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 *
성기사단의 귀환을 환영하는 인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귀환일 이후론 앞서 출정했다 전멸했던 선발대들에 대한 추모가 3일 동안 이어졌다. 귀환일과는 정반대로 온 도시가 숙연함에 잠겼다.
혼이 쏙 빠질 만큼 정신없었던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조금이나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나 싶었지만…….
“아이린 님이다.”
“헉, 성녀님께서 지나가신다.”
다 들립니다.
나는 피부로 쏟아지는 온갖 시선들을 느끼며 속으로 끄응, 신음했다.
내 생애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시선 집중당했던 일이 있었던가?
‘부담스럽다. 굉장히 부담스럽다!’
고작 대성당 안에 있는 도서관에 다녀왔을 뿐인데, 선망과 존경의 눈길을 얼마나 많이 수집했는지 모른다.
“저분이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은 다 죽었을 거야. 알지? 원래 나 이번 달에 여행 가려고 휴가계도 냈었잖니.”
“알지, 알지. 진짜 갔으면 워프 게이트가 폭발해서 흔적도 안 남았을지도 몰라, 너.”
“내 말이. 성녀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셔.”
부담스럽다!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잰걸음을 놀렸다.
방으로 돌아가자, 아네트가 사용인들과 함께 선물 더미를 옮기고 있는 게 보였다.
“아이린 님! 오셨어요? 여기 또 아이린 님께 선물이 이만큼 도착했어요!”
아네트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와아, 어제도 잔뜩 받았는데 또 이만큼이나요? 정말 감사하네요. 하, 하, 하.”
누가 들어도 어색한 목소리를 내며 나는 두려운 눈으로 선물 더미를 훑었다.
수도에 귀환한 날부터 선물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발신인도 다양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슨 백작 부인, 어쩌고 대상단의 상단주, 심지어 고위 대신들까지.
“다들 아이린 님께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거죠.”
아네트가 흐뭇한 얼굴로 선물 더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네트 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제국에서 내 존재감이 너무 커진 거 아냐?’
곤란했다.
나는 앞으로 몇 달 뒤엔 유령처럼 사라져 버려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뭐. 이안의 부인이 된 이상 존재감이 없는 건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
좋게…… 생각할까?
나는 아주 호화로워 보이는 선물 상자 하나에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몇 개쯤은 팔아서 열 달 뒤 도망 비용에 보태는 것도 좋은 생각 같았다.
그때, 누군가 문에 정중히 노크를 했다. 아네트가 발랄히 물었다.
“누구신가요?”
“조안입니다. 성녀님.”
“조안 경!”
나는 반가이 조안 경을 맞았다.
조안 경은 리칼리온으로부터 며칠 늦게 귀환했다.
앨리샤가 나을 때까지 머물러도 좋다는 이안의 배려 덕분이었다.
‘은근히 섬세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앨리샤는 좀 어떤가요?”
“그 아이는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아이린 님 덕분에. ……저, 아이린 님.”
조안 경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 꺼내길 망설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왜 그러세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조안 경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게 예를 차렸다.
이안이나 황제에게나 취할 법한 극도의 예법이었다.
“조, 조안 경. 왜 그러세요?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아이린 님.”
고개 든 조안 경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밤색 눈이 올곧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앨리샤가 쾌차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이린 님 덕분입니다. 아이린 님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그 아인 온몸이 마나에 중독돼 지금쯤 목숨을 잃었겠지요.”
그렇게 말한 조안 경이 다시금 고개 숙여 예를 차렸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갚는 것이 도리라 배웠습니다. 이 조안 오르테스, 죽는 날까지 성녀 아이린 님을 수호하기로 맹세합니다.”
‘으, 응?’
나는 조안 경이 내민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부디, 피의 맹세를 허해 주십시오.”
피의 맹세?
그게 뭔데?
뭔진 몰라도, 절대 쉽게 허락해선 안 될 일이란 건 잘 알겠다.
‘아니. 잠깐. 원작에서 남주가 여주에게 했던 게 피의 맹세잖아.’
맹세 받는 자가 맹세하는 자의 손가락을 그어 그 피를 입술에 묻히는 것이 ‘피의 맹세’였다.
별다른 마법적 효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상징적 의미가 컸다. 기사들은 그 맹세를 깨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할 정도니까.
그만큼 조안 경 같은 신실한 기사들에겐 절대적인 맹세였다.
‘그걸 왜 나한테 해!’
워, 워.
나는 조안 경을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앨리샤가 쾌차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난 남의 피를 입술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말려 주길 바라며 돌아봤지만 아네트는 더없이 로맨틱한 광경을 봤다는 듯 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조안 경? 일어나 보세요.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그런 맹세는 정말 소중한 분께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가령 미래의 애인이라거나.
“생명의 은인보다 소중한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조안 경은 완고했다.
