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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161)

41화

“그럴 겁니다.”

이안의 눈에 짜증이 짙게 배었다.

“친애하는 형님께서 쓸데없는 짓을 했군요.”

“잠깐. 잠시만요.”

나는 다급히 속닥거렸다.

저자들이 황제가 심은 사용인들이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여태껏 나는 이안과 정말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발이 없어서 하루 종일 이안에게 안겨 다닌 게 아니잖아.’

그래. 오늘 하루 나와 이안은 완벽한 커플로 보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굳이, 저들을 물림으로써 위화감을 심어 줄 필요가 있을까?

나는 격렬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몇 초 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속삭였다.

“해, 해요. 그냥.”

“……예?”

“다 왔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삐끗하고 싶진 않아요. 가터만 이안 님이 벗겨 주시면 되는 거죠? 그러고도 안 나가진 않겠죠. 그거 하나 벗는 건 십 초도 안 걸릴 텐데요, 뭐.”

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이안에게 안겨 다니고, 주교 앞에서는 키스하는 시늉까지 했는데 이거라고 못 할 게 뭔가 싶었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 전혀 아무렇지 않으니 얼른 해치워 버려요.”

“……진심입니까?”

“네. 완전히 진심이에요. 전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기껏해야 일 분이나 걸리겠어요? 그 정도야, 뭐.”

“알겠습니다.”

이안이 낮게 한숨 쉬었다.

“알겠으니까 긴장 좀 푸십시오.”

“……긴장 안 했다니까요?”

이안이 대답 대신 내 발끝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야 내 발가락들이 긴장을 이기지 못해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웅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이건…… 그냥.”

“지금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거 압니까?”

“거짓말. 이렇게 어두운데 그런 게 어떻게 보여요.”

“대충 보입니다. 하아…… 아이린.”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새겨 말하듯, 느릿하게.

“그대가 수치스럽다면 이런 일은 안 할 겁니다. 당신이 한마디만 하면 모두 물릴 테니까, 괜한 고집 부리지 마십시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안이 나를 다독이는 모양새가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이런 문제에서 이안을 놀리고 우스워하는 건 내 역할이었는데.

내가 말이 없자 이안이 입술을 열었다.

“역시 물리겠습니다.”

“잠시만요.”

나는 이안의 소매를 잡았다.

“해 주세요.”

“고집부릴 필요 없다는데도-”

“우린 가짜니까.”

나는 이안의 말을 끊고 그의 귓가 가까이 속삭였다.

“그만큼 더 겉보기엔 완벽해야죠.”

“…….”

이안이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살 하나 안 닿겠습니다.”

“부탁해요.”

신방에서 이렇게까지 비장한 대화를 주고받는 신혼부부는 아마 이 세상에 우리뿐일 거다.

“잠깐. 잠시만요.”

나는 꾸물꾸물 움직여 허벅지에 있던 웨딩 가터가 종아리까지 내려가도록 했다. 다행히 밖에서 보이는 실루엣이 너무 수상할 만큼 꿈틀거리진 않아도 되었다.

“이, 이제 됐어요.”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반투명한 베일 너머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앞에 있는 남자의 존재감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면서.

“…….”

“…….”

이안은 제 말을 지켰다.

그는 살 하나 내게 닿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정확히, 입술로 가터만을 벗겨 갔다.

하지만 숨결까지 조절하지는 못했다.

나는 꾹 주먹 쥔 채 감은 눈 속 어둠을 노려보았다.

드레스 자락에서 빠져나온 이안이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린?”

나는 살짝 실눈을 떴다.

웨딩 가터를 뱉어 낸 이안이 그걸 베일 밖으로 던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벽 앞에 붙어 있던 사용인들이 숨죽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콩, 하고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이제 우리뿐입니다.”

이안이 말했다.

아까까지의 속삭이다시피 하던 목소리보다는 확연하게 다른 크기였다.

소드 마스터인 이안이 타인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할 리 없다. 즉, 이 방엔 그의 말대로 완벽하게 우리 둘뿐일 터였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눈을 모두 뜨지 못했다.

발목 피부를 간지럽혔던 타인의 숨결이, 질감을 갖고 여전히 거기 눌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린?”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잘게 헛기침을 했다.

“흐, 흠. 드디어 갔군요.”

“아침에 사용인이 오기 전까진 우리뿐일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남자 한 명분의 무게가 빠지자 침대가 출렁거렸다.

소매 커프스를 벗으며 이안이 베일을 헤치고 침대 밖으로 나갔다.

광활한 침대에 홀로 앉은 채 나는 멍하니 이안을 지켜보았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건가.

하긴, 나 역시 아직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실내용 가운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거기서 뭐 하세요?”

