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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8/161)

48화

“이, 이안 님. 혹시 지금 그게 제 옆에 있나요?”

공포에 목 졸린 목소리를 내며 내가 말했다.

적이 투명하다고 생각하니 배는 무서웠다.

나는 이런 종류의 괴담에 몹시 약하단 말이야.

“호, 혹시 지금 제 머리 위를 지나고 있다거나…….”

겁에 질려 속닥거리며 나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안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기하군요.”

“뭐, 뭐가요?”

“그래도 명색이 성녀인데 전혀 마기를 못 느낀다는 게.”

콜록.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내 정곡을 찌른 이안이 무심히 중얼거렸다.

“뭐. 그쪽이 속 편해서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대꾸할 새도 없이 이안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 검 끝은 나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내 뒤편을 향해.

“아이린.”

이안이 내게 검을 들지 않은 쪽 손을 내밀었다.

부리나케 달려간 나는 이안의 등 뒤로 냅다 숨었다.

내가 제 등 뒤로 이동하자, 이안이 들어 올린 검으로 허공을 그었다.

‘뭐지?’

의아함은 잠깐이었다.

이안의 검이 지나간 자리로, 마치 허공이 찢겨 나간 듯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허, 헉…….”

놀라운 광경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벌어진 허공의 틈새로 어두운 빛이 새어 나왔다.

“킥킥. 크흐흐흑.”

그 사이로 괴상한 소리가 함께 흘러나왔다.

마치 웃음소리 같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동시에, 찢긴 허공의 틈 사이로 무언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팔찌 위 보석에 손을 댄 채 온몸을 긴장시켰다.

‘발록이 있다고 했어.’

나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악마.

그 무시무시한 위용을 각오하며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기어 나오는 것의 형체가 점점 더 뚜렷해졌다.

곧 완전히 밖으로 몸을 드러낸 놈의 모습은…….

‘응?’

거대한 대악마를 각오했던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허공 틈새로 기어 나온 것의 정체는, 웬 젊은 남자였다.

그것도 굉장히 반반한.

“아, 하필 남자가 왔네. 짜증 나게.”

미청년의 모습을 한 악마가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목소리 역시 완전히 인간 같았다.

“어? 아니다. 취소. 여자도 있잖아?”

미청년 악마가 이안의 뒤에 숨은 날 발견하더니 눈을 반짝였다.

“안녕! 귀엽게 생겼네. 나 아가씨랑 얘기할래. 미남은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 난단 말이야.”

미청년 악마가 활짝 날개를 펴더니 내게 날아오려 했다.

히이익.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한 손으론 팔찌를 필사적으로 움켜쥔 채.

이안의 검 끝이 악마를 향했다.

“까불지 마. 라케이아는 토해 내게 한 뒤에 죽이고 싶거든.”

“헤엑. 무서워라. 인간 주제에 감히 이 인큐버스 왕님께 뭐가 어째?”

잠깐. 인큐버스?

그 이름이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유명했으니까.

분명, 자는 사람의 꿈에 파고들어 정기를 빨아 먹는다는 몽마.

특히 이성을 유혹하는 데에 특화된 악마였다.

“하핫. 그 뒤에 아가씨는 갑자기 내 눈을 피하네? 혹시 무서워? 나한테 홀릴까 봐? 응?”

기고만장해하는 꼴이 아니꼬웠으나,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래 봬도 놈은 유혹엔 도가 튼 악마다. 명성에 비해 그렇게까지 미모가 대단한 줄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터였다.

“눈 마주치지 마십시오.”

이안이 내게 속삭였다.

“당신은 유혹에 약하니까.”

“…….”

이거, 이안에게 크게 신뢰를 잃은 듯한 기분이 든다.

“잠깐. 나 너 알아.”

그때 악마가 동그래진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은발에…… 인간. 소드 마스터. 저 얼굴에 아직까지 동정.”

헉. 이안의 중요한 비밀을 떠벌리다니!

나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행히 성당 안엔 나와 이안뿐이었으므로, 이안이 아직 순결남 속성을 간직하고 있음이 폭로되진 않았다.