이렇게나 마음가짐이 확고한데 구태여 거절하는 것도 기사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갈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조안 경이 단도로 손가락을 긋는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조안 경의 미래 남편님.’
응당 당신이 받으셔야 할 맹세를 제가 미리 받고 있네요.
속으로 사과의 말을 전하며 나는 조안 경의 피를 입술에 묻혔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렸다.
* * *
‘피의 맹세’의 효력은 어마어마했다.
여태까지의 조안 경도 물론 전심전력으로 나를 지켜 주긴 했다.
그러나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이 담기자 보호가 한층 더 거세졌다.
“아이린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함께 산책하던 중, 조안 경의 말에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콰직!
조안 경의 칼이 내가 다음 밟았을 돌로 된 바닥재를 후벼 팠다.
강인한 돌이 속절없이 파스스 깨지는 광경에 나는 소스라쳤다.
“허, 헉.”
“죄송합니다, 아이린 님. 감히 누군가의 타액이 묻은 부위에 성녀님의 발이 닿으실 뻔했습니다.”
“그, 그런 부위 많이 밟아 봤는데요…….”
박살 난 바닥재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조안 경의 애정 어린 보호를 받게 된 기분은……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다.
‘세계에서 제일 센 언니가 생긴 것 같아.’
자매는커녕 어머니도 안 계셨던 나이기에, 나는 연상의 여자에게서 쏟아지는 애정에 무척이나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문제점도 있었다.
‘리젤로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나는 현재 리젤로에게 만나러 오라고 운만 띄운 뒤 쌩하니 리칼리온으로 달아나 버린 상황이었다.
리젤로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황당할 것이다.
가서 급한 일이 있었다고 해명도 하고, 무엇보다 카쿨타 진액을 얻어야만 했다.
‘이 망할 놈의 시간제한 저주도 풀 때가 됐으니 말이지.’
그러기 위해선 일단 어떻게든 그자와 접촉해야 하는데.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짧은 고민 끝에 나는 펜을 들어 편지지 위에 사각거렸다. 저택에 방문해도 되겠냐는 물음이 그럭저럭 우아한 인사말과 함께 쓰였다.
수신인은 멜로디 히아신스 양이었다.
다행히 답장은 금방 왔다.
바로 그날 오후, 나는 멜로디 양의 저택에 방문할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이린 님.”
히아신스 백작저에서 멜로디 양이 나를 맞이했다.
멜로디의 차분한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아가씨, 리젤로가 아니군.’
오늘의 멜로디는 리젤로가 변장한 것이 아닌, 진짜 멜로디였다.
“정원에 차를 준비해 두었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진짜 멜로디는 리젤로 버전과는 달리 굉장히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똑같은 얼굴이 이렇게까지 다르게 보일 수 있구나 감탄하며 정원까지 걷는데, 멜로디가 입을 열었다.
“제 모습으로 마탑주님과 은밀한 만남을 가져오셨죠.”
콜록.
나는 급하게 헛기침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밀한 만남이라니. 굉장히 불순하게 들리잖아!
이안의 귀에 저 말이 들어간다는 상상만 해도 등골이 시렸다.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랬죠. 아주 짧고, 서로 용건만 전달한 지극히 사무적인 만남이었지만요.”
“그러셨군요.”
“그럼요. 제 신분 탓에 그분과 공개적인 만남을 갖기가 어려웠는데, 멜로디 양이 모습을 빌려주신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걸요. 비록 탑주님께서 제 행세를 하며 저의 평판이 또 조금 우스워졌겠지만.”
나는 자기를 삼인칭으로 부르던 리젤로를 떠올리며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상관없어요. 아이린 님께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영광이니까. ……리칼리온에 성기사님들과 함께 다녀오셨지요?”
뜬금없는 화제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어요.”
“마수도 많이 만나 보셨겠군요. 발록이 나타났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아…… 그랬죠.”
중요한 건 발록이 아니었지만.
인큐버스 왕의 소름 끼치는 속삭임을 떠올리자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정말 독특한 경험을 하셨군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멜로디가 순간, 홱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언젠가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을는지요.”
“네, 넵. 당연하죠.”
그녀의 기백에 눌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멜로디가 다시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걷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뭐였지, 방금.
뭔가 광기 같은 걸 엿본 것 같은데.
머지않아 우리는 정원에 도착했다.
소담하고 한적한 정경이 우리를 반겼다.
“누추하지만 앉으시지요. 나름대로 괜찮은 차를 준비했습니다.”
테이블엔 우리 외에 아무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웬 인형 하나가 빈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긴 했다.
‘단둘만의 티 파티라.’
뭐, 우리밖에 없으니 리젤로에 대해 묻기는 좋은 자리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안녕, 고객님?”
“흐어억!”
인형이, 말을 했다.
나는 뒤로 고꾸라질 뻔한 것을 간신히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