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61)

57화

“그것 보세요, 탑주님. 성녀님께서 놀라실 거라고 했잖아요.”

“하하, 미안해요. 멜로디 양이 이번에도 자기 행세를 하느라 자기만 쏙 빼놓고 고객님을 만나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놔서. 과년한 레이디의 저택에 잠입하려니 이런 형태가 되었네요.”

“마, 마.”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인형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마탑주님?”

“그럼요, 저예요.”

화사한 금발의 고딕풍 인형이 빙그르르 제자리에서 돌며 말했다.

‘기괴해……!’

누가 마탑주 아니랄까 봐, 인형 취향 한 번 소름 끼쳤다.

“며칠 전에는 저를 바람맞히셨죠? 고객님.”

인형이 반질거리는 유리알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겼거든요. 제가 리칼리온 출정에 함께 다녀왔다는 건 마탑주님도 아시잖아요.”

사과하자 인형이 새침하게 팔짱을 꼈다.

“연락드릴 길이 마땅치 않은 데다 시간도 없어 그대로 출정에 다녀오게 됐어요. 죄송합니다.”

“하하하, 괜찮아요.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니거든요.”

도도한 체하던 인형이 곧 낄낄거리며 티스푼을 흔들었다.

저 모습이니까 두 배는 더 얄밉네.

“아니, 오히려 감사의 말을 드려야겠죠. 마법계에 다시 없을 공헌을 해 주셨으니.”

인형이 반질거리는 유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스멀스멀 소름이 올라왔다.

“성마석 이야기라면, 전 그저 그 돌이 혹시 위험할 수도 있다고 걱정한 것뿐인걸요. 초록색으로 빛나는 돌이라니,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요?”

“리칼리온의 생존자들은 그걸 성석으로 여기고 애지중지했다 들었습니다. 그자들이 마력 과다 후유증으로 전부 죽었다면, 성마석은 그대로 다시 묻혔겠죠.”

“정말 큰 비약이시네요! 하하, 하.”

어색하게 웃자 리젤로가 또 그 반들거리는 인형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군요, 고객님께서는. 그냥 단순히 겸손한 성정인 것뿐만은 아닌 것 같고. 명예욕이 거세되었나? 그게 성녀의 특징인 건가.”

갑자기 리젤로가 나를 연구 대상처럼 뜯어보기 시작했다.

“뭐. 로렐라이 황후 폐하를 보면 성녀의 특징이라 할 순 없겠군. 흠, 그나저나. 카쿨타 진액은 이미 마련해 놨어요.”

갑작스러운 본론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당장이라도 거래할 수 있는데. 어때요?”

“거래합시다. 팔아 주십시오!”

나는 금세 열정적인 고객의 자세가 되어 눈을 반짝거렸다.

정말? 이렇게 쉽게 거래할 수 있다고?

“아, 참. 그렇지.”

그때 인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답이 없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직 카쿨타 진액의 유통 제한이 풀리지 않았었구나?”

“……네?”

“거래하고 싶지만, 지금 고객님께 판매한다면 저는 범법자가 되어 버리겠군요. 그건 무섭죠.”

“…….”

인형이 가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어쩐다? 흐음. 아, 하지만 고객님께서 내 간단한 부탁 하나만 들어준다면 용기가 날 것도 같은데.”

나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각오는 하고 있었다.

마탑주와 거래하는 일이 늘 돈만 주면 될 정도로 간편하기만 할 리가 없지.

“무엇인가요? 간단한 부탁이.”

‘일단 듣고, 협상을 해 보자.’

긴장한 채 나는 리젤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쉬운 부탁은 아닐 것 같았다.

현재 제도에서 ‘성녀 아이린’은 쓸데없이 평판이 높았다.

게다가 리젤로는 이전부터 내게 부탁이라는 이름의 빚을 지우기 위해 간을 보고 있었다.

‘일단 처음엔 강경하게 거절하자. 그다음부터 슬슬 허들을 낮추는 거야.’

머릿속으로 협상의 법칙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저와 무도회에 참석해 주시죠.”

“그건 힘들겠…… 네? 뭐라고 하셨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나는 협상도 잊고 당황했다.

인형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와 파트너가 되어 무도회에 함께 가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실례지만, 마탑주님.”

나는 슬쩍 인형에게서 몸을 물리며 말했다.

“전 유부녀인데요.”

그렇게 온 수도가 떠나갈 법한 결혼식을 치렀는데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인형이 킬킬 웃었다.

“물론 알죠. 데이트 신청으로 들리셨나요?”

“절대 그렇게 듣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들릴 말이었는데요.”

“하하. 혹시 ‘지하 무도회’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지하 무도회.

모를 리가 없었다.

레하트 제국의 수도에는 많은 사람이 알면서도 쉬쉬하는, 아주 방탕한 전통이 하나 있다.

지하 무도회라는 이름의 비밀 모임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면으로 신분을 가린 귀족들이 비밀리에 모여드는 곳.

