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게 무슨…….”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수라니.
물론 이 세계관에 그런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의 존재감은, 저 멀리 국경 너머 어딘가에 출몰한다더라 하는 괴담 정도에 불과했다.
‘원작의 주적은, 황제와 폭주한 이안이었지, 마수가 아니었는데.’
“자세히 보고해라.”
이안의 미간이 굳었다.
“후속 부대까지 모두 궤멸당했다고?”
“예.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온몸이 엄청난 털로 감싸이고, 염소 같은 뿔과 박쥐 날개를 지닌 거대 마수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합니다.”
“어째서 발록이.”
이안이 얼음처럼 차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발록?’
이름만 들어도 더럽게 센 놈이란 느낌이 왔다.
원작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나는 황급히 기억을 뒤져 보았다. 하지만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인 지금 시점에 대해선 책에 제대로 서술된 것이 없었다.
“리칼리온의 민간인들은?”
“살아남은 이들은 달아났습니다. 근처의 마법사들이 모두 모여 리칼리온 반경에 결계를 쳐 놓았으나, 얼마나 버틸지는 미지수라고 합니다.”
리칼리온.
계속해서 들리는 저 지명이 귀에 익었다.
어디서 들어 봤더라.
머릿속을 뒤져 보려는데, 마치 책갈피를 끼워 둔 페이지로 넘어가듯 자연스레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원작 남주의 고향 이름이잖아.’
정확히 말하면, 원작 남주는 리칼리온 근처에 붙은 도시 출신이었다.
허름하고 꼬질꼬질한, 가진 거라곤 아직 개화하지 못한 검의 재능 하나뿐인 고아.
그게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속 남자주인공이었다.
그런 그를 발견하고 빛의 세계로 이끌어 준 것은, 엘룬 교단 소속의 성기사였다.
원작 속 문장이 머릿속에 마치 필사하듯 덧그려졌다.
「그날, 엘리엇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생쥐처럼 살아가는, 여느 뒷골목 속 하루가 될 줄 알았던 날이 거짓말처럼 격변할 줄은.
리칼리온에 부임받았던 성기사, 아인츠가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죽어 가던 엘리엇을 발견한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아인츠는 엘리엇의 재능을 알아보고, 야생 개나 마찬가지였던 남주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한다.
결국 남주를 설득해 수도로 데려와, 사람 꼴로 만들어 주고 마침내 성기사단에 입단시킨다…… 는 것까지가 남주인공의 과거 에피소드에서 읽은 내용이다.
그런데.
‘리칼리온의 기사단이 전멸했다고?’
그 말인즉, 아인츠도 죽었다는 거야?
“루시안 씨.”
나는 굳은 얼굴로 루시안을 불렀다.
“성녀님. 기쁜 날에 이런 소식으로 마음을 어지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참사가 일어났는데 제 마음이 다 무슨 소용인가요. 혹시, 사망자 명단을 볼 수 있을까요?”
“사망자 명단 말씀이십니까……?”
루시안이 잠깐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곧 고개 저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아직 시체도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라, 명단이 작성되려면 시일이 더 걸릴 듯합니다.”
“하긴, 그렇겠죠. 제가 당연한 걸 여쭈었네요.”
“아닙니다. 혹시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싶으신 분이라도 따로 있으신 건가요?”
“혹시, 성기사단 소속의…….”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루시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성기사단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전멸했습니다. 발견 못 한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기사단 본부에 일부 보관해 두었던 단원들의 마력이 모두 꺼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루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사망했다는 거구나. 모두 다.’
얼굴 하나 모르는 이들이지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착잡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인츠가 죽었다니. 그럼, 원작 남주는 누가 구해 오지?’
근원적인 물음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아인츠가 죽었다. 즉, 원작이 바뀌었다.
‘어째서?’
원작과 지금 내가 직접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차이점은 하나뿐이다.
나의 존재.
‘설마, 나 때문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나비 효과가 일어났다고 해도, 수도에 사는 내 존재가 저 멀리 떨어진 국경의 마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리는 없었다.
그래. 내 탓이 아니다.
내 탓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자꾸만 손끝이 떨려 왔다.
원작이 첫 문장도 쓰이기 이전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이린.”
이안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지만, 여행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어서 대성당으로 돌아가요.”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전 떠나왔던 대성당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내내, 내 머리는 혼란으로 가득했다.
‘엘리엇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 이 시각에도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지며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을 원작의 남주인공, 엘리엇.
