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 *
“하아아.”
“어이, 후배. 땅 꺼지겠어. 아까부터 웬 한숨이야?”
황실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은 채 거대한 원반을 이리저리 측량하던 마도공학자들이 대화를 나눴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걱정이 돼서요…… 친구에게서 도통 소식이 없네요. 요즘 마수들 수가 늘어나서 걱정이라는 편지가 마지막이에요.”
“음. 그건 걱정될 만하군.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리칼리온입니다. 서쪽 국경 도시예요.”
“아이고, 멀구만. 한번 가 보기도 힘들고 고민이겠어.”
선배 마도공학자가 쯧쯧 혀를 차자, 후배 마도공학자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네. 그냥 일이 바빠서 답장을 못 하고 있는 거라면 좋겠지만…… 으. 이번 달에 휴가 좀 낼 수 있을까요?”
“위에 결재 올려 봐. 허가 날 거야.”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도 슬슬 휴가 내실 때 되지 않으셨어요?”
“그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일이 계속 쌓이니 좀 눈치가 보여야지.”
선배 마도공학자가 팩 한숨을 뱉었다.
“오늘도 말이야. 멀쩡한 게이트는 왜 조사하라는 거야? 월초에도 안전 검증 다 거쳤잖아.”
“그러게요. 하지만 황실에서 직접 내린 명령이니 어쩔 수 없죠.”
“그렇지. 까라면 까야지. 그것도 황자 전하께서…… 아니.”
선배 마도공학자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성기사단에 입단하며 사실상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 이후, ‘황자 전하’라는 호칭은 금기어와 비슷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도 황실에 오래도록 몸담은 이들은 간혹 이안에 대한 호칭을 헷갈리곤 했다.
‘황실 예복이 그렇게까지 잘 어울리는 분도 또 없었으니까…… 에이. 이런 생각도 해서 뭐 해.’
선배 마도공학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흠. 이안 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인데 우리가 어쩌겠나.”
“그래도 좀 불합리한 면이 있기는 합니다!”
내내 묵묵히 측량하던 또 다른 마도공학자가 돌연 불만을 토했다.
“이런 일에 전문가는 우리 아닌가요? 애초에 막 부름받은 성녀 한 분 말만 믿고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돼서 개고생해야 하다니!”
“어허. 소리가 크다.”
“다 각자의 분야가 있는 건데 말입니다. 우리도 교단에서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한 적 없지 않습니까? 아니, 대체 퇴근 시간에 불려 와서 이게 뭔 고생…… 응?”
불만을 토로하던 마도공학자의 말이 뚝 끊겼다.
“어? 이게 왜…… 이럴, 이럴 리가 없는데.”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서, 선배님. 이리 좀 와 보십시오.”
마도공학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선배를 불렀다.
게이트에 흐르는 마력을 측정하던 측량기가 어느 지점에서 이상 수치를 보였다.
마력 양을 알리는 계기판 속 바늘이 최대치를 가뿐히 넘고서도 더 넘어가려 바들거리고 있었다.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이게 왜.”
“젠장.”
수치를 확인한 선배 마도공학자가 헛숨을 들이켰다.
“다들 물러나. 일단 게이트에서 물러나라!”
순식간에 마도공학자들이 꼬리에 불붙은 토끼들처럼 달아났다.
“마탑! 마탑에 연락해요! 누군가 마력 중화제를 좀 구해 와!”
“비상이다! 비상!”
게이트 관리소가 아비규환 같은 혼란에 휩싸였다.
* * *
돌아본 곳에서는 여우상으로 생긴 미청년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리, 허흠. 모나한 남작님?”
레이 모나한의 모습을 한 리젤로가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마탑주는 진짜 간도 크네.’
변장한 채로 대성당을 잘도 쏘다니는구만.
배짱에 감탄하며 나는 리젤로에게로 다가갔다.
결혼식 때와는 달리, 이번엔 그의 등장이 알맞은 타이밍으로 느껴졌다.
“마침 잘되었어요, 레이 님.”
“절 이렇게 반가워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저야 항상 레이 님이 반갑죠.”
썩다 만 미소를 걸치며 나는 입발림 소리를 했다.
“조안 경, 잠시 레이 님과 대화를 나눠도 될까요?”
“기다리겠습니다.”
조안 경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리젤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소리가 왜곡되는 그 결계, 지금도 발동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리젤로가 귀여운 척 검지를 들어 올렸다.
“짠. 이제 됐어요.”
“……좋아요.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 인사부터 한 나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혹시, 사람도 찾으시나요?”
“하하.”
사람 좋게 웃으며 리젤로가 말했다.
“마탑은 정보 길드가 아니랍니다, 레이디.”
“그래요? 고객을 위한 서비스라면 뭐든 파는 곳이 마탑 아니었나요?”
리젤로가 잠시 말없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그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거 마음에 드는 문구인데. 슬로건으로 써도 되나요?”
“그럼요. 쓰세요.”
떨떠름함을 감추며 나는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그러면 이제 슬로건에 걸맞은 모습, 기대해도 되나요? 사람도 찾아 주시는 거죠?”
“누굴 그렇게 간절히 찾고 싶어 하는 건가요? 그것부터 들어 보죠.”
