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채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조안 경의 얼굴은 전에 없이 굳어 있어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미안해요, 경. 제가 괜히 경까지 끌어들이는 바람에.”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기쁩니다.”
오늘 지하 무도회에는 조안 경도 함께였다.
어딜 가든 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붙는 조안 경을 떼어 놓을 수가 없어, 고민 끝에 목적지를 털어놓은 것이다.
이안의 귀에는 절대,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그건 도박이었다. 조안 경 같은 신실한 성기사라면, 성기사단장인 이안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조안 경이 내게 바쳤던 ‘피의 맹세’에 가능성을 걸어 보았다.
지하 무도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조안 경은,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한참 말이 없었다.
나중에야 입을 연 조안 경이 처음 한 말은 이러했다.
‘만에 하나 성녀님께 무례하게 접촉하려 하는 자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제압해도 됩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다소 두려운 문장이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조안 경이라는 든든한 호위까지 대동한 채 지하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별일 없으면 좋으련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내가 가장 바라는 건, 암흑 경매에 출품된다는 인큐버스의 진명이 가짜인 경우였다.
정말 거기 진명이 적혀 있다면 일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진단 말이지.
‘헛소문일 확률이 크긴 해.’
그런 불법 경매에는 호기심 많은 손님들을 현혹하기 위해 별별 헛소문으로 부풀려진 물건들이 출품되기 마련이었다.
아무렴, 대악마의 진명이 적힌 이름이 그리 쉽게 나돌아 다닐까.
“그럼 출발할까요, 조안 경.”
나는 조안 경을 대동한 채, 어둑해진 대성당의 복도를 조심스레 걸었다.
오늘 외출의 가장 큰 장애물로 예상했던 이안은 어째서인지 하루 종일 그림자도 비치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옆자리가 전혀 구김 없이 멀쩡한 걸로 보아, 아예 잠조차 자고 가지 않은 듯했다.
‘세상 바쁜 일은 혼자 다 짊어졌지.’
차갑게 식은 침대를 바라보며 나는 혀를 찼었다.
오늘뿐만 아니라, 이 며칠 내내 이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쁘기에 신혼부부 행세조차 소홀히 하고 있는 건진 모르지만, 아무튼 나로선 잘된 일이긴 했다.
은밀히 마차에 올라탄 나는 미리 준비해 놨던 염색 가루를 사용했다.
솜사탕 같던 분홍색 머리가 순식간에 평범한 다갈색으로 물들었다.
‘분홍색 머리는 정말 귀찮단 말이지. 쓸데없이 눈에 띄고.’
불평하는 동안, 마차는 리젤로가 알려 준 장소로 나아갔다. 도착한 곳은 거대한 타운하우스 앞이었다.
‘이런 대로변에 잘 보이게 서 있는 건물이 모임 장소라고?’
지하 무도회가 꽤 명성을 얻었는데도, 아직 황제의 철퇴가 닿은 적이 없다는 소문은 사실인 듯했다.
나는 쓰고 있던 가면을 더 푹 눌러쓰며 저택에 입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진한 포도주의 향기가 코를 덮쳤다.
이미 연회가 시작된 지 꽤 된 모양이었다.
홀에 들어서자, 수많은 시선이 나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가면 너머임에도 불구하고 똑똑히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나는 여유 있는 척 쥘부채를 흔들며, 널찍한 홀을 죽 둘러보았다.
아름답고 미끈한 가면을 쓴 남녀들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채 춤을 추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보다…… 건전한데?’
옷차림이 정숙한 여느 무도회와 달리 약간 더 파격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외설적인 애정 행각이나 불법 도박 같은 광경은 딱히 찾아볼 수 없었다.
‘각오했던 것과 다른걸.’
고개를 갸웃하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름다운 레이디. 혼자신가요?”
돌아보자 가면을 썼는데도 훤칠하다는 게 느껴지는 붉은 머리 청년이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곁에 서 있는 조안 경의 존재를 의식하며 얼른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동행이 있어서요.”
“아. 실례했습니다.”
붉은 머리 청년이 꾸벅 인사하며 매너 좋게 물러났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좀 더 끈덕지게 추근대지 않을까 경계한 것이 무색했다.
청년이 물러가고, 나는 조안 경에게 속닥거렸다.
“그냥 평범한 무도회처럼 보이네요.”
“안심하시기에는 이릅니다. 말씀하셨던 ‘그 물건’이 정말로 이 자리에 있다면, 높은 확률로 사교도들 역시 함께일 테니까요.”
사교도라. 그 이름에 나는 꺼림칙하다는 듯 혀를 찼다.
마신 페레아스를 섬기는 집단, 사교도는 원작에서도 주인공 커플의 골칫거리였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악마들을 소환해 이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는 것이라 한다.
‘야망만 야무졌지, 대체로 실패했기 때문에 크게 무서운 악역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놈들이 인큐버스를 소환했던 거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여태까진 악마를 소환하겠다 떠들기만 하고 성공한 전적은 없었기에 위험도가 낮았지만, 성공해 버린 거라면 그 위험도가 높아지니까.
‘그나저나, 리젤로는 어디 있는 거지?’
무도회의 시작 시간은 아홉 시였지만, 리젤로와 만나는 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정하긴 했지만 몹시 애매모호한 기준이었다.
