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61)

62화

“이런 상황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됩니까?”

남자, 아니.

이안이 속삭이듯 물었다.

물음을 빙자한 추궁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생각하자, 생각. 생각해.’

아직 모든 게 들통난 건 아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마탑주와의 거래 때문이라는 것도, 거래한 이유가 시간제한 저주를 풀 수 있는 약재 때문이라는 것도 이안은 아직 몰랐다.

아직은, 헤쳐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분명 그럴 터였다.

짧은 시간 스스로를 타이르며, 나는 고개 들어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가운 벽안이 가면 너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못 알아봤을까.’

이런 사람을, 어떻게.

십 리 밖에서라도 단번에 알아봤어야지.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 팔자 좋게 관람이나 하던 십 분 전의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이유가 있어요.”

나는 일단 그 말부터 던졌다.

변명은 입을 놀리는 동안 떠올려야 할 터였다.

“이유라.”

이안이 내가 내뱉은 단어를 읊조렸다.

느릿느릿한 어조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 분노는커녕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그런가? 조안. 자네가 말해 보지. 내 부인께서 이곳에 행차하신 연유가 뭐지?”

나는 깜짝 놀라 조안 경을 돌아보았다.

조안 경이 묵묵히 고개 숙였다.

“어떻게 죄를 물으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알고 있었어요?!”

이제 보니 조안 경은 이안이 등장한 순간부터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서 바보는 나뿐이었던 것이다.

“그야 달게 받아야겠지. 명령 불복종이 어떤 중죄인지 구태여 자네에게 일깨워 줄 필요는 없겠지.”

서늘한 빈정거림에 나는 홱 이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라면 조안 경까지 위험해질 터였다. 우물거릴 때가 아니었다.

“설마 정말 제가 외도 중이었다고 여기시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치면 여기서 절 만난 당신 역시 외도 중이었던 게 되니까요.”

듣는 귀들 때문에 이안을 이름 대신 ‘당신’이라 칭하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내가 외도 중이었다?”

“당신 논리대로라면 그렇지요. 이곳에 자리하고 있던 건 저나 당신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가면 너머의 벽안이 가늘게 좁아졌다.

“좋습니다. 부인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어 보죠.”

“당연히 믿어 주셔야 해요. 제가 계약을 잊고 고작 바람이나 피우러 돌아다닐 리가 없잖아요. 이곳엔 그저 용무가 있었을 뿐이에요.”

이안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속삭이자, 그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용무라. 어떤 비밀스러운 용무기에 이런 곳까지 행차하신 건지 의문스럽지만…… 믿어는 보겠습니다.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여기 자리해 있으니.”

이안의 입에서 ‘믿어는 보겠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단지 이 순간만을 넘겼을 뿐, 분명 이목이 없는 곳으로 옮기면 용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캐물을 터였다.

그러나 일단은 단 몇 분이라도 버는 것이 중요했다.

‘곧 리젤로도 돌아올 텐데…… 눈치가 있다면 지금 아는 체하지는 않겠지. 그쪽은 일단 신경 끄자.’

일단은 눈앞의 이안이라는 급한 불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사람들이 대놓고 우릴 구경하고 있는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대화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그 점이 오히려 더 저들의 흥미를 돋운 듯했다.

춤에 집중하는 사람이 이제 아무도 없는데도, 악단은 의무대로 새로운 왈츠곡을 연주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몇몇 커플들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 일단은.”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 내 허리 위에 팔을 둘렀다.

느닷없이 시작된 왈츠의 첫 동작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피차 ‘용무’부터 먼저 끝내 볼까요.”

“그게 무슨…….”

“내 용무는 무도회가 끝난 뒤에 있습니다. 일단은 지금 이 시간을 주변 시선을 더 끌지 않고 잘 넘길 필요가 있단 뜻이죠.”

시선을 더 끌지 않고 넘기다니.

그건 나와 마주치기 전에도 이미 그른 것 같던데요.

그렇게 말할 순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이안의 목에 팔을 얹었다.

혹독한 연습 덕에 이안과의 춤만은 익숙했다.

우리가 왈츠를 추기 시작하자, 더 이상의 자극적인 구경거리는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주변 사람들 역시 다시 자신들의 파트너에게 집중했다.

왈츠의 기본은 상대와 시선을 맞추는 것. 따라서 나는 이안과 억지로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직 화가 난 것 같은데.’

가면 너머의 벽안은 평소보다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해명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니, 화가 가라앉지 않은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때 이안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나를 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가자 귓가에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무 남자에게 함부로 빚졌다는 소릴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아.’

붉은 머리 변태로부터 이안이 날 구해 줬을 때, 빚을 졌다며 감사 인사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이안인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은 안 했지. 이 이상 이 남자에게 빚을 늘리는 건 절대 사양이니까!

“네. 저도 후회하고 있어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수표를 써 주십시오. 후에 헛소리하지 못하도록.”

이안의 말은 마치 진지한 조언처럼 들렸다.

나는 당황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달콤하게 춤추면서도 해명이나 하라며 귓가에 으르렁거릴 줄 알았는데, 이게 웬 뜬금없는 소리지.

그래도 일단 추궁이 아니면 무슨 말이든 반가웠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어요. 명심할게요.”

“그런데 부인의 ‘용건’은 언제 시작됩니까?”

