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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161)

51화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나는 현재 트란셀로 향하는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리칼리온으로 가는 마차를 탔을 때와 다른 것은, 반대편에 앉은 게 조안 경 대신 다른 사람이란 점이었다.

“…….”

“…….”

숨 막히는 침묵에 나는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반대편에 앉은 사람의 터질 듯한 존재감 때문에 편히 쉬려야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계속……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슬쩍 시선을 돌린 나는 이안의 벽안과 마주하고 화들짝 놀랐다.

역시 날 쳐다보고 있는 거였어!

지그시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보고 있는 이안의 시선이 몹시도 무겁게 느껴졌다.

“흐, 흠.”

나는 헛기침을 해 보았다.

이대로는 숨 막혀서 못 살겠다. 아무런 말이라도 해 보자.

“리칼리온의 마수 잔당은 전부 처리된 건가요?”

“거의. 남은 잔챙이들은 후발대가 처리할 겁니다.”

“아, 넵.”

또 침묵이 흘렀다.

‘미치겠네. 차라리 자든가. 왜 날 저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야?’

사람 뺨이 시선에 뚫어지나 안 뚫어지나 실험 중이신가?

나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크, 흠.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셨어요. 인큐버스 왕을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하시다니요. 성기사 부대조차 전멸시킨 무시무시한 놈이었잖아요.”

“…….”

“그런 놈을 이안 님 혼자서 무너뜨리다니…… 정말 이안 님께선 신이 내리신 인재세요.”

이안은 여전히 날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서늘한 미소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아니. 그냥 아부한 것밖에 없는걸.’

아부하면서도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한다니, 이건 정말이지 부당했다.

“아이린.”

“넵?”

“앞으로 예지는, 최대한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끔벅였다.

“떠오르는 게 있어도 웬만하면 말로 표현하지 마십시오.”

“어째서요?”

“예지할 때마다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든 적은 없습니까?”

“예? 딱히 그런 적은…….”

나는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니 성녀들은 권능을 쓰기 전에 힘을 충전해야 한다는 묘사를 본 적이 있었다.

“아, 흐흠. 생각해 보니 조금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예지하지 않으면 제가 성녀라는 걸 누가 믿어 주겠어요?”

“믿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안이 살풋 미간을 찡그렸다.

“당신은 내 부인입니다. 그댈 의심하는 건 날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혹여 믿지 못하는 자가 있더라도 입 닥치고 있겠지요.”

“그, 그건 확실히 그렇겠지만요.”

여전히 납득이 안 갔다.

갑자기 예지를 하지 말라니?

오히려 예지를 왜 이렇게 안 하냐며 이안에게 진정성을 의심받진 않을까 걱정해 오던 나였기에, 이 말은 굉장히 뜬금없게 느껴졌다.

‘혹시, 이거. 황제 때문인가?’

문득 그런 가설이 떠올랐다.

현 황제의 부인 역시 성녀였다.

로렐라이 하르넨. 입은 상처를 무위로 돌리는 어마어마한 치유 권능의 소유자.

그녀를 황후로 둔 것은, 분명 라시드의 입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안의 부인인 내가 능력을 잘 쓸수록 이안의 입지 역시 늘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동생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라시드는 이안을 견제하겠지.’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알겠어요, 이안 님. 명심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하게 이안 님의 무능한 부인이 되어 드릴 테니까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 각오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나는 한 번 더 다짐하듯 말했다.

“하는 거라곤 먹고 자고 노는 것밖에 없도록 노력할게요. 잘할 수 있어요. 전 어렸을 때부터 성실한 한량이 꿈이었거든요!”

“……뭐.”

다소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이안이 제 미간을 문질렀다.

“당신이 노는 걸 많이 좋아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힘내라고 응원하면 됩니까?”

“괜찮아요. 응원 없어도 알아서 잘할 수 있으니까요!”

이안이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마치 신기한 생물이라도 보듯이.

‘내가 뭘 또 잘못 말했나?’

이번엔 또 뭘 잘못했는데.

시선을 이기지 못해 나는 괜스레 가방을 뒤졌다.

그 안은 델피나 아주머니와 리칼리온 마을 사람들이 싸 준 각종 빵과 과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을 씹으며 나는 이안의 존재감을 애써 무시했다.

트란셀까지의 여정이 생각보다 조금 더 고될 것 같았다.

* * *

트란셀에 도착한 나와 이안은, 성공적으로 마탑에 성마석을 넘겼다.

마법사들에게 성마석과 오랫동안 접촉했던 앨리샤의 몸에 나타났던 피멍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전하자, 모두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었다.

피멍이라는 대목에서 마력 과다 흡수 증세를 떠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속으로 마법사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성마석의 정체가 밝혀지면 당분간 이 탑의 마법사들은 잠도 못 자고 연구에 매진해야 할 터였다.

