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61)

52화

나는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따스한 물을 콸콸 맞고 있자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엘리엇을 어떻게 만나러 간담.’

다소 가벼워진 머리로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트란셀에 무난히 오게 된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일단은 이안과 떨어져서 단독 행동할 기회를 잡아야 해.’

문제는, 이안이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거다.

숙소를 나가려는 기미만 보여도 눈을 번득이며 가만히 방에나 있으라고 할 게 뻔했다.

‘어떻게 이안을 떼어 놓지. 어떻게 하면…….’

고민에 잠겨 있는데, 일 층으로부터 희미하게 소음이 들렸다.

왁자하게 먹고 마시며 떠드는 기사들의 소리였다.

다들 근엄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지만, 오늘만큼은 고삐가 풀린 듯했다. 그럴 만도 했고.

떠드는 소리를 들은 순간, 머릿속에 반짝 전구가 켜졌다.

‘잠깐. 술?’

내 머릿속에서 원작의 페이지가 차라락 넘어갔다.

이안에겐 한 가지 의외의 포인트가 있었다.

그는 술을 잘하지 못한다.

‘실수로 독주를 마시고 취한 채 훈련하다가 검기로 훈련장을 반파 낸 적도 있었지.’

작중에선 이안이 이만큼 센 캐릭터다, 하고 나타내는 장치로 사용되는 장면이었다.

여주인공이 그런 이안에게 처음으로 인간미를 느끼며 반하는 장면이기도 했는데…….

‘훈련장 박살 내는 걸 보고 인간미를 느끼다니, 여주도 보통이 아니긴 해.’

아무튼.

술은 이안이 평정심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만큼 웬만하면 취하지 않으려 할 테지만…….

‘오늘은 승전의 밤이잖아.’

어젠 인큐버스 왕을 무찌르고 성석을 되찾았고, 오늘은 남은 마수 잔당들까지 쓸어 냈다.

특별히 기념해야 할 날이 분명한 것이다.

‘이런 날이니 조금쯤은 가능성이 있을지도?’

저 칼 같은 인간도 조금쯤은 말랑해졌을지 모르잖아.

밑져야 본전이다. 나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욕실 문을 나섰다.

이안은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내용 모를 문서를 훑고 있었다.

내가 나왔는데도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 서류에 아주 단단히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술 마시러 내려가자고 어떻게 말을 꺼내지.’

나는 침대 오른쪽을 향해 걸었다가, 다시 왼쪽을 향해 걸었다.

걷는 것은 고민에 잠겨 있을 때마다 나오는 내 습관이었다.

‘배고픈데 식사하러 내려가자고 할까? 아니야, 식사를 올려 달라고 주방에 주문할 게 뻔해. 기사님들과 대화하고 싶다고 하면…….’

“정신 사납게 뭐 하는 겁니까.”

히익.

돌연 나를 돌아본 이안이 매서운 눈빛을 뿌렸다.

나는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죄, 죄송해요. 서류 읽는 데 방해되셨나요?”

“그대가 등 뒤에서 날짐승처럼 퍼덕거리니까.”

날짐승이라니. 퍼덕거리다니.

뜻밖의 모욕적인 언사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이안이 서류 더미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 바람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나를 향해 완전히 돌아앉았다.

“뭡니까. 순순히 털어놓으시죠.”

귀신 같은 인간.

나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꿍꿍이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양옆으로 열 번, 제자리에서 스무 번 맴돈 데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아니.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단 말이야?

나조차 몰랐던 내 동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이안에 혀가 내둘러졌다. 소드 마스터쯤 되면 뒤에도 눈이 달리나?

“아니, 저는. 흠, 그러니까…… 그게, 좀 배가 고파서요.”

“식사 올리라 이르겠습니다.”

“저, 혹시. 내려가서 식사해도 괜찮을까요?”

내 직구에 이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굳이?”

“그게, 아래층에서 재밌게 대화 나누시는 소리를 들으니까 괜히 기웃대고 싶어져서요. 저 기사님들이랑 벌써 며칠째 함께 다니고 있는데, 저랑은 제대로 대화도 나눠 본 적 없잖아요.”

“굳이 나눠 봐야 합니까?”

“일단은 남편의 부하들이니까?”