하마터면 그날 나와 이안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는 걸 들통날 뻔했다.

“너, 이안 에스테반이구나. 그렇지?”

악마가 킥킥대며 입술을 핥았다.

“선황이 가장 사랑한 아들.”

“…….”

어떤 말에도 꿈쩍 않더니, 선황에 대한 이야기에 이안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는 대꾸 없이 검을 휘둘렀다.

실체화된 검기가 살벌히 허공을 갈랐으나, 악마는 가뿐히 뒤로 뛰어 피했다.

“벌써 성기사단장님이 행차하셨네. 너무 날뛰었었나? 하하…….”

순식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안이 검을 휘두르면 악마가 피했다.

날렵한 체형답게 악마는 요리조리 잘도 도망 다녔다. 싸움에 대해 모르는 내가 봐도 도망치는 실력은 감탄이 나올 만큼 대단했다.

‘대체 뭐야?’

더 이상한 건, 분명 검이 명중했는데도 악마가 타격을 입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검에 맞은 부위는 그대로 보랏빛 연기처럼 스러졌다. 악마가 낄낄대며 도망치면, 그 부위가 처음 보았던 건 환상이었다는 듯이 자라나는 식이었다.

“있잖아. 편애받는 건 어떤 기분이었어?”

도망 다니며 악마가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태어날 때부터 잘난 건 어떤 기분이야? 네가 하는 것 절반도 못 하는 형을 보면서 한심했어? 몇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네가 훨씬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웠지?”

놈은 정말 쉬지 않고 헛소리를 떠벌렸다.

이안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악마가 시시하다는 듯 입을 삐죽이더니, 곧 눈을 빛내며 웃었다.

“아, 그래. 다 썩고 부패한 아버지 시체를 끌어모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어?”

놈이 사특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조각난 아버지 시체를 몇 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찾았었잖아. 시체 조각을 끌어모으면서, 울었어? 아니면 아버질 죽인 사람도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고 복수를 다짐했어?”

나는 꾹 주먹 쥐었다.

저놈은 역시 악마였다.

상대의 가장 내밀한 기억을 파고들어 들쑤시는 것이, 구역질이 날 만큼 비겁했다.

“내가 도와줄게. 네 복수 말이야. 아주 화끈하게 도와줄 수 있어.”

악마의 목소리가 마치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 기이하게 울렸다.

“다 죽여 버리자. 응? 패륜한 친형도, 그걸 도와준 성녀도…… 다 쓸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네가 황위에 앉자! 모두 네 이름을 칭송할걸?”

악마가 아무리 나불대며 유혹해도 이안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툭 뱉었다.

“깡총깡총 짜증 나는군.”

챙그랑.

이안이 멀리 바닥에 검을 내던졌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값비싼 검이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광경을 목격했다.

“어? 뭐야? 드디어 나랑 무기 없이 이야기해 볼 마음이 생겼…….”

악마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안이 빈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마치 검을 뽑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잠시 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것도 없었던 이안의 손에서 눈부신 장검이 마치 돋아나듯 자라났다.

악마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젠장, 저건 또 뭐야.”

여우처럼 속살거리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확 깔렸다.

나는 반쯤 넋을 놓은 채 이안의 검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한손검이었으나, 이전의 검과는 모든 게 달랐다.

새하얀 검신은 순백색 섬광을 두른 듯 빛이 났고, 황금을 부어 만든 것 같은 칼자루의 크로스 가드는 내가 본 어떤 조각보다 아름다웠다.

‘저게 진짜 성검이구나.’

이안이 평소 아공간에 보관 중인, 선황에게 물려받은 유일한 유품.

‘원작에서도 본 적 없었는데.’

이미 흑화해 최종 보스가 된 이안이, 주인공 커플을 상대로 성검을 뽑아 들려 했던 묘사는 있었다.

그때 이안은 성검을 뽑는 데 실패했었다. 이미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이안은 마치 제 수족처럼 자연스럽게 성검을 다루고 있었다.

악마에게 성검을 겨누는 이안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성화 같았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서 역겨운 걸 꺼내 들어선.”

악마가 이를 갈았다.

여유롭던 여태까지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어투였다.