리젤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초조히 혀를 씹었다.
지금 이 마탑주랑 여유롭게 협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장소도 때도 좋지 않았다. 초조해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리젤로가 쿡쿡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래 봬도 레이 모나한이란 신분은 꽤 신실한 신도니까. 대성당에 돌아다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죠.”
“……그런가요.”
“하하. 정 불안하시면 더 안전한 모습으로 만날까요? 우리의 친구, 멜로디 양이라거나.”
또 여장을 하겠다고?
나는 탐탁잖은 눈으로 리젤로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남자인 레이보단 여자인 멜로디 모습으로 만나는 게 주변의 이목을 덜 끌겠지. 난 이래 봬도 유부녀니까.’
어제 레이를 만난 이안이 그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며 경고했던 말도 떠올랐다.
끙. 나는 신음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안에 멜로디 양 이름으로 방문 허락을 구하죠.”
리젤로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누굴 찾고 싶은 건진 모르겠지만, 인상착의나 특징을 자세히 생각해 놔요. 아, 그리고.”
리젤로가 목소리를 더 낮추며 속닥거렸다.
“카쿨타 진액, 이제 슬슬 입고되고 있는데.”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쿨타 진액이라면, 시간제한 저주를 풀기 위해 필요한 주요 재료.
그러나 마약 성분 때문에 당분간 구매할 수 없다 해서 나를 마탑에서 허탕만 치고 돌아오게 했던 그 재료였다.
“어떻게 아셨죠? 제가 그걸 찾고 있다는 걸.”
“하하. 내 탑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마 내가 모르겠어요?”
리젤로가 어깨를 으쓱이곤 이어 말했다.
“아직 필요하다면, 방문할 때 함께 가져가도록 하죠.”
“탑주님.”
나는 태세를 전환해 공손히 미소 지었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겠어요. 친절하시군요.”
“흐음. 좋아요.”
리젤로가 씩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오늘 안에 또 보죠.”
“넵. 조심히 들어가십쇼.”
정중히 인사한 나는, 리젤로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리젤로는 내가 왜 카쿨타 진액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다.
손님의 의도는 묻지 않는다는 그의 경영 철학상 앞으로도 꼬치꼬치 캐물을 일은 없을 터였다.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분명 리젤로는 거래 상대로서는 최고였다. 돈만 있다면 말이지.
‘자, 그럼 일단 엘리엇을 어떻게 찾아 달라고 할지 그 방법부터 깊이 고민해 봐야―’
“뭐 합니까?”
“흐어억.”
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허물어졌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뒤돌아보자, 믿고 싶지 않은 얼굴이 거기 서 있었다.
“이, 이안 님.”
이 귀신 같은 인간이 왜 또 여기 있지?
“언제 돌아오셨어요? 하하. 기사단 본부에 가 계신 줄 알았는데요.”
“출정 일정도 확정되었고, 전달할 물건도 있어 그댈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만.”
이안의 시선이 내 등 뒤를 향했다.
리젤로가 한참 휘적휘적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을 바로 그 방향이었다.
나는 애써 여상한 표정을 걸치며 살갑게 말 붙였다.
“그러셨군요. 바로 출발하기로 결정되신 건가요?”
“꽤 친한 사이인가 봅니다?”
이안이 내 질문을 질문으로 덮었다.
나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냥, 아는 얼굴을 마주쳐서 잠시 인사한 거죠. 뭐.”
“그런 것치곤 뒷모습을 꽤 오래 쳐다보던데.”
나는 당황해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추궁하는 목소리가 제법 서늘했다.
‘설마 레이의 정체를 눈치챘나?’
아니, 이안 성격에 눈치챘다면 곧장 행동에 착수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로만 떠볼 것이 아니라.
그래. 눈치챘을 리는 없어. 난 그렇게 믿기로 하고 뻔뻔하게 나갔다.
“전혀 안 그랬어요.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제게 전달할 게 있으시다고요? 뭔가요?”
꽤 자연스레 질문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난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취향입니까?”
“……예?”
“저자가 당신 취향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안이 리젤로가 사라진 방향을 툭 고갯짓하며 말했다.
굉장한 오해를 받은 나는 곧장 반박할 생각도 못 하고 멍해졌다.
그런 내 반응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이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결혼식 때도 시선이 꽤 오래 머문다 싶긴 했는데.”
아니. 그건 그냥 리젤로가 마탑주라는 폭탄이라서 그런 거고요.
가면 갈수록 더 가관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저자가 마음에 듭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참다못한 내가 언성을 높였다.
“제 취향을 뭘로 보시는 거예요. 저런 유들거리는 타입은 질색이에요. 전 올곧고 정직한, 저만 바라보는 대형견 같은 남자가 좋다고요!”
어찌나 답답했는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취향을 피력하고 있었다.
나는 흠, 헛기침했다.
“실은 레이 님이 제가 아는 사람과 무척 닮았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좀 쳐다봤나 봐요.”
“아는 사람?”
“예에…… 뭐,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요.”
나는 이안에게 내 과거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던 전적이 있다.
이번 역시 자세히 캐묻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기며 나는 대충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설마.”
이안이 미간을 구겼다.
“헤어졌다는 그 전 애인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