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61)

59화

* * *

“끄으으.”

실컷 기지개 켜며 몸을 일으키던 나는, 곧 바짝 굳어 버렸다.

‘맞다. 나 혼자 쓰는 침실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어제는 지하 무도회 문제에 골몰하다가 이안이 들어오기도 전에 먼저 잠들어 버렸다.

‘들어와서 자긴 했나, 이 인간?’

슬쩍 돌아본 옆에는, 아무도 누워 있지 않았다.

“외박이야, 뭐야.”

이래서야 신혼부부라고 남들이 믿어 주겠냐고.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뭐, 나도 아침부터 그 사람 얼굴을 봤다간 심장 건강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좋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싫은 꿈을 꿨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기억을 더듬으며 뺨을 만져 보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설마, 울었나?’

깜짝 놀라 거울부터 들여다본 나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베개에 눌린 자국이었다.

다행이었다. 이 나이에 얼굴마저 잊어버린 엄마 생각에 찔찔 울었다면 너무 창피하잖아.

“아이린 님, 일어나셨나요?”

문밖에서 아네트의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얼른 일어나 아네트를 들이자, 그녀가 깜짝 소식을 들려줬다.

“루시안 님께서 아이린 님께 할 말이 있으시다고, 들러도 괜찮겠냐 여쭈셨어요!”

“루, 루시안 씨가요?”

설마.

어제 있었던 리젤로와의 거래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러면 이안이 직접 날 족쳤을 테니까!’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후, 루시안이 방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이렇게 뵙고자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성녀님께서 승인해 주셔야 할 예산안들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제가 뭘 승인해요?”

“이제 에스테반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셨으니까요.”

루시안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대부분의 내사는 저나 집사장이 관리하겠지만, 큰 건에 대해서는 역시 공작 부인이 되신 성녀님께서 직접 결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요? ……이안 님께서도 승인한 사안인가요?”

그 인간이 자기 집안일을 나한테 맡길 것 같지가 않은데.

의심스러운 물음에 루시안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잠시 아무도 없는 주위를 살핀 루시안이 목소리를 낮췄다.

“계약 기간 동안 성녀님께선 완벽히 단장님의 아내가 되시는 거니까요. 혹시 단장님께서 전혀 언질을 안 주셨…… 아! 마침 거기 단장님께서 남기신 쪽지도 있는 것 같은데요?”

루시안이 침대 옆 협탁을 가리켰다.

과연 거기엔 웬 서류 몇 장과, 작은 카드가 있었다.

카드부터 열어 본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안의 필체가 맞았다. 밤새 방에 들르긴 한 모양이었다.

‘외박은 아니었군.’

카드에는 아주 간결한 문구만 적혀 있었다.

「결혼 선물입니다.」

으응?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드 밑에 깔린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선물이라고?

수상해하는 눈길로 서류를 읽어 내려간 나는, 잠시 뒤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떴다.

“루, 루시안 씨.”

“넵, 성녀님?”

“이게…… 이게 대체 뭐죠?”

“예?”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그래, 분명 그렇겠지. 다시 읽어 보자.”

그러나 다시 읽어 내려간 서류는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륙 남부 해안 어딘가에 위치한 섬 하나의 소유권을, 통째로 내게 이전한다는.

“아, 그 서류로군요!”

루시안이 짝 손뼉 치며 말했다.

“오르비체 섬의 소유권을 성녀님께 양도한다는, 그 문서를 보고 계신 거 맞으시죠?”

“역시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나는 소스라쳤다.

“아니, 왜, 섬을? 저한테? 어째서?”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고장 나 버린 내가 뚝뚝 끊어지는 말들을 뱉었다.

루시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소리 낮춰 속닥거렸다.

“성녀님께서 먼 섬나라의 공주라는 소문이 수도에 자자하지 않습니까. 단장님께서 그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 보셨습니다.”

만들어 보긴 뭘 만들어 봐……?

나는 루시안의 태연한 말투에 넋을 놓았다.

“놀라신 표정이군요. 사실 왕국을 창설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일이 어렵지요. 아무튼, 서류상 성녀님께서는 이제 완전히 오르비체 왕국의 공주님이 되셨습니다!”

루시안이 짝짝 박수 소리를 냈다.

“그러니 이제 거짓말이라는 죄책감 갖지 마시고, 아무 거리낌 없이 출신에 대해 말씀하시면 됩니다. 사람들을 좀 이주시켜야 하겠습니다만…… 그건 제가 도맡아 처리할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고요.”

나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루시안의 설명을 멍하니 들었다.

그제야 루시안이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혹시, 부담스러우신가요?”

