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 *
“단장님! 무사하십니까!”
성당 문을 박차고 나온 이안에게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마수의 피와 체액으로 엉망이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는 없었다.
마수들이 모두 기사들과 싸우기보단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 발버둥 쳤기 때문이다.
그러던 놈들은 어느 순간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우적댔다.
그 순간에야 기사들은 일제히 깨달았다.
‘단장님이 해내셨구나.’
마지막으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이 마수들의 주인은 인큐버스 왕이라고 했다.
인큐버스는 상당한 고위 마수. 그런 그들의 왕이라면 강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인큐버스 왕을 필두로 마수들은 리칼리온을 급습해 성당에 자리 잡았다.
왕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본래라면 성기사단들을 궤멸시킬 만한 힘을 지니진 못했을 터.
하지만 성석을 삼킨 인큐버스 왕은 이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해졌다.
그를 따르는 마수들 역시 덩달아 끔찍하도록 강해지고 말았다.
그런 마수들이 휘청인다는 것은, 그들의 주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해치우셨군요, 단장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인큐버스 왕의 수급을 들고 나올 줄 알았던 이안은, 대신 한 여인을 두 팔로 안고 나왔다.
그 모습에 기사들이 기함했다.
“헉, 성녀님께서……!”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이안의 품에서 축 늘어진 여인이 누군지 알아본 기사들이 경악에 빠졌다.
“비켜라.”
이안이 내뱉듯 명령했다.
전에 없이 낮게 깔린 목소리에 기사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주변에 안전한 곳은 찾았나?”
“그것이, 단장님. 희소식입니다. 수색대가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동굴을 찾아냈습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리로 가겠다.”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기사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안내했다.
“예, 단장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안은 걸음을 옮기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린을 담은 청색 눈빛은 복잡한 심정을 띠고 있었다.
‘죽어 버려.’
그 말 한마디에, 인큐버스 왕이 무너져 내렸다.
‘언령.’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끔 하는 신화 속의 능력.
‘간혹 신의 사랑을 타고난 이들이 행하곤 했다는…….’
아주 오래전, 전설 속 예지의 성녀인 재스퍼 역시 그 능력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성검에 당해 약해져 있었다곤 하나 그래도 왕은 왕.
그 강대한 마수를 여자는 말 한마디로 거꾸러뜨린 뒤, 평온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성녀, 라…….’
이안은 잠시, 물끄러미 아이린을 내려다보았다.
꼭 감긴 눈은 꿈을 꾸듯 편안해 보였다.
사실 이안은 그녀가 성녀라는 것을 완벽히 확신하진 않았다.
증거는 명확했으나 기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치명적인 것을 숨기고 있다는, 본능이 속삭이는 의심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 그레이스가 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과연 축복일까?
“……아이린.”
살짝 고개 숙인 이안이 그녀에게만 닿도록 낮게 속삭였다.
강한 힘은 그만큼의 반작용이 따른다.
이안은 말 한마디로 인큐버스의 숨통을 끊자마자 아이린이 기절하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쓰러지던 모습을.
“당신의 힘은, 다시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 모습에 왜 심장이 멎을 듯 철렁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럴 필요 없도록 할 테니까.”
속삭임을 마친 이안은 아이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알아듣기라도 한 듯, 아이린의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 * *
“으윽…….”
정신이 들자마자 두통이 몰려들었다.
‘뭐야, 이건. 어제 술 먹고 잤었나……?’
강한 숙취처럼 속이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잠깐. 어제 뭘 하다 잠들었지?’
흐릿한 머릿속을 뒤지던 나는 곧 번쩍 눈을 떴다.
“그 악마 놈!”
마지막으로 보았던 악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분명 이안과 함께 그놈을 상대하고 있었다.
기억이 뚝 끊긴 걸 보니 정신을 잃었던 것 같긴 한데,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긴 지금 어디지?
“아이린 님. 괜찮으십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 돌리자 조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계속 누워 계십시오.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조안 경…… 여긴 대체 어디죠?”
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곳이었다.
사방이 까만 바위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동굴처럼.
가장 묘한 것은, 까만 바위 군데군데가 형광 초록빛으로 발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전지대입니다. 생존자들이 마수를 피해 이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네? 정말인가요?”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녀님이 깨어나셨어?”
“쉿, 조안 님과 이야기 나누고 계셔.”
“우와, 진짜 성녀님이다…….”
고개 돌린 나는 흠칫 놀랐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의 눈동자가 반딧불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앗, 이쪽을 보셨어.”
“너무 귀엽게 생기셨다.”
“얘, 성녀님께 실례되는 말이야.”
“헉, 들으셨으려나?”
네. 엄청 잘 들린답니다.
나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조안 경. 저 사람들이…….”
