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이, 이안 님.”
나는 삐걱거리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희, 혹시 이걸 타고 가나요?”
“…….”
이안이 대답 대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슬며시 허리를 숙이더니, 목소리 낮춰 속삭였다.
“왜 그럽니까. 아까부터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세 번이나 침대 밖으로 떨어지는 동안 혹시 한 번은 머리라도 부딪혔다거나?”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이안의 말에 불쾌해할 틈도 없었다.
나는 정처 없이 떨리는 눈으로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원작에서 수도의 워프 게이트는 마력 폭발 사고로 철거된 상태였다.
그 덕분에 주인공 커플이 운치 있게 마차 여행을 떠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 사고가 언제 일어났는지는 원작에 언급된 바가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시점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인 모양이었다.
“저, 이안 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저희, 마차 타고 가면 안 될까요?”
“예?”
이안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이틀을 길바닥에서만 버리자는 뜻입니까. 손바닥만 한 공간에 나랑 단둘이 갇힌 채로?”
뒤에 이어진 말을 뱉는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았다.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역시 그건 생각만 해도 무섭고 부담스러웠다.
‘어쩐지. 바쁜 인간이 왜 멀리까지 가는 일정을 짰나 했지.’
결혼식 과정에 신부는 관여하지 않는 전통 탓에, 모든 걸 이안에게만 맡긴 게 참사였다.
“글, 글쎄요. 제 생각엔, 마차 여행도 운치 있고 좋을 것 같은데요?”
나는 하하 웃으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옆에선 관리자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녀님께서 단장님과 더 오래 단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나는 곱아드는 손을 억지로 펴며 끄덕거렸다.
“마, 맞아요. 여행은 목적지에 가는 길까지도 포함해서 낭만적인 게 아니겠어요?”
“언제부터 부인께 그런 로망이 있으셨는지.”
이안이 삐딱하게 대꾸했다.
관리자는 저 말투의 불순함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흐뭇한 눈으로 우릴 바라볼 뿐이었다.
“아, 아이. 그만큼 이안 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제 마음을 왜 몰라주세요.”
중간에 한 번 입이 뒤틀릴 뻔했지만, 나는 간신히 끝까지 애교스러운 말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흐음.”
이안의 벽안이 내 안색을 훑었다.
“뭡니까?”
“네?”
“무슨 꿍꿍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소리를 아주 낮춘 채 이안이 속삭여 물었다.
내게만 들릴 만한 크기로.
‘대충 좀 넘어가 주지. 다 우릴 위한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속으로 이안을 몹시 원망했다.
‘그냥은 절대 안 넘어오겠지.’
그래. 나 같아도 이미 다 짜 놓은 여행 계획을 갑자기 이 박 삼 일간 마차에만 실려 다니는 일정으로 바꾸자고 한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으윽……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저 원반 안에 몸을 실어야 한다.
워프 게이트가 폭발하는 건 원작이 시작하기 이전. 즉 최소 반년 안에는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비극적인 날이 당장 오늘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강심장이 제 목숨을 운에 맡길 수 있을까.
적어도 난 그렇겐 못 했다.
“아이린.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슬슬 움직입시다.”
이안이 재촉해 왔다.
나는 입술을 꾹꾹 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으, 으읏.”
이마를 짚으며 나는 몸을 휘청거렸다.
“성녀님?!”
관리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윽, 뭔가가…….”
나는 신음하며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망할.
허접한 CG의 오컬트물에 출연해야 하는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뭔가가…… 보이고 있어요.”
“마, 맙소사. 성녀님께서 예지를 시작하셨다.”
관리자의 경악한 혼잣말 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내내 우릴 주목하고 있던 주변 사람들 역시 숨죽인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이안만이 눈썹을 찡그린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들려요……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이건…… 마치 현세에 펼쳐진 지옥 같군요……!”
나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무당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열연했다.
방울이라도 신명 나게 흔들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맨몸으로 쇼를 하려니 더 죽을 맛이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숨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죠!”
“울부짖는 소리라니! 이렇게 평화로운 수도에 무슨 일이…… 두려워요!”
다행히 사람들은 착실히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잔뜩 찡그리며 쐐기를 박았다.
“저건…… 두 개의 원반? 아주 거대한……. 원반들이 보여요.”
“원반? 원반이라면…….”
“거대한 원반이라면 워프 게이트밖엔 없잖아요!”
사람들이 소스라치며 외쳤다.
정답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계속해서 말했다.
“원반에서부터…… 헉.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어요. 아아, 무슨 일이…… 여기저기서 앰뷸, 흐흠, 아니. 들것이 실려 나와요!”
“맙소사!”
“끔찍해라!”
“워프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죠!”
