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 *
성기사단 행렬이 리칼리온 초입에서 멈춰 섰다.
저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겉보기엔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창공을 날아다닌다던 마수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느 굴뚝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 위화감이 등골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여기부터 대형을 갖춰서 들어간다.”
내가 탄 마차 바로 앞에서 말을 타고 있던 이안이 안장에서 내리며 말했다.
성기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대열을 갖췄다. 이안은 그들에게 무감정한 얼굴로 지시했다.
“놈들에게 날개가 있는 것을 잊지 마라. 항상 하늘을 경계하고,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말도록.”
“예, 단장님!”
“그리고, 조안.”
이안의 호명에 조안 경이 한 발자국 나섰다.
“예, 단장님. 하명하십시오.”
“경은 수색대로 편입되었다.”
“…….”
조안 경이 드물게도, 한 번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커진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잠시 뒤 조안 경이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그 얼굴엔 희미한 안도가 번져 있었다.
내 곁에만 붙어 다녀야 했던 호위 기사에서 벗어나, 직접 가족들을 찾으러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조안 경의 행운을 빌었다.
부디 가족들을 구할 수 있길.
“……이린. 아이린.”
헉. 깜짝이야.
조안 경을 살피느라 이안의 목소리를 못 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이안을 돌아보았다.
“넵, 부르셨어요?”
“어디에 그렇게 신경 쏟는…… 아닙니다. 내 곁으로 오십시오.”
“예?”
이안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제 옆자리를 향해 고갯짓했다.
“부인께선 나와 함께 갑니다.”
“예?”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 끝이 꺾였다.
“뭘 놀라십니까? 설마 내가 당신을 호위 기사 없이 마수들 사이에 내버려 둘 거라 생각하진 않았을 테고.”
“안 그래도 그 점에 대해 말씀드리려 했었는데요.”
나는 이안에게로 바짝 다가가 속닥거렸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제가 이 근처 마을에 볼일이 좀 있어서요. 이주 중요한 볼일이요. 이안 님께서 마수 놈들을 처리하시는 동안, 전 잠시 그 볼일을 보고 와도 될까요?”
“볼일?”
이안이 서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도 두고 온 애인이 있습니까?”
“네? 아니에요! 무슨 그런 오해를! 그게 아니라, 정말 개인적으로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위험해서 안 됩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 하지 마십시오.”
“하, 하하…… 그렇지만 이안 님은 엄청 바쁘시잖아요? 저 같은 게 혹으로 달려 있어도 될까요?”
“모래주머니 달고 뛰는 훈련은 실컷 해 봤으니 괜찮습니다.”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빈틈이 조금도 없었다.
이래서야 정말 마수들 소굴에 함께 들어가게 생겼다. 나는 다급히 속닥거렸다.
“어차피 전 있어 봤자 도움도 안 되잖아요!”
“왜 안 됩니까? 거룩하신 성녀가 전장에 함께해 주는데. 이만한 사기 진작이 또 있겠습니까.”
거룩한 성녀는 무슨!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본 나는,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 눈빛들은 하나같이 경외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으윽.’
심한 부담감을 느끼며 나는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저 마수들 소굴에 함께 들어가고,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안 죽게 잘 부탁드립니다.”
체념한 내가 이안에게 꾸벅 인사했다.
머리 위에서 픽 웃음소리가 들렸다.
“죽게 안 두니 걱정 마시죠.”
저 불량한 말투에 지금만큼은 목숨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지.
나는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저래도 명색이 최강의 기사단장이니, 나 하나쯤은 지켜 낼 수 있을 거다.
* * *
“흐아아아악!”
나는 최강의 성기사단장의 목덜미에 매달린 채 흉하게 비명 질렀다.
사람만 한 박쥐가 우리에게로 달려들다 뒤에서 날아온 한손검에 가슴이 찢겼다.
이안은 박쥐 마수의 시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앞을 향해 달렸다.
“귀청 떨어지겠습니다.”
이안이 툭 핀잔했다.
나는 그의 목덜미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안긴 채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죄, 죄송해요. 제가 이런 건 정말 처음이라, 흐읍. 지금 기절할 것 같거든요, 허억.”
약한 소리가 아니었다.
현재 나는 이안에게 안긴 채 리칼리온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언뜻 밖에서 보기엔 평화로웠던 도시였지만, 그 내부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거대한 뿔과 날개를 지닌 발록들.
증오와 무질서로 빚어졌다는 그 피조물들이 당장이라도 우릴 찢어발길 듯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이건 4D 게임이다. 이건 4D 게임이다.’
스스로를 세뇌하려 무던 애를 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끼아아아악!
귀청을 울리는 마수의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흐으으윽.”
엉금엉금 매달리는 나를 이안이 성가신 듯 고쳐 안았다.
“이제 곧입니다.”
“지, 진짜죠. 믿을게요. 저 진짜 믿어요.”
제발 이 공포를 끝내 줘……!
머지않아 도시 정중앙에 위치한 순백색 건물이 눈에 띄었다.
‘성당이다.’
우리의 목적지였다.
안도하려던 나는 곧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세히 보니 성당 주변을 시꺼먼 마수들이 빙 둘러선 채 호위하고 있었다.
“이, 이제 어떡하죠.”
마수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패닉에 빠진 나와 달리 이안은 당황 하나 엿보이지 않는 얼굴로 명령했다.