“네. 리칼리온의 생존자들입니다.”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는 생존자들은, 자기들끼리 안전지대를 찾아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안 경, 경의 가족분들은 혹시?”
내가 조심스레 묻자, 조안 경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찾았습니다.”
“정말인가요!”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에요.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이린 님.”
조안 경이 고개 숙였다.
“엘룬 신께서 성녀님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뭘 했다고.”
생각해 보면 난 정말 한 게 없었다.
기도야 나일론 신자가 속으로 몇 마디 중얼거린 것뿐이었고, 성당에서도 그랬다.
악마를 상대한 건 이안이었다. 나는 그의 등 뒤에 숨어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 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사실 그냥 정신 사납게만 했을 거다.
“이안 님은 괜찮으신가요?”
“단장님께서는 방금 전까지 아이린 님의 곁을 지키셨습니다.”
“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바쁜 인간이 내 옆을 지켰다고?
왜? 쉬고 싶었나?
“아이린 님께서 쓰러지셨다는 것은 기억하시지요?”
조안 경이 걱정이 배인 목소리로 물었다.
“단장님께선 아이린 님의 몸에서 성력이 많이 빠져나갔을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네? 제 몸에서 성력이? 왜죠?”
지레 찔린 내가 물었다.
내 몸에 그런 거룩한 게 존재한다고?
“자세한 것은 단장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인큐버스 왕과 가까이 접촉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
하긴. 강대한 마수이니 내 몸에 정말 어떤 영향을 끼쳤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한번 쓰러지기 전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아이린 님이 정신을 잃으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 악마 놈을 떠올렸다.
생긴 건 예쁘장했지만, 그래 봬도 그놈은 대악마였다.
‘아파, 너무 아파요……. 제발 도와주세요.’
불현듯 악마가 애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대악마를 그 지경으로 만들다니. 새삼 이안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그 뒤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니 이안이 악마를 끝장낸 거겠지.
‘역시 까불지 말자.’
여느 때와 같은 다짐을 한 나는 조안 경을 돌아보았다.
“그럼 이안 님도 무사하신 거죠?”
“예. 단장님께선 완전히 무사하십니다. 지금은 전투대와 함께 잔당들을 처리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걱정되지 않았다. 성검을 부메랑처럼 던지던 모습을 떠올리면 더더욱.
“조안 경, 조안 경의 가족분들은 지금 이곳에 계시나요?”
“아. 근처에 있습니다.”
“가족분들에게 가 보세요. 저 때문에 여기 묶여 계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누나!”
그때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데런. 이쪽은 안 됐다고 했지.”
조안 경이 표정을 엄하게 굳혔다.
내가 봐도 찔끔할 정도로 무서운 표정에, 데런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가 울상을 지었다.
“누나, 하지만, 앨리샤가…… 앨리샤가.”
“앨리샤가 왜.”
조안 경의 눈빛에 순간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앨리샤가 점점 숨을 못 쉬어. 이상하게 헐떡거리고…… 열도 심해져. 흐윽, 어떡해?”
“조안 경, 어서 가 보세요.”
나는 다급히 말했다. 조안 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아이린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실례라뇨. 어서 동생에게 가 보셔야죠.”
서둘러 조안 경을 보내려던 때였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조안, 너희 막내 상태가 점점 나빠지나 봐. 쯧…… 어린아이가 겪기엔 너무 큰 고생이었던 거지.”
“그래도 다행이다. 여기 성녀님이 계시잖아.”
“그러게. 정말 다행인 일이지. 기적이나 다름없어.”
‘……으응?’
나는 이상을 감지하고 슬그머니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경외감과 기대 어린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조안이 여길 찾아낸 것도 성녀님께서 기도해 주신 덕분이래.”
“정말 거룩하신 분이야.”
나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이거, 내 어깨에 굉장한 무게가 얹혀 있는 것 같은데.
모두 내가 앨리샤란 아이를 고쳐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흐흠, 조안 경.”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가서 기도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수밖에.
“앨리샤란 아이, 많이 심각한가요?”
“괜찮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같이 가요.”
내 부탁에 조안 경이 고개 저었다.
“성녀님께선 더 무리하셔선 안 됩니다.”
“어차피 저라고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기도하는 것뿐. 그 정돈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조안 경이 망설이는 눈을 했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선수를 쳤다.
“자, 얼른 움직이죠. 저기, 데런이라고 했니?”
데런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가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네…… 성녀 누나.”
“앨리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렴.”
“네!”
데런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우리는 앨리샤가 누워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쓰러져 있는 앨리샤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응?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의아한 눈을 했다.
자세히 보니 앨리샤의 몸 위로, 사람들이 웬 초록색 광석 같은 것을 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