겁먹기 시작한 사람들이 게이트로부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치안대! 치안대를 불러와요!”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그건 좀…… 애초에 저 레이디 말만 듣고 너무 과민 반응들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 당신은 아이린 님도 모르세요? 저분이 바로 십오 년 만에 나타나신 예지의 성녀님이시잖아요!”
“헉, 그 성 재스퍼 님의 환생이라는……!”
재스퍼라면 성녀 열전에서 읽은 전설 속 예지의 성녀 이름이잖아. 그게 왜 여기서 나와?
들려오는 얘기는 점점 더 황당해졌다.
“다들 몰라요? 베르나데트 백작님이 이번에 금맥을 새로 뚫는 데 성공한 것도, 저 성녀님 덕분이란 걸요!”
뭐? 나 덕분이야?
“그래요. 저도 들었어요. 코델리아 님이 저 성녀님께 점지받은 행운의 색을 걸치고 다닌 뒤로부터 베르나데트 백작가가 아주 활짝 피었잖아요!”
아니, 그 가문은 원래부터 활짝 피어 있는 가문이지 않나요?
“그뿐만이에요? 무례하게 성녀님을 의심했다가 된통 깨진 파르아스 백작은, 어제 타고 있던 마차 바퀴가 빠져서 흙탕물을 굴렀다잖아요!”
그건 좀 쌤통이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온갖 정보들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으읏, 또 머리가…….”
신음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안타까운 한숨을 터뜨렸다.
“성녀님, 무리하지 마세요!”
“중요한 정보는 이미 전부 보신 것 같습니다!”
“엘룬 신께서 성녀님을 통해서 경고하신 거예요!”
사람들이 잔뜩 흥분해서 수군거렸다.
나는 지친 얼굴을 하며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괜찮았나?’
일단 대부분 홀랑 넘어온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예지의 성녀라는 타이틀 이 끼치는 영향력이 엄청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설의 성녀인 재스퍼 이후 예지의 권능을 지니고 태어난 성녀는 외우려면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반응이 아주 열광적인데, 어째서인지 이안만 별말이 없었다.
슬쩍 고개 돌린 나는 이안의 벽안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
이안은 다른 사람들처럼 경악하지도,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안 믿는 건가?’
등골에 식은땀이 배는 것이 느껴졌다.
여태 이안에게 거짓말을 쳐 본 건 여러 번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속이는 건 역시 부담감이 있었다.
“윽, 머리가…….”
이안과 조금 떨어지기 위해 나는 두통이 이는 척 휘청거리며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그때 따스한 손바닥이 멀어진 내 등을 받쳤다.
“많이 아프십니까?”
이안이 물었다.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분명 걱정이었다. 일단은.
나는 일부러 아련하게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에요. 조금 어지럽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어지럽습니까?”
“시야가 흐릿하고 두통이 일긴 하네요.”
나는 계속해서 아련히 웃으며 약한 소리를 했다.
이안이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내 귓가에 가까워졌다.
흠칫, 몸을 굳힌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지. 안색은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귀신 같은 인간.’
등골에 바짝 소름이 올랐으나, 칼을 뽑은 이상 물러날 순 없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며, 슬픈 미소와 함께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보이신다면 다행이네요. 이안 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진 않으니까…….”
주위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들렸다.
이안은 잠시 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로 안 믿는 건가. 그런 불안이 덜컥 들 무렵이었다.
“관리자.”
“예, 옙! 단장님.”
새파래진 얼굴로 내 예언을 듣고 있던 관리자가 얼른 대답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슈, 슈렌이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슈렌. 이 시간부로 건물을 폐쇄하도록 하시오.”
“예…… 옙! 알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당신.”
게이트 옆에 서 있던, 번쩍번쩍한 로브를 입고 외알 안경을 걸친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황실 소속 마도학자인가?”
“그, 그렇습니다. 황자 전…… 아니, 이안 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현재 게이트에 흐르는 마력의 움직임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만…….”
“움직일 수 있는 황실 마도학자를 모두 불러 게이트를 조사하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마도학자는 희미하게 이 사태가 황당하고 억울하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내린 두 개의 지시에 수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이며 따르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졌는데, 아무 이상도 없다고 나오면 굉장히 민망하겠지.’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원작 주인공 커플의 마차 여행은 둘의 애정이 진전되는 커다란 에피소드이기에, 사소한 건 틀어져도 수도의 워프 게이트가 사라지는 것엔 변함이 없을 거다.
그래야 남주와 여주가 알콩달콩 마차 여행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다, 단장님!”
루시안이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뛰쳐 들어왔다.
이안 앞까지 순식간에 달려온 그가, 숨도 고르지 않고 다급히 보고를 시작했다.
“리칼리온에 파견했던 기사단 2개 대대가…….”
루시안의 목소리는 오직 이안에게만 들릴 만큼 낮고 작았다.
하지만 이안 바로 곁에 서 있는 내겐 똑똑히 들렸다.
“전멸했습니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