자신들의 미래도 모르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성심껏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트란셀의 거리로 나선 나는 어느덧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마석을 넘겼으니, 트란셀에서 남은 볼일은 이제 하나였다.

‘남주인공 찾기.’

돈 많아 이동이 수월한 사람들은 리칼리온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달아났겠지만, 남주인공 엘리엇은 그럴 여건이 될 리 없었다.

분명 이 도시 어딘가에서 엘리엇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속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물은 이안이었지만, 주인공 커플도 물론 좋아했다.

특히 남주인공 엘리엇의 성장 서사는 아주 눈물겨웠지.

그 장본인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문제는, 어떻게 찾느냐는 건데.’

나는 슬그머니 이안을 곁눈질했다.

정보 길드라도 찾아가 도움을 받고 싶지만, 이 사람이 옆에 있어서야 불가능했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냐며 무섭게 추궁하겠지.

어떻게 한담, 고민하는 와중 우리는 고급스러운 거리에 들어섰다.

‘여태까지 거리랑 느낌이 다르네.’

죽 둘러보니, 이곳은 고급 숙박업소만 모여 있는 거리인 모양이었다.

감상하듯 깔끔한 건물들을 구경하던 나는, 어느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내 시선이 멎은 여관은 ‘고양이 수염’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잠깐. 고양이 수염?’

저 특이한 가게 제목이, 왜 이렇게 눈에 익지.

몇 초간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곧 헉, 숨을 들이켰다.

‘기억났다.’

트란셀 최고의 고급 숙박업소 ‘고양이 수염’.

이곳의 주인장은 아주 인심 좋은 인물로, 요리하고 남은 음식들을 길거리 고아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곤 했다.

그리고, 남주인공 엘리엇 역시 그 수혜자 중 하나였다.

어차피 오늘 우리 일행은 트란셀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다시 수도로 출발하기로 했다.

기왕 묵는 거, 남주인공과 인연이 있는 곳에서 묵는 것이 당연히 나에겐 더 좋았다.

“흠, 이안 님.”

나는 얼른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희, 오늘 저곳에서 묵는 건 어때요? 굉장히 세련되어 보이는데요.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도 너무 좋고요. 와아, 정말 향기롭다.”

변명을 급조한 탓에 국어책 읽는 듯한 연기가 튀어나왔다.

수치심을 참으며 나는 애써 음식 냄새 맡는 연기를 이어 갔다.

이안이 그런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마차에서 그렇게 먹고도 아직 배가 고픕니까?”

“…….”

“뭐. 식욕이 왕성한 것도 어딘가에선 미덕이라더군요.”

마차에서 계속 먹어 댄 건 당신이 쳐다보는 게 어색해서였고!

그렇게 외칠 순 없었기에 나는 참을 인 자를 새겼다.

“하하. 성장기인가 봐요.”

“잘됐군요. 가서 드시면 되겠습니다.”

“네?”

이안이 ‘고양이 수염’의 정문을 가리켰다.

“이곳이 오늘 묵을 곳입니다.”

……원래 여기였어?

‘미리 말해 주지……!’

나는 거한 탈력감을 느끼며 ‘고양이 수염’ 안으로 들어섰다.

이안에게 헛소리를 한 건 창피하지만, 아무튼 원작에 나온 장소에서 묵을 수 있으니 잘된 거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세요!”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인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뛰쳐나왔다.

‘오. 이 사람이군.’

남주인공의 은인.

과연 주인장은 원작 속 묘사처럼 아주 인심 좋게 생긴 아저씨였다.

이미 도착해 있던 성기사들이 1층 식당에서 피로를 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우리를 발견한 성기사들이 잽싸게 일어나 예를 차렸다.

이안이 귀찮다는 듯 손짓하자마자 기사들이 얼른 도로 착석했다. 그 모습을 주인장이 경외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장 좋은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한층 더 싹싹해진 주인장이 우리를 안내했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곳입니다. 저희 여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방이지요.”

주인장이 안내한 방은, 당연한 일이지만 침대가 하나였다.

“원하신다면 밤에 악단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아주 낭만적인 밤이 되실 겁니다.”

주인장이 흐뭇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그럼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그 말만 남기고 주인장은 홱 방을 나가 버렸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위엔 장미꽃잎이 뿌려져 있었고, 충격적이게도 바닥엔 하트 모양으로 장식된 초들도 있었다.

“주인장께서…… 상당히 설레발을 치셨네요. 하하.”

“먼저 씻으십시오.”

“엥, 콜록, 네?”

당황스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사레가 들렸다.

이안이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안 씻고 누울 겁니까?”

“아, 음, 흠. 씻어야죠. 씻어야지요, 그럼.”

망할, 괜히 의식하는 걸 티 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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