“부담스럽다기보다, 아직 납득이 잘…… 아니, 섬을 샀다고?”

여전히 나는 그 대목에서 이해하지 못한 채 삐걱거리고 있었다.

섬을 사다니.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가십지에서나 간혹 읽던 문장이라고.

숨죽인 목소리로 나는 루시안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루시안 씨. 이안 님 말인데…… 실례지만 얼마나 부자인 건가요?”

나는 이안의 재력에 대해 잘은 몰랐다.

내게 천만 마르스를 투척할 만큼의 여유가 있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황족이긴 하나 성기사단으로서 출가했으니 황제가 많은 돈을 쥐여 주었을 리 없다.

성기사단장의 연봉 자체도 그리 천문학적으로 높지는 않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게 천만 마르스를 쾌척할 뿐만 아니라, 섬까지 사다니.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야?

“앗. 혹시 모르시나요?”

루시안이 놀란 눈을 했다.

“단장님의 수입원은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큰 건 베르닐 광산입니다.”

“베르닐 광산?”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다.

나는 곧 이름의 정체를 떠올려 냈다.

‘내가 결혼식에서 썼던 티아라의 에메랄드가 채취된 광산이잖아!’

그 에메랄드 광산이 얼마나 대단한지, 거기서 채취된 에메랄드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만들어진 내 티아라는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네트의 찬탄을 귀 따갑도록 들었다.

근데 그 광산의 주인이 이안이었다고?

“넵. 베르닐 광산이 아직 개발되기 전, 막 황자 신분을 벗어나셨던 무렵의 단장님께서 합리적인 가격에 사들이셨죠. 지금은 대륙 최대의 에메랄드 광산이 되었고요.”

별것 아닌 옆집 이야기를 전하듯 루시안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는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무슨 먼치킨이랑 결혼한 거야, 나.’

그 얼굴에, 재능에, 이젠 재력까지 갖춘 인간이라니.

놀랍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원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이렇게 설정 과잉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서, 최종 흑막으로 억지로 타락시키곤 죽여 버리다니.

작가는 제정신인 걸까?

어쩐지 내가 다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설정 과잉이면 뭘 하냐고. 결국 주인공들 손에 죽는데!

여태까지 이안의 먼치킨적 면모를 볼 때면 혀만 내두르던 나였는데, 이번엔 이상하게도 울컥 화가 났다.

“성녀님?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불편하신 점이라도……?”

“아, 아. 흐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걸까요? 섬을 사는 걸로도 모자라 주민들까지 데려다 놓다니. 거짓말의 규모가 너무 커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시안이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최근, 남쪽 국경 근처 외진 곳에 마물의 침입으로 쑥대밭이 된 부락민 마을이 있습니다. 그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대신 약간의 입막음을 요구한 것뿐입니다.”

“그분들이 순순히 수락하던가요? 갑자기 섬에 가서 살라는 이야기를?”

“고향이 송두리째 사라진 이들입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 정착할 자금까지 모조리 사라져 버린. 오르비체는 섬이긴 해도 땅이 제법 기름진 곳입니다. 그곳의 아름다움을 보더니 모두 기뻐하던걸요. 뭐, 무엇보다 정착금을 두둑이 줬고요.”

루시안이 윙크하듯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으음,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긴가민가해하는 나를 향해 루시안이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점에 대해선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정말 마음 놓으셔도 돼요. 그나저나, 오늘 제가 온 용건에 대해서 말인데요…….”

루시안이 웬 거대한 장부를 펼쳐 들며 말했다.

그 안에 적힌 것이 에스테반가의 다음 일 년 치 예산안이라는 것을 안 나는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 *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 밤.

나는 긴장한 얼굴로 거울 속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정숙한 디자인의 외출용 드레스와, 요란하지 않은 머리 장식.

그저 이 앞 번화가에 잠시 나들이나 다녀올 듯 평범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현재 내 파우치 속엔 평범하지 않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안에 잘 잠들어 있을 검은색 민무늬 가면을 떠올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되네.’

이제 곧 지하 무도회가 시작된다.

그 모임이 얼마나 방탕한 곳인지 원작을 읽어 잘 알기에 절로 마음이 위축되었다.

이안 앞에서는 연애 고수라도 된 듯 잘난 체했지만, 사실 나라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건 아니었다.

그곳에선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놓고 애정 행각을 벌이기도 한다던데…… 내 소심한 심장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아이린 님. 슬슬 시간이 되었습니다.”

조안 경의 말에 나는 소스라쳐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시곗바늘이 무도회 시작 시각인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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