온갖 욕망이 뒤섞이는 그곳에서는 불건전한 애정 행각이나 사기도박, 암흑 경매 등 온갖 불법적인 일들이 판을 쳤다.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냐고?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첫 스킨십이 거기서 이루어졌으니까.’

두 주인공이 지하 무도회에 숨어든 사교도를 적발하기 위해 잠입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정의로운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잠입한 주인공들이었으나, 장소가 워낙 장소였던 탓에…….

열광적으로 놀아나는 주변인들 사이에서 튀지 않기 위해선 주인공들도 스킨십을 불사해야만 했었다.

‘참 흐뭇한 장면이었…… 아니. 이게 아니라.’

“왜 제가 탑주님과 거길 함께 가야 하는 거죠?”

“음, 돌려 말해 봤자 피차 답답하기만 할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지하 무도회의 메인은 암흑 경매라는 것, 혹시 아십니까?”

“……들어는 봤어요.”

“이번 암흑 경매에 특별한 물건이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특별한 물건?”

“인큐버스의 진명이 적힌 종이.”

“……!”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리칼리온에 인큐버스가 출몰했다는 이야기는 외부인에겐 비밀이었다.

그런 상급 마수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지나친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연, 일까?’

이 타이밍에 인큐버스와 관련된 물건이 경매에 출품됐다고?

“그…… 종이론 무엇을 할 수 있는데요?”

“악마의 진짜 이름을 알면 여러 가지로 이용할 수 있죠. 가장 대표적인 건 소환입니다.”

“소환…… 이요?”

“네. 물론 그 외 이것저것 귀찮고 거창한 준비물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필수적인 건 역시 진명이죠. 즉, 그 종이가 있으면 대악마를 인간 세계에 강림시킬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는 얘긴, 설마.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리칼리온에 나타났던 인큐버스는, 누군가가 고의로 강림시켰던 것……?’

하지만, 도대체 누가 어째서 그런 미친 짓을 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인큐버스의 존재는 더없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원작엔 없던 등장이었으니까.

“아무튼, 저는 성녀님께서 그 종이가 진짜인지 알아봐 주길 바랍니다.”

“왜 제가 그걸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죠?”

“대악마의 진명이 적힌 종이입니다. 엄청난 마기로 득실거리겠죠. 성녀라면 그 정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텐데요.”

“……음.”

리젤로의 확신 어린 말에 사기꾼 성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실, 마기를 못 보는 내게도 그 종이가 진짜인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그 악마, 죽기 전에 제 이름을 말했었어.’

인큐버스가 죽기 전에 대한 기억이 자세히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놈이 내게 빌며 매달려왔던 기억은 어렴풋이 떠올랐다.

‘제발 도와주세요, 네? 꼭 보은할게요. 라스펠은 아픈 거 싫어…….’

사특할 정도로 고혹적인 미성으로 애원하던 목소리가, 흐릿하게 되살아나 머릿속을 맴돌았다.

‘분명 라스펠, 이라고 했었어.’

나는 그 악마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

덩달아 악마가 지금 당장 주종 계약을 맺자며 빌던 목소리도 이어 떠올랐다.

그 악마 놈에겐 사활이 걸린 상황이었으니 내가 응하기만 했다면 정말 계약이 이루어졌겠지. 그러니 악마가 가짜 이름을 말했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따라서 리젤로의 말대로 나는 그 종이의 진위 여부를 알아볼 수 있다.

‘정말 진명이 적힌 종이가 경매에 출품되는 거라면…….’

이건 보통 심각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 종이의 전 주인이 인큐버스를 현세에 강림시켰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

‘무시하기엔 너무 꺼림칙해.’

게다가, 어차피 나는 카쿨타 진액이 필요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내게 나쁠 것이 없는 거래였다.

종이의 진위를 파악해 주기만 하면, 카쿨타 진액이 내 손에 들어온다.

그리고 만약 정말 종이에 적힌 것이 진명이라면, 익명의 투서라도 날려서 이안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할 터였다.

거기까지 한다면 내 할 일은 끝이었다.

그 뒤는 이안이 알아서 하겠지.

‘좋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크는 컸지만, 감수할 만한 거래였다.

“받아들이죠. 그 거래.”

“시원스러우시군요. 과연 고객님!”

인형이 쌍엄지를 치켜들었다.

“단. 카쿨타 진액은 무도회에서 접선할 때 반드시 넘겨주셔야 해요.”

“그야 물론입니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최상급으로 준비하도록 하죠.”

인형이 눈을 찡긋거렸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재료가 최상급이면 그만큼 해주 성공률도 올라갈 테니.

“믿을게요, 그 말씀.”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나와 인형은 굳세게 악수를 나누었다.

* * *

“왔습니까, 경.”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생기 없는 목소리.

이안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여인이 드넓은 침대에 반쯤 일어나 앉아 있었다.

“일어나 계시지 마십시오. 성하.”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대신관이 잘게 떨리는 고개를 들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한때 검의 정점이자, 교단의 최강자로 우뚝 서 신의 뜻을 설파하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이 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주어진 생을 거의 다 살아 낸 성자를, 이안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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