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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161)

58화

“보고서는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더군요. 인큐버스 왕이라니.”

대신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하여 그런 재앙이 전조도 없이 닥쳤는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성하께서는 회복하시는 데에만 집중하시지요.”

낮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안이 말했다.

대신관이 픽 미소를 지었다.

“그런 딱딱한 말만 하지 말고, 이리 가까이 와 보지 그러느냐.”

대신관의 말투가 뒤바뀌었다.

성기사단장을 바라보는 대신관이 아닌, 오랫동안 지켜봐 온 피보호자를 바라보는 양육자의 목소리였다.

이안은 말없이 대신관의 침대맡 가까이로 다가갔다.

“어땠느냐? 인큐버스의 왕은.”

“크게 까다로운 놈은 아니었습니다.”

“흐음. 옛 생각이 나는군. 나도 한 번 그 족속 중 하날 만난 적이 있었어. 어찌나 교태로운 목소리로 홀려 대던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지.”

악마에게 넘어갈 뻔했다는 대신관의 거침없는 언동에 지켜보던 신관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이안이 무심히 입을 열었다.

“성하께서 넘어가셨다면 대륙의 반이 날아갔겠군요.”

“후후. 띄워 주기는. 뭐, 그때의 나는 전성기였으니 크게 부정하지는 않으마. ……이리, 손을 줘 보거라.”

이안은 순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대신관이 곧게 뻗은 손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검 잡는 사내자식치고는 지나치게 예쁜 손이구나. 흐음…… 성녀는 이 손을 좋아하더냐?”

“성하.”

이안이 굳은 목소리로 나무라자, 대신관이 큭큭 웃었다.

“못 할 말도 아니지 않으냐? 주책 좀 떨어도 이해해다오. 손주를 못 보고 가는 것이 서운해서 그러니.”

“곧 쾌차하실 겁니다. 그런 말씀 마시라고 했잖습니까.”

“오. 손주를 안겨 줄 계획이 있긴 있나 보구나?”

“성하…….”

정색하는 이안의 눈빛에 대신관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너와 성녀와의 결혼에 어떤 꿍꿍이가 있다는 건 안다. 세상이 들떠서 쑥덕대는 것처럼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는 것도.”

“…….”

“하지만, 누구와 통 등을 맞대는 법이 없는 네가 그래도 그 성녀와는 모종의 꿍꿍이를 함께 꾸미고 있다는 것 아니냐?”

이안이 침묵으로 부정하지 않자, 대신관이 쿡쿡 웃었다.

“아이린 그레이스. 단 한 번 봤지만, 생기로 가득 찬 아이더구나.”

“……예.”

아이린을 떠올리는 듯, 이안이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생기가 지나치게 넘쳐서 문제였다, 그의 계약 파트너는.

오늘도 새로 사귄 친구의 저택에 초대받아 외출했었다고 들었다. 연고 하나 없는 지역에서 어떻게 그리 자꾸 친분을 만드는 것인지 가끔은 신기할 정도였다.

“그 아이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더냐?”

“제가 누굴 믿는 것 보셨습니까.”

“못 봤지. 넌 나조차 완전히 믿질 않지 않느냐. 인간미라고는 없는 녀석.”

대신관이 투덜거렸다.

“그래서 더 묘하다는 거다.”

“예?”

“네가, 믿지도 않는 자와 이렇게 오래 등을 맞대는 건 본 적이 없으니까.”

“워낙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이안이 즉답했다.

“곁에 안 두면 안심이 안 되거든요.”

“후후.”

대신관이 수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잠시 말이 없던 이안이, 몇 초 뒤 입술을 열었다.

“……그 사람. 언령을 쓸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대신관이 처음으로 놀라 동요했다.

이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큐버스 왕을 끝장낸 것도 제 검이 아닌, 그 사람의 언령이었습니다.”

“이건…… 이건, 놀라운 일이군.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느냐?”

“예. 그 사람조차도 모릅니다.”

“허.”

대신관이 탄식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언령 능력자는 내 고조부님이었지. 너도 알겠지만, 그분은 사교도의 계략에 속아 전장에 홀로 던져졌다가 언령으로 성력을 모두 탕진해 죽었다.”

“예. 기억합니다.”

“네가, 그 아이를 지켜야겠구나.”

대신관이 이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언령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그 아이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건 잘한 일이다. 본인이 알게 되면 더 크게 능력을 각성하게 될 테니. 그렇게 되면 위험 부담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테지. 명심해라, 이안.”

굳은 목소리로 대신관이 말했다.

“언령은 사악한 것 즉, 여신의 뜻에 반하는 것에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것들로부터 멀리하게 한다면 그 아일 확실히 지킬 수 있다는 거지.”

“명심하겠습니다.”

이안은 지금쯤 침실에서 잠들어 있을 아이린을 떠올렸다.

그의 수상한 구석이 많은 계약 아내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지켜 내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토록 모순적인 존재가 자신의 인생에 또 있었던가.

옅게 짜증 배인 한숨을 내뱉자,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대신관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이안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신관이 눈을 감고는 다시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이안은 잠시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단장님.”

루시안이 조심스레 이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상한 정보가 들어왔는데, 들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지.”

대신관에게서 시선을 뗀 이안이 그녀의 침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루시안이 소리 낮춰 속삭였다.

