!”
대부분의 마법진은 마법사가 직접 자리하지 않아도 설치만 해 놓으면 작동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를 노릴 정도의 흑마법이라면 그 정도 설치로 그칠 리 없었다. 마법진에 담기는 마력의 양만으로는 이안을 함락시키긴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분명, 이 자리에 마력을 더 보탤 시전자도 함께 있을 거다.
‘어디 있을까.’
나는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