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 외에도 많은 여자가 제 파트너도 뒤로하고 남자를 흘긋거리기 바빴다.
쌍쌍 커플로 가득 찬 무도회장에서 남자는 특이하게도 혼자였다. 그 때문에 더 눈에 띄기도 했다.
‘눈이 엄청 높은가.’
하기야, 하루에 한 번씩 거울만 봐도 절로 눈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는 하겠다.
남자 주변의 레이디들이 저들끼리 한층 더 바쁘게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나 이겨라.’
그 모습을 멀찍이서 보고 있자니 꽤 흥미로웠다.
마침내, 매혹적인 금발을 높이 틀어 올린 레이디가 남자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될까. 몰입한 나머지 내 부채질도 덩달아 빨라지던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레이디. 또 뵙는군요!”
귀에 익은 듯 익지 않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전, 내게 동행이 있냐고 물었던 그 붉은 머리 청년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예의상 인사한 내가 다시금 구경하던 광경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차였다.
“아직도 혼자시군요? 동행분은 안 오시는 건가요?”
“아,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하하. 부끄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원래 이런 곳에는 혼자 왔다가 둘이 되어 나가는 것이죠.”
……뭐라는 거야?
나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붉은 머리 청년을 바라보았다.
가면 탓에 내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듯, 청년이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어떻습니까, 레이디. 다음 곡은 저와 함께 추시는 건?”
“죄송해요. 동행이 곧 돌아와서요.”
“흐음, 왜 이러실까. 아, 혹시 춤보단 다른 쪽에 더 흥미가 있으십니까? 조용한 곳에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 보는 것도 괜찮죠.”
붉은 머리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돌아보자, 회장 구석진 곳에 거대한 소파들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두운 조명과 그 위를 가린 베일이 한껏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인간이 대체 왜 이러지. 나는 이제 가면 밖으로도 티가 날 만큼 이마를 팍삭 구겼다.
“아뇨. 관심 없어요. 그럼 이만.”
이만큼 예의 차려 거절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걸 보니, 정중할 필요가 없는 자였다.
홱 몸을 돌려 걸어가려는데, 덥석 손목이 잡혔다.
“이것 참, 도도하시네. 아까 튕긴 건 그러려니 했는데, 지하에서까지 이러깁니까? 여기선 즐길 거 다 즐겨도 무죄―”
“감히.”
스릉, 검 뽑는 소리가 들렸다. 조안 경이 품에서 단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조안 경의 밤색 눈에서 일렁이는 노기를 발견한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이거 일 났다.’
이대로라면, 조안 경은 분명 내게 미리 허락받은 대로 ‘어떤 방식으로든’ 저 변태를 제압할 거다.
그렇게 되면 경비대가 우릴 내쫓을 거고, 나는 리젤로가 내건 의뢰를 수행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이봐요!”
나는 조안 경이 손을 쓰기 전 먼저 팩 소리쳤다.
“좋게 말할 때, 그냥 물러가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러나 내 경고는 먹히지 않았다.
검 뽑는 소리에 조안 경을 돌아본 변태가 소스라쳤다.
“아니, 저, 저 여자 지금 검을 뽑은 겁니까? 여긴 무기 소지 금지인데! 지금 당장 경비병을 불러야겠― 읍! 읍!”
불쑥, 새까만 가죽 장갑에 감싸인 손이 나타나 변태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크게 뜨인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손의 주인공은 낯익은 남자였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남자는 방금까지 아리따운 레이디들의 시선 한가운데 있던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상당히 멀리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아니, 그보다 왜 온 거지?
당황한 내가 입술만 더듬거리는데, 남자가 고개 숙여 변태의 귓가에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변태가 히익거리며 몸을 움츠리는 게 보였다.
“뭐, 뭡니까. 당신이 뭔데 그렇게 질 낮은 협박을!”
대체 무슨 협박을 했기에.
남자는 대답 대신 한 손으로 변태의 양 뺨을 틀어쥐었다. 변태의 입이 흉하게 벌어졌다.
강제로 자신을 바라보게 한 남자가 또 무어라 입을 여는 게 보였다.
몇 초 뒤, 변태의 안색이 시꺼멓게 죽었다.
“저, 저는,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옵고.”
갑자기 말투가 굉장히 겸손해진 변태가 다리를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사태가 묘하게 돌아가자 조안 경도 더는 나서지 않았다.