이제 와서 발뺌하는 건 무의미하겠지. 어차피 이곳에 있는 걸 들킨 이상 완전한 거짓말은 불가능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나는 솔직히 말했다.

“암흑 경매예요.”

“안타깝게 됐군요.”

이안의 입매가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용건은 실행이 불가능하게 됐는데.”

“왜. 왜죠?”

당황한 내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이안이 조금 더 고개를 숙이더니 속삭였다.

“그전에 뒤집어질 테니까.”

무엇이?

―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쾅!

굉음이 귓가를 덮쳤다.

단단한 팔이 내 어깨를 감싸는 바람에 나는 간신히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타인의 품에 반쯤 무너진 채로 나는 너무 놀라 헐떡였다.

“이게, 이게 무슨…….”

쾅! 콰광!

연이어 폭음이 들려왔다. 나는 이 사태를 믿을 수 없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려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없었다.

“으아악!”

“뭐가 어떻게 된…… 허억!”

여기저기서 검 뽑아 드는 소리, 그리고 사람이 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공포로 몸이 떨려 왔다. 이안의 품에 안겨 마물 사이를 가로질렀을 때도 무서웠지만, 그때는 그나마 앞이 보였다.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도 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괜찮습니다. 당신은 안전하니까.”

이안이 타이르듯 속삭였다.

우습게도 그 한마디에 정말로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 보호하듯 내 등을 감싸 안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안이었으니까.

그래도 떨리는 목소리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이, 이거. 당신이 저지른 짓이죠.”

“이젠 그냥 당신이라고 부르기로 한 겁니까?”

“상관없잖아요. 이안 님도 툭하면 날 그렇게 부르니까. 아무튼!”

나는 절박히 이안을 돌아보았다.

“전부 날려 버리면 안 돼요. 암흑 경매에 중요한 게 출품된다는 소문을 들었단 말이에요!”

“중요한 것? 갖고 싶은 겁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갖고 싶냐니?

나는 질색하며 부인했다. 누가 대악마의 이름이 적힌 종이 쪼가리 따위를 갖고 싶을까? 악마 소환하길 좋아하는 미친 사교도 집단이 아니고서야.

이안에게 그 물건에 대해 털어놓으려던 때였다.

“누, 누구냐! 누가 감히 이런 짓을!”

“단주님!”

거대한 체구의 남성이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뛰쳐나왔다.

그를 단주님이라 부르며 경비병이 호소했다. 서서히 연기가 잦아드는 덕에 지척에 있는 둘의 모습 정도는 보였다.

“이자들은 미쳤습니다! 우리 회장에 폭탄을 심어 놨어요!”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이!”

단주라 불린 남자가 분개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불법 도박, 불법 경매가 판치는 파티를 펼쳐 놓은 주제에 하늘의 분노를 운운하다니.

연기가 사그라들면서 슬슬 더 멀리 있는 광경까지도 보였다.

갑옷 입은 이들이 경비병들을 무자비하게 패 버리는 모습을 본 나는 경악했다.

칼등으로 후려치고, 발로 걷어차고. 경비병들과 저항하는 인간들이 의문의 갑옷 기사들에게 구타당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 보니 저건 낯선 갑옷이 아니었다.

‘성기사단의 갑주잖아!’

나는 그제야 한 박자 느리게 모든 사태를 파악하곤 입을 떡 벌렸다.

이안은 휘하의 성기사단을 이끌고 지하 무도회를 쓸어버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깨달음과 함께 뒷골이 진하게 당겼다.

‘나는 운도 더럽게 없지……!’

하필이면, 이안이 무려 직접 행차한 장소에 거래를 한답시고 뛰어들었다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짓들을 하는 게냐!”

“단주님, 저건 성기사단의 갑옷입니다! 저자들은 성기사들이에요!”

“뭐, 뭐야?”

성기사단이라는 말에 당황한 듯 단주의 목소리가 삐끗했지만, 곧 그는 패기를 되찾고 빽 외쳤다.

“신의 이름만 빌리면 다 되는 줄 아는 게냐?! 다들 막아라! 맞서 싸워! 조금이라도 몸 사렸다간 네놈들은 모두 해고야!”

“하, 하지만, 단주님! 상대는 극도로 훈련받은 성기사들입니다. 경비병들만으로 막을 수는……!”

단주의 비서로 보이는 자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쩔쩔맸다.

단주가 이를 부득 갈았다.

“쓸모없는 밥버러지들 말고 다른 수단을 쓰면 될 것 아니냐! 그걸 풀어라!”

그것?

곱지 않은 예감에 나는 몸을 굳혔다.

비서 역시 당황한 듯했다.

“다, 단주님. 하지만 그건…….”

“다 날아가게 생겼잖으냐! 당장 풀어라! 그것만 있으면 성기사들도 문제없어! 그분들과 얼마를 들여 계약한 놈인데, 이런 때 안 쓰면 언제 쓰겠다고!”

“하지만…….”

“꾸물거리지 마라! 너부터 그것의 먹이가 되고 싶으냐?”

“히익! 알겠습니다!”

비서가 부리나케 어디론가 달려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필살기 같은 것을 발동하려는 모양인데.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내 등 뒤에 계시는 분께서는 왜 지켜보기만 하고 있는 거지?

“흐음.”

그때 등 뒤에서 흥미로운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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