‘땅이 아래로 잠긴 뒤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놈의 마탑주는 수수께끼 같은 말 없인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걸까?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도록 무도회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느리게 왈츠를 추는 남녀를 바라보며 나는 애써 지루함을 삼켰다.
암흑 경매니, 불법 도박이니, 알고 보면 순 허세였던 거 아냐?
그렇게 불평하던 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들.”
변조한 듯 이질적인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왈츠를 추던 남녀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짓궂은 미소였다.
“아이린 님, 이리로.”
조안 경이 내 곁에 바짝 붙었다. 동시에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올해에도 잊지 않고 모여 주셔서 기쁩니다. 이번 역시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유흥을 많이 준비하였으니, 부디 마음껏 즐기다 가시길. 그리고 잊지 마세요. 땅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땅 위로는 절대 새어 나갈 리 없음을.”
잔뜩 내리깐 음성은 말의 내용 때문인지 굉장히 느끼하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는데, 바로 그 순간,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으앗!”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자 조안 경이 얼른 나를 붙잡아 주었다.
그동안에도 바닥은 계속해서 흔들리며 움직였다. 동시에, 천장이 묘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분명 멀어지고 있었다.
‘바닥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
쿠구궁.
내 깨달음에 호응하듯 바닥이 본격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안 경의 부축을 받은 채 멍하니 점점 멀어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몇 초 뒤, 검붉은 빛의 거대한 베일이 천장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화려하기만 했던 샹들리에 조명이 검붉은 베일을 통과하며 야릇한 색감으로 바뀌었다.
조명이 달라지자, 눈앞에 펼쳐진 장소가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여기 계셨군요, 고객님?”
“흐억!”
안 그래도 긴장해 있던 탓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뒤를 돌아보자, 화려하기 짝이 없는 보라색 가면을 쓴 남자가 나를 향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얼굴은 가려져 있지만, 나를 ‘고객님’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아는 자이십니까?”
조안 경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리젤로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충직한 경비견도 데려오셨군요. 철저한 준비성, 보기 좋습니다.”
“제 호위 기사께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이런, 실례했습니다.”
리젤로가 순순히 두 손 들고 사과해 왔다. 사과하면서도 느껴지는 유들유들함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 불편한 장소에서 마탑주와 트러블까지 만들고 싶진 않았다.
“경매는 곧 시작될 겁니다. 아마 왈츠곡이 세 개 정도 연주된 뒤에.”
내게 살짝 허리를 굽힌 리젤로가 속삭였다.
안 그래도 사방에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꺼림칙한 눈으로 아까보다 묘하게 더 밀착되어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심심하실 것 같다면, 제가 상대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나는 기가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유부녀예요. 외간 남자랑 춤 안 춰요.”
“지조가 확실하시네요.”
빙글빙글 놀리듯 웃으며 리젤로가 말했다.
“남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때요. 금실은 좋으신가요?”
“……제가 그걸 왜 당신께 말해야 하죠?”
지레 찔린 나는 뾰족이 대답했다가,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좋아요. 아주 깨가 쏟아지죠.”
“그런가요? 흐음. 제가 어쩌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성기사단장이 벌써 며칠째 집무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던데.”
정곡을 공격당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실제로 지난 사흘간 나는 이안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한창 깨 쏟아지는 신혼부부 연기를 해야 할 때인데, 얼굴조차 보이질 않다니. 안 그래도 슬슬 황당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 건 사실이었다.
‘뭔가 소박맞는 새 신부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일이 워낙 바쁘셔서 그래요. 아시다시피 워낙 막중한 임무를 맡고 계신 분이잖아요?”
내가 두둔하자 리젤로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곤 호오, 하는 소리를 냈다.
그때 누군가 리젤로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무어라 속삭였다.
빙글거리는 웃음을 순식간에 없앤 리젤로가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여기 잠깐만 계세요, 고객님. 금방 어딜 좀 다녀오겠습니다.”
“경매 시작 전에만 오세요.”
가 준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미련 없이 리젤로를 보낸 나는, 벽에 가까이 붙은 채 춤추는 남녀를 구경했다.
무도회에서 춤은 추지 않고 벽에만 붙어 있는 건 소외당하는 증거로 통해 수치스럽게 여겨졌지만, 지금 나는 이 장소에서 소외당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호화롭기는 하네.’
완벽한 구경꾼이 되어 사람들을 훑으며, 나는 한가로이 쥘부채를 펄럭였다.
구경하기에는 더없이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사람들, 달콤한 춤사위. 은은한 조명과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보석들.
이 장소를 뒤덮은 화려함 덕인지, 사람들 역시 하나같이 맵시가 넘쳐 보였다.
가령, 저기 멀리 기둥 앞에 서 있는 저 남자처럼.
‘……와.’
멍하니 흘러가던 시선이 이름 모를 신사에게 고정되었다.
샹들리에 조명마저 삼킬 듯 새카만 흑발에, 그 아래로 드러난 대리석처럼 잘 빠진 피부.
이렇게 먼 거리인데도 한눈에 시선을 빼앗길 만큼 잘난 남자였다.
‘세상 혼자 사네.’
가면을 썼는데도 주변 남자들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는 존재감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어딘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사람은 황금률을 보면 본능적으로 안정된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저 남자의 신체는 그야말로 황금 비율 그 자체였다.
묘하게 드는 기시감의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