나는 아직 당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변태의 뺨을 내동댕이치듯 놔주자, 풀썩 쓰러진 변태가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도망쳤다. 참으로 꼴사나운 뒷모습이었다.
‘정말 추하다.’
쯧, 혀를 차며 그런 변태의 퇴장을 잠시 구경한 나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나는 입술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감사의 말을 해야 했다. 남자가 없었다면 꽤나 곤란해졌을 터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곤란을 면했어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무릎까지 살포시 굽히며 감사 인사한 나는, 잠시 뒤 고개를 갸웃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시선을 들자, 남자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좌중의 시선을 쓸어 담던 그는, 여전히 온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 탓에 나까지 덩달아 주목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저어…….”
나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빚을 졌어요.”
작게 묵례한 나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렸다.
비록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가면을 쓰고 머리 색도 바꿨지만, 이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딱히 나를 붙잡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하긴, 나 아니어도 어울릴 여자가 이 회장에만 수십 명은 될 테고, 철철 흘러넘치는 부티만 보더라도 사례금을 원할 것 같진 않으니 당연했다.
서둘러 남자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퇴장하려던 때였다.
“아.”
너무 서둘렀을까. 줄곧 쥐고 있던 쥘부채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가벼운 타음을 내며 쥘부채가 바닥 위를 굴렀다.
깃털과 속 빈 나무로 만들어진 쥘부채는 통통 튀더니 남자의 발 앞까지 굴러갔다.
“아. 실례했습니다.”
허리 숙여 부채를 주우려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몸을 굽히기도 전 남자가 먼저 허리를 숙이더니, 기다란 손가락으로 부채를 들어 올렸다.
“감사…… 합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다시금 감사 인사를 했다.
남자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쥔 부채를 흘긋 쳐다보았다.
“부채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좀처럼 부채를 돌려줄 기색이 없기에, 나는 난처함을 숨기며 물었다.
저 부채는 내 장식장을 채운 수많은 부채 중 하나였다.
참고로 나는 부채 같은 건 사 본 적 없다. 내 장식장과 옷장은 결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이안이 가득 채워 놓은 상태였다. 그게 레하트 귀족들의 결혼 문화라고 한다.
뭐, 정확히 말하면 이안이 채웠다기보다는 그냥 부하에게 명령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부채에 잠시간 시선을 주던 남자가, 갑작스레 픽 웃음을 흘렸다.
유쾌하다기보다는 헛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저어. 신사님?”
슬슬 애가 닳은 내가 한 번 더 남자를 불렀다.
그제야 남자가 부채에서 눈을 떼고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어쩐지 피부가 간지러워졌다. 남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성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올려다본 남자는, 가면에 얼굴의 절반이 가려져 있음에도 미남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비단 얼굴뿐 아니라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몸 선까지 완벽했다. 훑듯이 밑으로 내려가려는 내 시선을 간신히 붙들어야 할 정도였다.
말없이 빤히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괜스레 입술이 메말랐다.
‘왜 이러지. 나.’
남자는 무례했다.
내 감사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고, 내 부채를 돌려주지 않고 있으며, 나를 지나치게 오래 쳐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아까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항의해도 될 만큼의 무례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 뱃속을 간지럽히는 감정은 불쾌함이 아닌 당혹감이었다.
지척에 선 남자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를 뿌린 것 같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은은히 코끝을 간지럽히는 체향.
그걸 인식하자 심장이 이상하리만큼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
스스로를 타이르는데도 손끝이 자꾸만 굽어 들었다. 남자는 지나치게 존재감이 컸다. 도대체 왜 이유 없이 내 앞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는 건지 모를 만큼.
그때, 남자가 불쑥 내 앞으로 가까워졌다. 놀라 몸을 물리려던 순간, 훅 다가온 체향과 함께 깨달음이 총알같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향기, 분명 맡아 본 적이 있다.
“대범한데.”
낮은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굳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남자의 입매가 서늘히 호선을 그었다.
“결혼 선물을 지닌 채 외도 중인 아내라.”
지독하도록 낮은 음성이 심장을 긁어내렸다.
망할.
망할.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수백 가지 욕이 입속을 맴돌았다.
‘어떻게, 여기서.’
도대체 어떻게, 하필이면 여기서.
저승사자보다 더 피하고 싶었던 사람과 맞닥뜨려 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