그를 구원해 줄 사람 좋은 성기사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남주인공이 없으면, 여주인공도 각성하지 못해. 그러면 이안과 힘을 합쳐 황제를 무찌를 사람도, 그 뒤 폭주한 이안을 저지할 사람도…… 없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이후엔 어떻게 되지?
모르겠다.
마왕으로 흑화한 이안이 세상을 무너뜨리나?
‘미치겠네.’
머릿속이 더없이 어지러웠다.
남주인공이 수도로 오지 않으면, 성기사단에 입단하지 않으면 여주인공과 만날 수 없다.
그러면 원작도 시작되지 않는다.
즉, 원작이 보장해 주는 이 세계의 해피 엔딩도 물 건너간단 소리였다.
강제로 이 세계의 주민이 된 나로서는 절대 막아야 할 일이었다.
‘어떻게든, 남주인공을 수도로 데려와야 해.’
과정이 어떻게 어그러지든, 그것만은 어그러져선 안 됐다.
“이안 님.”
내 반대편 마차 시트에 앉아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출정하실 건가요? 리칼리온에.”
이안은 잠시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몇 초 뒤에야 입을 열었다.
“신혼 이튿날부터 독수공방시킨다면. 아무리 가짜 남편이라 해도 지나치게 개새끼입니까?”
“아뇨. 어쩔 수 없죠.”
나는 고개 저었다.
이안은 명실공히 엘룬 성기사단 최고의 전력이었다. 그가 이런 일에 몸 사리지 않을 사람이란 건 원작 독자인 내가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독수공방은 싫어요.”
나는 꾹 두 주먹을 쥐고 말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무슨 말입니까?”
“출정에 저도 데려가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꼬질꼬질한 부랑자 행색을 하고 있을 남주인공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원작의 열혈독자인 나뿐이었다.
내가 엘리엇을 데려와야 한다. 아인츠의 역할을 이어받는 거다. 그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나의 비장함은 단칼에 꺾여 나갔다.
“안 됩니다.”
“왜요?”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이안이 찡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발록이 날아다니는 곳입니다. 목도도 제대로 못 쥐는 당신이 거길 어떻게 활보하겠다는 겁니까?”
“리칼리온까지 데려다 달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 근처 마을에서 내려 주시면 돼요!”
‘내려 주긴 뭘 내려 줘. 택시 타냐고……!’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는 낭패를 느꼈다.
이안의 벽안이 황당함으로 차게 빛났다.
‘역시 안 되나.’
“애초에 왜 수도를 벗어나고 싶다는 겁니까? 독수공방 얘길 또 하진 마시죠. 농담할 시간 없으니까.”
나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이안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 하면 이안을 설득할 수 있을까.
‘예지 카드를 또 꺼내 봐?’
솔직히 꺼려졌다.
아까 게이트 때만 해도, 사람들의 반응과 이안의 반응은 크게 달랐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이안은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걸.
이 상황에서 자꾸 예지란 이름의 거짓말을 시도한다면…… 그만큼 들킬 확률도 커질 거다.
‘감수해야 하나?’
짧은 고민에 시달리던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그새 대성당에 도착한 것이다.
“이 얘긴 없던 걸로 하죠.”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 훌쩍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내게 손을 내밀며 내릴 수 있도록 에스코트해 주긴 했지만, 그의 눈은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을 듯 완강한 빛을 띠었다.
나까지 내리자마자 그는 달려 나온 기사단원들의 보고를 들으며 기사단 본부로 향했다.
말 한번 붙여 볼 구석도 없었다.
“아이린 님.”
조안 경이 나를 마중 나와 주었다.
“사태는 들었습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조안 경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하아. 어쩌면 좋지.’
나 대신 남주인공을 데려올 심부름꾼이라도 고용하는 건 어떨까.
그것 역시 문제였다. 남주인공에겐 지금 이름조차 없었다.
엘리엇라는 이름은 그가 성기사단에 입단해서야 부여받은 세례명이었다.
‘그냥 무작정 갈발 녹안의 미청년 부랑자를 찾아 주세요, 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 텐데.’
……그래도 돈이면 다 되지 않을까?
‘예지 카드를 또 쓰느냐, 아니면 정보 길드를 찾아가 보느냐…….’
혹은 제3의 선택지가 있을지도.
어느 쪽이든 이안이 출발하기 전에 결정해야만 했다.
격렬히 고민하며 대성당 앞마당을 가로지르던 때였다.
“아이린 님?”
아는 목소리가 귀를 잡아끌었다.
고개 돌린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