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저 누가 들어도 위험천만하고 수상쩍은 대화를 듣고 웃음이 나오나?
‘하여간 정상은 아니야.’
“조안.”
“예, 단장님.”
“성녀님을 대성당까지 모셔라. 절대 지체하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이번엔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아이린 님, 모시겠습니다.”
조안 경의 말에 나는 잠시간 망설였지만, 곧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암흑 경매는 물 건너갔다. 리젤로도 어디 숨은 건지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으니, 오늘 거래는 튼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리를 뜨기 전 나는 예의상 이안을 돌아보았다.
“잘 해결하고 오세요. 다치지 마시고요.”
“아직도 안 갔습니까?”
저, 저 말하는 본새 좀 봐.
예의상이나마 걱정해 준 것을 크게 후회하며 나는 홱 등을 돌렸다.
사실 염려는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리칼리온에서 저 사람이 인큐버스를 어떻게 고꾸라뜨렸는지 직접 봤으니까.
‘괜찮을 거야.’
있어 봐야 짐만 되는 나는 빠르게 퇴장해 주는 게 맞다.
나는 조안 경을 따라 회오리 모양으로 생긴 계단을 올랐다. 다 오른 뒤 아래를 내려다보자, 지하 무도회장이 한눈에 보였다.
‘저건.’
아래로 보이는 광경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검을 뽑아 들고 있는 이안이었다. 그 맞은편을, 웬 거대한 괴물이 막아서고 있었다.
‘그것’이라는 건, 역시 마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단주라는 자는 사교도들과 손을 잡았던 걸까?
‘그나저나, 저건. 말……?’
이안을 향해 울부짖는 괴물은 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크기는 진짜 말보다 몇 배 정도 커 보였지만.
숨만 훅 한 번 내쉬어도 촛불 끄듯이 인간을 날릴 것 같을 정도로 거대한 말이었다.
“아이린 님. 가셔야 합니다.”
“아. 죄송…… 죄송해요.”
더듬거리며 사과하면서도 나는 몇 초간 더 지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채만 한 몸집의 말을 상대하면서도 이안은 주저함이 없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그의 검이 한 치 망설임 없이 괴물에게로 쇄도하는 것이 보였다.
‘괜찮을 거야.’
스스로를 타이르며 나는 다시 바삐 걸음을 놀렸다.
“저건 무슨 괴물이죠?”
“악몽을 몰고 다니는 마물 ‘나이트메어’로, 몽마의 일종입니다.”
몽마.
그 이름에 불쾌한 기시감이 들었다. 리칼리온에서 해치운 인큐버스 역시 몽마 중 하나였다. 단순한 우연일까?
복잡한 기분으로 도착한 지상은, 이미 앞다투어 도망치고 있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비켜, 비켜!”
“밀치지 좀 맙시다!”
출구에서 다들 먼저 탈출하기 위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방금까지 아름다운 드레스와 정장을 빼입은 채 은밀한 눈웃음을 나누던 남녀들이, 이제는 서로를 밀치고 저주해 댔다.
“줄을 서! 줄을 서라고요! 이런 식이면 더 늦어질 뿐입니다!”
“그쪽이나 새치기하지 말지 그래!”
생존 본능 앞에서 모두가 추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난데없는 폭발에 혼비백산된 사람들에게선 더 이상 귀족적인 우아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안 경이 굳은 얼굴로 그 광경을 노려보더니, 곧 결단을 내린 듯 나를 돌아보았다.
“출구는 안 되겠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네? 그쪽은 막다른 길인데…….”
“벽을 부수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나는 경악해선 조안 경과 막다른 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걸 부순다고?
“자, 잠시만요. 안 그래도 폭발로 건물이 약해졌을 텐데, 벽을 부숴 버렸다간 전부 무너져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랬다간 지하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내 다급한 말에 조안 경이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건물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할 겁니다. 검기를 이용해서 자르면 됩니다.”
“벽을 자른다고요?”
나는 한층 더 경악한 얼굴로 조안 경을 바라보았다. 그 상사에 그 부하 아니랄까 봐 참 당혹스러운 해법이었다.
루시안이 조안 경을 두고 장차 소드 마스터에 이를지도 모르는 인재라고 했던 건 허튼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안 경이 확인하듯 벽을 두드렸다. 곧 그녀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갔다.
“음?”
“왜, 왜 그러세요?”
“이 너머에, 무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조안 경의 신중한 목소리에 나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또 뭐가 있다는 거야.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놀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의 스릴은 사양이었다.
조안 경이 굳은 얼굴로 벽을 노려보더니, 잠시 뒤 오른발을 들어 거침없이 그곳을 걷어찼다.
“어엇!”
걷어찬 곳이 힘없이 풀썩 무너지더니, 그 너머로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가벽이었어.’
나는 크게 뜨인 눈으로 가벽 너머로 숨어 있던 공간을 바라보았다.
가짜 벽까지 세워 숨길 만큼 은밀한 공간이라는 걸 증명하듯, 안은 수상쩍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플라스크에서는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바닥과 천장에 분필로 그은 오망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누가 봐도 이곳은 사악한 마법사의 실험실이었다.
“여긴 대체.”
찌푸린 눈으로 내부를 둘러본 조안 경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이린 님. 다른 출구를 찾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일단은 내 안전이 우선이라는 듯 조안 경은 애써 흑마법의 현장에서 눈을 돌렸다.
“아이린 님.”