“이번 지하 무도회에 사교도 무리가 숨어든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사교도라.”

사교도란 마신 페레아스를 섬기는 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그자들이 지하 무도회에는 왜?”

“자세한 사유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대악마와 관련된 물건이 경매에 출품되리라는 정보도 있어, 더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가져오겠습니다.”

“뭐. 어찌 됐든 좋아.”

비릿한 웃음이 이안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 빌어먹을 변태 모임도 한 번쯤 쓸어버릴 때가 오긴 했지.”

“……직접 나서시려는 겁니까?”

“잘됐지 않나. 이 시기에도 수도에 붙어 있는 건 오랜만인데, 마침 괜찮은 먹잇감이 생겼군.”

여름이 다가오는 이 시기, 성기사단장은 대대로 평소 교단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까지 시찰을 다녀오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리칼리온 사태 때문에 올해는 시찰이 무산되었다.

다시금 행정 업무에만 파묻힐 뻔한 이안에게 지하 무도회는 꽤나 반가울 새 먹잇감이었다.

‘그자들도 참 운이 없군.’

지하 무도회에 참가할 인간들을 짧게 애도하며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잠입을 준비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취침하시겠습니까?”

“……그래.”

한 박자 늦게 이안이 대답을 읊조렸다.

침실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루시안이 은근슬쩍 거리를 가까이하며 속닥거렸다.

“성녀님과 요즘 사이가 부쩍 가까워지신 것 같아서 기쁩니다. 아무래도 출정에 함께 다녀오신 영향이 크셨지요?”

“헛소리 말고 퇴근이나 하지 그래.”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날 단장님의 침대에 떨어진 것이 아이린 님이었다는 게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능력 있고 담대하신 분이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낮게 혀를 찼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아이린 그레이스의 능력이 예상보다 지극히 뛰어나다는 것.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단장님.”

침실 앞에서 루시안이 꾸벅 고개 숙이곤 물러갔다.

이안은 닫힌 문을 잠시간 노려보았다.

제 침실에 이미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 있다는 기분은 역시 생소했다.

몇 초 뒤 천천히 문을 연 이안은, 곧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

깊은 잠에 든 듯,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은 베개 위에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을 분홍빛 머리카락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상 유일의 언령 능력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당신은 신경이 쇠심줄로 만들어졌습니까.”

외간 남자가 곧 들어올 침실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세상모르고 꿈나라라니.

이안은 낮게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소매 커프스를 풀기 시작했다.

그때 침대로부터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

이안의 고개가 침대로 돌아갔다.

“……나한테 한 말입니까?”

일시적으로나마 부부의 연을 맺긴 했지만, 말을 놓기로 한 기억은 없다.

황당한 물음에 아이린은 대답 대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마, 말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렸어요.”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이린 그레이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저를 기다렸다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오늘만 해도 새로 사귄 친구의 저택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보고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내일도…… 와요. 응?”

웅얼거리듯 조르는 목소리에 이안은 커프스를 풀던 손을 멈췄다.

침대로부터 계속해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착한 딸…… 될 수 있으니까…….”

이안은 잠시 침대 위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거대한 이불에 칭칭 휘감긴 채, 아이린이 꼭 감은 눈을 잘게 떨고 있었다.

나쁜 꿈에 짓눌린 아이처럼.

곧 낮은 한숨이 이안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레하트 제국에는 악몽이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는다는 미신이 있다.

물론 이안은 그런 것을 믿진 않았다. 하지만, 계약 아내가 휘감긴 이불에 질식하는 꼴은 보기 곤란했다.

“아이린.”

조용히 읊조리며 이안은 아이린을 뒤덮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휘감은 건지, 아이린과 한 덩어리가 된 이불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린, 하고 다시금 중얼거리려던 이안은 문득 손을 멈췄다.

질끈 감긴 아이린의 눈매 옆으로,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고, 가지 마요…….”

한 줄기 흐른 눈물이 아이린의 뺨을 타고 베개를 적셨다.

이안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굳어 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잠시 뒤, 서서히 그의 손이 움직였다.

“무슨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답지 않게.”

나무라듯 읊조리며 이안은 아이린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복숭아처럼 하얀 피부 앞에서 이안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나 잠시 후, 기어코 뻗은 손가락이 젖은 뺨에 닿았다.

손끝을 간질이는 촉감이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으으.”

그 순간, 아이린이 크게 몸을 뒤척거렸다.

움찔한 이안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흐응.”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아이린이 이불과 함께 팔을 휘둘렀다.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이불로 감싸인 팔이 이안의 어깨를 강타했다.

이안은 제 어깨에 턱 얹힌 팔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또다시 저를 후려치려는 팔을 붙들어 침대에 강제로 고정시켰다.

더 때리지 못한 게 아쉬운 듯 이마를 찌푸리는 아이린을 보자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불을 그물처럼 몸에 휘감질 않나, 악몽이나 꾸고, 이젠 때리기까지.

제 신부는 이제 보니 잠버릇이 꽤나 고약했다.

“역시 이건 내가 손해 보는 결혼 같은데.”

이안이 불평하건 말건 아이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성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천사처럼 무해하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제 나쁜 꿈은 다 꾼 모양이었다.

“……하아.”

한숨을 뱉은 이안은 침실에 난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늘한 밤공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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