“길을 터라.”
“예!”
길이 막혀 있으니 뚫어라.
참 단순 명료한 명령이었다.
그 간단한 명령을, 엘룬교의 최정예 부대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최고의 전력인 이안이 나를 보호하느라 빠져 있는데도, 전황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이대로라면 리칼리온 수복은 문제없는 거 아냐……?’
뭔가 이상했다.
성기사 부대를 몰살시키고 리칼리온을 폐허로 만든 재앙이, 정말 이것으로 끝인가?
스멀스멀 불안감이 치고 올라올 무렵, 이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어갈 겁니다.”
그 예고에 나는 이안의 어깨를 꽉 쥐었다.
“가, 갑시다.”
최종 보스가 들어 있는 던전 문을 열 듯 긴장감이 느껴졌다.
분명, 저 성당 안에 무언가 있다.
‘그러니 마수들이 이렇게 악다구니를 써 가며 지키고 있겠지.’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켰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만 해도, 설마 이런 현장에 뛰어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로맨스’ 판타지인 줄 알았지. 로맨스 ‘판타지’가 아니라!
“괜찮을 테니 그만 떠십시오. 실신하겠습니다.”
“실신이라뇨. 전 아, 아무렇지도 않아요.”
억지로 태연한 목소리를 내는데 이안이 중얼거렸다.
“아니, 차라리 그편이 더 편하려나.”
“지금 뭐라고 하셨― 꺄악!”
말을 맺기도 전 이안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칼바람이 뺨을 스쳤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뛰쳐나간 그는 순식간에 성당 문을 돌파해 들어갔다.
“흐으으으.”
성당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수치도 잊고 이안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분명 밖을 수호하고 있는 마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 거다.
끼이익, 쿵!
우리 뒤로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틀어 실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
내부는 아름다웠다.
수도의 대성당만큼은 아니었지만, 벽에 새겨진 거룩한 조각과 성화, 스테인드글라스가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비록 전투의 흔적이 남아 이곳저곳 부서져 있긴 했지만.
그런데 마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뭐…… 죠?”
나는 숨죽여 속닥거렸다.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더 불안했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앞, 뒤는 봐도 천장은 보지 말라던 괴담이 떠올랐다.
움츠러든 채 천장을 올려다봤지만, 그곳 역시 마수는 없었다.
“왜 아무것도 없죠?”
“있습니다.”
“이, 있다고요? 어디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이안에게 더 바싹 매달렸다.
“제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호, 혹시 투명……? 투명한 마수인가요?”
“투명? 환상 소설을 너무 보셨군요.”
아니, 당신이 그 환상 소설 속 등장인물이신데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이안이 말했다.
“이제 내려놓겠습니다.”
“헉, 저를요? 어, 음…… 네. 조심히 부탁드려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 때만 해도 이안에게 안겨 있는 게 꽤나 수치스러웠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젠 땅으로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안겨 있는 이 품은 원작 설정상 최강의 무력을 지녔으니까.
간만에 밟는 땅이 약간 어색했다. 두 다리로 선 채 나는 성당을 둘러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 보이네요.”
“따라오십시오.”
“우, 움직이나요?”
이안은 거침없이 성당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우리는 웅장한 성당 제일 안쪽, 단상 위까지 올라갔다.
평소에는 이곳에서 주교가 수많은 신도를 앞에 둔 채 설교했겠지.
단상 뒤에는 척 봐도 몹시 성스러워 보이는 성배가 있었다.
‘아. 이거 대성당에서도 봤던 거다.’
성녀 검증 절차를 거쳤을 때 봤던 그 성배와 흡사한 성배였다.
비록 디테일은 수도의 대성당 쪽이 더 대단했지만, 이쪽 성배 역시 아름답기는 했다.
성배를 내려다본 이안이 짧게 내뱉었다.
“역시 없군.”
“네? 뭐가요?”
“성석 라케이아.”
이안이 성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대성당에서 보았던 것도 그렇고, 보통의 성배엔 굉장히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이 성배엔 그런 것이 없었다.
“없어진…… 건가요?”
나는 겁에 질려 속삭였다.
누군가 혼란을 틈타 훔쳐 간 것일까? 아니면 마수가 파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안이 깔끔한 답변을 내놓았다.
“흡수한 겁니다.”
“네? 누가요?”
나는 얼떨떨히 되물었다.
팔았다고 하면 백번 양보해서 이해가 되지만, 흡수했다니?
이안이 허공을 가리켰다.
“이 안의 존재가.”
“예?”
“일반적인 마수에게는 성석이 치명적이지만, 고위 마족에겐 오히려 진화의 수단이 됩니다.”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백한 어조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은 건, 소화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자기 부하들이 우릴 처리하길 기대하고 있겠지만.”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지은 이안이 제 검을 빼 들었다.
“그럴 일은 없으니 시간 낭비 관두고 나오지 그래.”
허공을 향해 도발하는 이안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랑 싸우고 있는 거야, 당신……!’
허공을 겨눈 이안의 검이 기이잉, 기묘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성석으로 벼른 성기사단원의 검은 마기를 감지한다고 들었다.
즉, 검이 반응한다는 건 가까운 곳에 마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저렇게 검이 바르르 떨 만큼 엄청난 마수가.
‘역시 투명 마수 맞잖아.’
나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