나는 이안이 소파에 걸터앉는 것을 목격했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눈가를 찡그린 채 물었다.

“혹시 요상한 매너를 발휘해서 거기서 자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아니면 뭐겠습니까?”

별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이안이 되물었다.

나는 지친 얼굴로 손짓했다.

“얼른 오세요. 저 오늘 기운이 다 빠져 버려서, 이런 걸로 실랑이할 힘 없거든요. 거기서 자는 걸 아침에 사용인한테 들키기라도 했다간 어떻게 되겠어요?”

“안 들킵니다.”

나는 태연히 말하는 이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파는 꽤나 길었는데, 그래도 이안의 몸을 가로로 다 담기엔 턱없이 가엾었다.

“그냥 오시죠. 정말 밤새 거기서 주무셨다간 다림질도 안 되게 구겨지시겠어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부인께선 잠이나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피곤하다면서.”

“그렇죠. 피곤하죠. 낮에 당신 형님이 찾아와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바람에 더 피곤해요. 그러니까 얼른 편히 잘 수 있게 협조해 주세요.”

우리는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고 팽팽했다.

그러나 결국 승자는 나였다.

당장 올라오지 않으면 바닥으로 내려가서 자겠다는 내 협박이 통한 것이다.

“도대체가.”

낮게 불평을 흘리며 이안이 침대로 다시 다가왔다.

“왜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 겁니까?”

“제가 이안 님에게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은 대사예요.”

솔직히 바닥에서 자고 싶으면 자라고 할 줄 알았기에 순순히 올라오는 게 조금 의외였다.

나는 홱 고개 돌리고 반대편 침대 멀찍이 자리를 잡았다.

나라고 이안과 한 침대에서 나란히 눕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침대가 넓디넓은데, 혼자만 쓰는 건 낭비잖아.

나는 이불 속에서 혼자 드레스를 좀 풀어 보려고 끙끙대다가, 곧 때려치우기로 했다.

거추장스러운 겉치마를 벗자 그럭저럭 편안했다.

더는 꼼짝하기도 힘들 만큼 피곤했으므로, 나는 대충 드레스를 벗다 만 이대로 잠들기로 했다.

아침에 사용인이 오면…… 이불 속에 숨어 있지, 뭐.

정신은 점점 수마 속에 잠겨 갔지만, 심장만은 계속해서 쿵쿵 뛰어 대고 있었다.

단지 조금 전 이안과의 불미스러운 웨딩 가터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잊지 마. 네 인생은 우리 손에 달렸다는 거.’

결혼식 전야제 밤 나를 찾아왔던 나인 길드원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펜던트.”

입 모양만으로 부르자마자, 오른손에 차갑고 묵직한 감촉이 만져졌다.

침대 반대편의 이안에게선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오른 손아귀에 들어온 펜던트를 꾹 쥐었다.

‘이걸 매일 밤, 최소 십 분 이상은 이안 에스테반 근처에 두도록 해.’

그 말대로 한다면, 일은 순조롭게 원작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안은 저주에 걸릴 것이고, 나인 놈들의 뜻대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미쳐 가겠지.

나는 천장을 노려보았다.

어두운 천장 위로 내게 손쉽게 고통을 주었던 나인 길드원, 에드워드 비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잊지 마. 네 인생은…….’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이내 눈을 감았다.

“사라져.”

펜던트의 무게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모르겠다. 골치 아픈 일은 내일 생각하자. 오늘은 너무 지쳤으니까.

‘그래. 너무 지쳤으니까…….’

누군가를 저주할 기운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이 가물가물 감겼다.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을 건네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듣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 버렸다.

며칠간 쌓인 피로 탓에 그날 밤의 잠은 죽음처럼 깊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이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안이 사용인에게 무어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를 직접적으로 깨우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한 차례 더 잠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로 나를 깨운 건 아네트의 목소리였다.

“아이린 님, 아이린 님……!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으음…… 지금 몇 시예요?”

나는 부은 눈을 뜨며 시계를 찾았다.

아네트가 알려 준 시간은 충격적이었다.

“열한 시라고요?!”

“네에. 푹 주무시는 것 같아 깨우지 못했는데, 슬슬 시장하시지 않을까 해서요.”

“도대체 얼마나 잔 거야…… 이안 님은요?”

“단장님께서는 지금 기사단 본부에 계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아네트의 표정은 어딘가 평소랑 달랐다.

“많이 피곤하시죠? 누워 계세요. 제가 요기하실 거리 전부 준비해서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많이 피곤하냐고 묻는 대목에서, 아네트의 얼굴이 유달리 새빨개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린 친구가 벌써 사상이 불순하다고.

투덜거리며 고개 돌린 나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베개 옆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이건.”

이안의 필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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