내가 멍하니 있자, 조안 경이 나를 채근했다. 새롭게 드러난 이 장소는 수상하고 흥미롭긴 했으나, 지금은 호기심이나 펼칠 때가 아님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순간 멎은 채,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안 경. 잠시만요.”
내 시선 끝에는 기괴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그건 잘린 염소의 머리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온몸이 뻣뻣이 굳었다. 자세히 보자, 염소의 입안에는 검은 분필이 물려 있었다.
‘저건…….’
그 괴이쩍은 광경을 보는 순간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더 자세히 보니, 염소의 입에 물린 분필로부터 이어지는 검은 선들이 죽 바닥에 그어져 있었다.
쿵, 쿵, 쿵.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설마’하는 가능성이 머릿속을 휘젓듯 어지럽혔다.
“……검은 선이 이어진 곳으로 가 봐요.”
“시간이 없습니다. 탈출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제 말대로 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아이린 님, 일단 대성당으로 돌아가시지요. 시키실 일이 있다면 제가 처리할 테니 우선은―”
“조안 경! 시간이 없어요.”
나는 단호히 말하며 눈으론 검은 분필의 흔적을 좇았다.
대리석 무늬에 묻혀 좀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집중해서 보자 거무스름한 분필 자국 중 하나가 저 먼 반대편 벽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쪽 문도 부숴 주세요!”
내 갑작스러운 요구에 조안 경은 몹시 당황한 듯했다. 드물게 그녀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안 님을 위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부디 빨리!”
다급히 재촉하자 조안 경의 눈이 흔들렸다. 곧 그녀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곤 내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예지의 성녀라는 내 위치가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내가 그런 권능을 지녔다고 여겨지지 않았더라면 조안 경은 아무리 애원해도 날 들쳐 업고서라도 대성당으로 이동했겠지.
반대편 벽으로 이동한 조안 경이 똑같이 벽을 걷어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가벽이 무너지고 그 너머의 공간이 드러났다.
다급히 안을 둘러본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죽은 돼지의 머리가 구석에 은밀히 놓여 있었다. 마찬가지로, 입에는 검은 분필을 문 채로.
“염소와 돼지라니.”
조안 경이 혼란스레 중얼거렸다.
“다음은 뱀일 거예요.”
나는 확신을 담고 말했다.
염소, 돼지, 뱀, 전갈과 두꺼비.
레하트 제국에서 사특하게 여겨지는 다섯 짐승은, 흑마법의 재료이기도 했다.
두 짐승의 머리를 발견한 이상, 더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나머지 세 짐승의 머리 역시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가 지하를 내려다보았다.
지하는 성기사단과 마물의 전투로 어지러웠다. 나는 최대한 집중하며 그 광경을 뜯어보았다.
‘보인다.’
대리석 무늬라고 생각했던 검은 분필 자국이 뚜렷이 바닥에 선을 긋고 있었다.
이렇게 멀리서 한눈에 지하를 내려다보자, 선들이 무슨 문양을 그리고 있는지 서서히 보였다.
분필로 그어진 검은 선들은 뒤집어진 육망성을 그리고 있었다.
“……저건. 마법진?”
조안 경 역시 같은 것을 발견했는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혹 사교도가 부린 악마 소환술의 흔적일까요?”
“아니에요. 이건 사교도가 아니라.”
나인의 짓이다.
죽은 짐승의 머리로 만드는 이 육망성의 마법진은, 나인이 즐겨 사용하는 흑마법이었다.
원작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인의 흑마법이 발동하는 에피소드를 몇 번이나 읽은 나이니 헷갈릴 리가 없었다.
이 건물 자체가 나인이 그린 거대한 마법진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뒤집어진 육망성의 정 가운데 지금 이안이 존재했다.
이안은 거대한 몽마, 나이트메어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공간에 잠들어 있을 성검조차 꺼내지 않았는데도 이미 승자는 정해진 듯했다.
그러나 내 심장은 안심은커녕 터질 듯 펄떡거렸다.
‘함정.’
그 단어가 머리를 강타했다.
만약 이 모든 게 나인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면?
일부러 이안을 마법진 안으로 유인한 것이었다면?
“조안 경!”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비명처럼 조안 경에게 외쳤다.
“성녀로서 명령하겠습니다. 저를 지금 당장 아래로 데려다주세요.”
“아이린 님!”
“부디 제 말대로 해 주세요. 이안이 위험하니까!”
다급한 외침에 조안 경의 얼굴이 굳었다.
이안은 나인이 아주 오랫동안 노려 온 목표물이었다.
그 하나에게 사술을 걸기 위해 전 길드가 천문학적인 돈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원작의 페이지가 거의 다 넘어갔을 즈음, 그들의 그런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비록 지금 같은 방식을 통해서는 아니었지만.
그 뒤의 결과가 어땠는지를 떠올린 나는 온몸이 싸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안 돼.’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인 시점이다. 사술에 걸린 이안을 막을 주인공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았다. 여주인공은 나타나기조차 전이었고, 엘리엇은 아직 세례도 받지 못했다.
‘아직은 안 된단 말이야.’
그리고 나 역시, 이안을 구할 준비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원작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뒤틀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변명이나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당장 어떻게든 이안을 구출하지 않으면, 마법진에 깃든 사술이 이안의 영혼을 앗아가 버릴 테니까.
‘몇 번이고 읽었던 원작 내용처럼.’
나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 꼴만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나중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