이안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악마가 살랑거리던 날개를 확 펼쳤다.

“칫…… 짜증 나게. 아직 소화는 덜 됐지만, 어쩔 수 없지.”

‘어어? 지금, 저거…….’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나는 크게 악마에게 손가락질했다.

“저 자식 도망쳐요!”

내 외침이 끝나기도 전 악마가 날아올랐다.

진보랏빛 날개가 크게 퍼덕이며 악마의 몸이 단숨에 비행했다.

“날아간다!”

비겁하게 도망을 치다니!

나는 어쩔 줄 모른 채 계속해서 삿대질만 했다.

저기요! 저기! 같은 소리만 헛되이 뱉으며.

“고맙습니다.”

이안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 목소리 끝엔 어쩐지 웃음기가 묻어 있는 것도 같았다.

“부인의 손가락질 덕분에 과녁이 쉽게 보이는군요.”

“지금 농담이 나오…… 으악!”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이안이 제 성검을 냅다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성검은, 날아오르던 악마의 날개에 정확히 명중했다.

“까아아악!”

악마가 섬뜩한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이안이 부메랑처럼 내던진 성검을 바라보았다.

‘던…… 던졌어. 수백만 마르스로도 못 살 명검을.’

성검이 날개에 꽂힌 채, 악마가 비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아파…… 제기랄, 아파.”

악마가 헐떡거렸다.

이런 아픔은 난생처음 겪는 듯, 그의 눈동자엔 공포와 혼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왜 내가 이런 취급을…… 허억, 아파. 이렇게 아프다니.”

악마가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성검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기운이 그런 악마의 몸을 그물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도…… 도와줘.”

악마가 더듬거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머지않아 그의 시선이 내게 멎었다.

“도, 도와줘. 도와주세요.”

나는 흠칫 몸을 굳히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내가 마치 마지막 보루라도 되는 듯, 악마가 성검에 꽂힌 채 내게로 기어 왔다.

“아파…… 누나, 너무 아파요. 제발 도와주세요, 네? 꼭 보은할게요. 라스펠은 아픈 거 싫어…….”

무릎걸음으로 기어 오며 악마가 애원했다.

“무서우니까 그렇게 내려다보지 마세요. 도와만 준다면 라스펠, 뭐든지 할게요. 주인으로 섬길게요. 제 진짜 이름을 아셨으니 주인님은 이제 절 소유하실 수 있어요. 저와 주종계약을 맺어요. 저 뭐든지 할 테니까…… 네? 살려 주세요.”

물기 맺힌 악마의 눈이 사특하게 번쩍였다.

촉촉이 젖은 보랏빛 눈동자는 꿈에 나올 듯 요사스러웠다.

웬만한 이라면 단숨에 홀려 버렸을 만큼 그 광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저 질린 눈으로 악마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악마가 괴로워하면 괴로워할수록 더 역겨워졌다.

이 악마는 리칼리온을 순식간에 궤멸시켰다.

민간인들을 해치고, 비호하기 위해 달려온 성기사단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비록 이안에게 어이없이 당하긴 했지만, 그건 이안이 몇 세기에 한 번 나올락 말락 한 괴물이기 때문일 테고.

이 악마 역시 실은 굉장한 고위 악마였을 것이다. 그만큼 셀 수 없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겠지.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다며 애써 표정을 관리하던 조안 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고, 남겨진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긴 주제에.’

고작 제 몸뚱이 하나의 고통에 저렇게도 절절매는 꼴이라니.

나는 밀려오는 혐오를 담아 중얼거렸다.

“죽어 버려.”

순간, 악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악마의 보랏빛 눈동자가, 이윽고 죽음의 고통으로 붉게 물들었다.

“허…… 허억. 끄, 끄아아악!”

공기를 찢는 듯한 단말마가 귀청을 울렸다.

동시에, 악마의 몸이 마치 모래처럼 허물어 내렸다.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악마가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악마가 있던 자리에는 이안의 성검과, 악마가 삼켰던 성석 라케이아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함과 동시에.

‘어……?’

시야가 까무룩 저물었다.

나는 내 몸이 기우뚱 쓰러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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