‘남편’이라는 단어에 이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자기는 부인이라고 잘만 불러 대면서, 남편이라는 호칭은 어색한가?

약간의 틈을 발견한 기분에 나는 이안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기분 좋은 날인데, 최고 상사랑 그 부인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좋게 보이지만은 않을걸요. 둘이서 대체 뭘 하기에 나오질 않나 싶을지도 모르고……?”

흠칫, 이안이 표정을 굳혔다.

나는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이안의 눈매가 조금 더 굳는 것이 보였다.

“지금쯤 아래층에서 부하분들이 이 방 사정을 상상하고 있을지도요……?”

음험히 목소리를 낮춘 나는 이안에게 살짝 더 상체를 숙였다.

속닥이느라 나와 이안 사이엔 채 두 뼘도 남지 않았다.

“물론 부부로 보이는 데엔 좋겠지만, 너무 노골적이어도 민망하잖아요. 그렇죠?”

이안이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서 있는 나를 노려보았다.

음. 너무 대사가 도발적이었나?

선을 넘은 건 아닌지 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새삼 나와 이안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자각이 들었다.

주인장이 쓸데없이 은은하게 밝혀 둔 조명을 받아, 이안의 벽안은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예쁘다.’

불현듯 그런 감상이 머릿속을 적셨다.

동시에 경보음이 울렸다.

위험하다. 이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귓가에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 만큼 미친 듯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려던 때였다.

“……냄새.”

돌연 이마를 구긴 이안이, 떨치듯 고개를 모로 돌렸다.

냄새?

난데없이 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나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입욕제를 들이붓기라도 한 겁니까.”

내뱉듯 말한 이안이 벌떡 일어나더니 커튼을 젖혔다.

시원하게 들어오는 밤공기를 맞으며 나는 멍하니 내 머리칼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냥 은은한 정도의 장미 향인데?’

소드 마스터 정도 되면 후각도 예민해지나?

아무튼 다행이었다. 더 그대로 있었다간 괜히 발작하는 심장 소리를 들켰을지도 몰랐으니까.

커튼을 젖힌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북풍의 동토처럼 꽁꽁 언 표정으로.

……설마 진짜 들은 건 아니겠지?

“좋습니다. 그렇게 원한다면 내려가죠.”

“엇, 네? 정말요?”

하도 표정이 싸늘해서 다 튼 줄 알았는데, 뜻밖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안은 내 물음엔 대꾸도 않고, 홱 몸을 돌려 먼저 문간을 넘어 버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겠지.

‘이안과 도망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 조합이야.’

피식 웃으며 나는 이안의 뒤를 따랐다.

* * *

기사들로 가득 차 있는 식당은 떠들썩했다.

늘 근면 성실해 보이던 성기사들이 오늘만큼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다.

이해는 갔다. 승전의 밤이지만, 수많은 동료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도 클 테니까.

깊은 양가감정을 떨쳐 내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역시 술일 터였다.

“주인장! 여기 한 병, 아니. 열 병만 더…… 헉. 성녀님?”

“다, 단장님!”

“딸꾹.”

요란하던 식당은 이안과 내가 등장한 순간 정적으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슬금슬금 다가온 기사들이 내게 말을 붙여 오기 시작했다.

“승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단장님과 성녀님 덕분입니다.”

“암, 그럼요. 그때 성녀님을 안고 나오시는 단장님 모습이, 꼭 공주님 구출해 나오는 용사 같았다니까요.”

“어휴, 누가 사진 찍었으면 동화책 삽화 작가들 다 실직했을 겁니다.”

처음엔 이안의 눈치를 봤지만, 딱히 그에게서 제재가 없자 기사들은 조금씩 더 신이 나는 듯 목소리 톤까지 높아졌다.

“성녀님과 꼭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이런 자리가 생기다니 영광입니다.”

“하하, 죄송해요. 진작 말씀 나눠 봤어야 했는데, 이안 님이 도통 놔주질 않으셔서.”

“아, 헉.”

“그러셨군요. 크흠.”

기사들이 헛기침하더니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단장님도 참…… 흐, 흠.”

“무슨 건방진 생각을 하는 거지.”

이안이 얼음처럼 서늘한 얼굴로 헛기침한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생각 당장 꺼라.”

“아, 넵. 죄, 죄송합니다. 그저 너무 의외라는 생각에 놀라서…….”

“마, 맞습니다. 저희는 기, 기뻐서 그런 거지요. 단장님께서 이렇게 금실 좋은 부부가 되실 줄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하하하.”

다갈색 곱슬머리를 한 기사가 아부성 짙게 웃었다.

“그런데 이렇게 현숙하고 아름다우신 분과 혼인하시다니, 저희는 사실 정말 감격했었습니다.”

“현숙함과 아름다움뿐입니까. 리칼리온 같이 위험한 전장에 손수 강림하시는 것을 보고도 저흰 정말 감동했습니다.”

“성녀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생각에 저희도 훨씬 사기가 진작되었다고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네요.”

감당하기 버거운 칭찬 세례에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술잔만 들었다.

아니, 잠깐. 내가 마실 때가 아니라 이안이 마시게 해야 하는데.

“이안 님도 한잔하세요.”

나는 이미 차 있는 이안의 잔에 괜히 또 술병을 기울였다.

“전 됐습니다.”

“기분 좋은 날이잖아요. 그렇죠?”

내 술잔을 들어 올리며 나는 건배를 종용했다.

“아이, 손 아파요, 여보.”

애교스러운 말투에 이안이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이안을 마주 응시했다.

네 부하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그렇게 계속 날 노려볼 거야? 다들 저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구경하는데?

“하.”

짧게 내뱉듯 한숨 쉰 이안이 제 잔을 들어 올렸다.

정말로 순순히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는 얼른 이안의 잔에 내 것을 맞부딪혔다.

목 넘김이 아주 좋은 포도주였다.

나도 모르게 꿀꺽꿀꺽 잔을 비우자, 기사들이 신이 나선 새로 채워 주었다.

그럼 나는 질세라 이안의 잔을 또 채웠다.

정말 의외인 것은, 이안이 웬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그는 연신 술잔을 비워 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입욕제를 운운하던 순간부터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전투 뒤엔 감각이 예민해진다고들 했지.’

예민해진 감각을 술로 둔하게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안은 감각을 가라앉히고, 나는 둔해진 틈을 타 엘리엇을 찾으러 가고.

완벽한 윈-윈 작전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왜 안 취하지?’

벌써 다섯 잔째 넘기고 있는데도, 이안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달빛 같은 피부에는 전혀 붉은 기가 어리지 않았고, 눈빛도 언제나처럼 명징했다.

“흐하핫.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말했죠. 신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으리라!”

“크하학. 그거 멋지군!”

이안의 눈치를 보며 긴장해 있던 기사들도 하나둘 헤롱거리기 시작했는데, 이안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분명 술이 약한 설정일 텐데!’

이상했다.

나는 초조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이 이상 늦으면 나도 외출하기가 부담되는데.

‘주인장에게 더 독한 걸 가져다 달라고 할까?’

그렇게 고민할 때였다.

쿠당탕!

밖에서 요란한 소음이 울렸다.

“아이고, 저 녀석들이 또.”

주인장이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죄송합니다, 기사님들. 못된 놈들이 또 난동을 피우고 있나 봅니다요.”

헐레벌떡 주인장이 부엌으로 달려갔다. 거기 달린 쪽문으로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곧 뒷골목 쪽에서 주인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썩 꺼져라, 이놈들아! 또 몰려다니면서 못된 짓 하냐!”

“아, 아저씬 빠져 봐요. 지금 중요한 일 하고 있으니까.”

질풍노도의 십 대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무슨 일이지?

나는 고개 돌려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웬 불량배들이 건들거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핫! 이 자식, 진짜 악바리네.”

“가져가 봐! 가져가 봐!”

저건 뭐 하는 거지.

척 봐도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는 듯한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놔.”

그때, 낮게 긁는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귓전에 흘러들어 왔다.

“좋게 말할 때, 내놔. 내일 사지 하나씩 못 쓰게 되고 싶지 않으면.”

“으흐흐, 무서워라.”

“이깟 다 헐어 빠진 팔찌가 뭐가 소중하다고 그래? 꼴에 너네 엄마 유품이라 이거냐?”

팔찌? 어머니의 유품?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낡은 끈 팔찌. 그건 남주인공 엘리엇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제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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