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61)

40화

“식사나 더 하시죠. 뭐가 먹고 시습니까, 이번엔.”

이안이 그릇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명백히 나와 시선 마주치길 피하는 몸짓이었다.

‘흐흥.’

나도 모르게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한 달여간 가까이 지내면서 내가 겁대가리를 좀 상실하긴 한 모양이다.

나는 슬쩍 고개를 이안에게로 붙이고 속닥거렸다.

“저기, 이안 님. 표정 관리 너무 안 되고 계신데요.”

“제 표정이 어디가 어떻단 말씀이십니까.”

“밀가루 포대를 안고 있어도 이것보단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 같아요.”

“…….”

“아까, 후회하냐고 절 비웃으면서 잘 웃었잖아요? 그때 그거 재연해 봐요.”

이안이 마지못해 입꼬리를 올렸다.

코앞에서 보는 내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기색이 역력히 보였지만, 조금 떨어진 이들에겐 순수한 웃음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지금 웃으셨어요. 봤어요? 봤어요?”

“아아, 녹을 것 같아.”

“진정해요. 남의 남자야.”

흥분 어린 소곤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안 님. 그리고 아이린 님. 아이린 님은 오랜만에 뵙는군요.”

헉.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 새에 다가왔는지 리젤로가 우릴 향해 환히 미소 짓고 있었다.

‘망할.’

인사 안 하고 넘어가나 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모나한 남작님.”

“아는 사람입니까?”

이안이 어느새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모나한을 훑어보았다.

“코델리아 님의 살롱에서 만난 분이에요. 여기까지 축하하러 와 주셔서 감사해요, 남작님.”

“뭘요. 축하드릴 수 있게 되어 저야말로 영광인걸요. 두 분, 정말 보기 좋으십니다.”

리젤로가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그냥 단지 축하하기 위해서 온 건가?

미심쩍은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계속 웃음을 걸쳤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부디 많이 즐기다 가시길.”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그대로 돌아서려는 것 같던 리젤로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자주 찾아오세요. 심심해하고 있답니다.”

이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물론, 코델리아 님께서요.”

리젤로가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용건은 끝났다는 듯 그가 정중히 인사하곤 사라졌다.

이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잘 아는 사람입니까?”

“그냥. 코델리아 님 살롱에서 몇 번 얼굴 뵌 게 다예요.”

분명 이안의 목소리엔 의심하는 기류가 담겨 있었다.

나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왜 뉘앙스 묘한 말을 흘리고 간 거야, 저놈의 마탑주는!

일단 이안이 리젤로에게 관심을 거두게 하기 위해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사교계에선 평판 좋은 분인 것 같더라고요.”

“조심하십시오. 인상이 별로니까.”

“네?”

“느낌이 썩 좋지 않단 얘깁니다.”

“아…… 네.”

신기하네. 성기사단장으로서 마탑과 관련된 건 일단 꺼려지고 보는 본능이 있는 건가?

낮게 속닥거리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향해 흐뭇한 속삭임들이 쏟아졌다.

“무슨 밀어를 저리도 나누시는지.”

“뜨겁네요, 뜨거워. 호호호.”

리젤로 이후로도 수많은 하객이 우릴 찾아왔다.

황제가 찾아왔을 때는 약간 긴장했지만, 웬일인지 이번에는 별달리 신경 긁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행히 그의 방문은 무난히 지나갔다.

코델리아도 찾아와 주었지만 워낙 하객이 많아 담소를 즐길 수 없었다.

비슷비슷한 축하 인사와 답인사에 진력이 날 무렵.

해가 저물며 유리 온실에 보랏빛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악단이 조금 더 정열적인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하객들 역시 하나둘 과실주에 취하며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유희의 밤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새신랑과 새신부에겐 그들만의 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단장님, 아이린 님.”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이 조심스레 말했다.

“신방이 모두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움찔, 이안의 복근이 굳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받침대가 굳으니 그 위에 안긴 나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첫날밤.’

모든 신혼부부가 손꼽아 기다릴, 결혼식의 하이라이트.

“……일어날까요. 부인.”

이안이 낮고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역시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갑시다.”

이안이 나를 안아 든 채 벌떡 일어났다.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어디로 가냐고 묻는 이는 없었다.

그저 다 안다는 듯, 흐뭇하고 어딘가 음흉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람들만 있을 뿐.

나와 이안은 유리 온실을 벗어났다.

신방은 대성당 깊은 곳에 차려져 있었다.

커다란 문 앞에 다다르자,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정중히 경례하곤 문을 열어 주었다.

안을 들여다본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와아.”

아름다운 방이었다.

백색과 청금색으로 꾸며진 방은, 이곳저곳 흩뿌려진 장미 꽃잎까지 더해져 마치 명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방을 둘러보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이, 이안 님. 사람들이 있는데요?”

나는 이안에게 황급히 속닥거렸다.

“합방 시중을 들 사람들입니다.”

이안이 대답했다. 여전히 딱딱히 굳은 목소리로. ‘합방’이라는 단어 자체를 내뱉는 게 어색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담은 내용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무, 무슨 시중을 들어요?”

나는 소스라쳤다.

아니, 어떻게 그, 그런 내밀한 행위에 시중을 든단 말이야?

“시중, 시중들 게 따로 있지. 제정신인가요?”

다 큰 어른들인데, 그 정돈 둘이서 알아서 할 수 있잖아. 아니, 알아서 해야 하잖아.

한껏 당황한 나는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뜻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착잡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압니까. 부인.”

“뭐, 뭘요.”

“밥 먹듯이 내전이 일어나던 레하트 제국의 고대 왕들은 왕비와의 첫날밤에서 가장 많이 암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 암살? 갑자기요?”

“가장 무방비한 순간이기에 표적이 된 것이죠. 그래서 레하트 제국은 예로부터 시종들로 하여금 첫 합방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그게, 전통이죠.”

미친 전통.

나는 몇 시간 전, 그까짓 전통 지켜보자고 말했던 내 입을 마구 때려 주고 싶었다.

“어떻게 좀 해 봐요.”

나는 다급히 속닥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분들이 계속 계실 건 아니겠지요? 설마 우리가 그, 그럴 때까지 감시하는 건가요?”

“예전엔 그랬다고 합니다만.”

돌아온 대답에 나는 기절할 뻔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을 연기할 만큼 낯짝이 뻔뻔하진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통도 완화되어서, 이젠 조금 짓궂게 남은 관습 정도가 됐죠. 요즘은 전부 지켜보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 그래요?”

살았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그렇지, 그런 이상 성욕 같은 전통이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옷을 벗기 시작하면 나갈 겁니다.”

“좋…… 좋아요.”

그 정도면 괜찮았다.

오늘 나는 신부답게 수많은 옷과 장신구를 껴입었다. 티아라에, 베일에, 겉치마에. 미적대며 벗을 옷가지가 한 무더기였다.

“그럼 어서 들어가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언제까지고 저…… 시중드는 분들과 한방에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곧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명백했다. 방 한가운데 위치한 침대였다.

‘침대 한번, 더럽게 크네.’

신방의 침대가 얼마나 컸냐면,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신나게 해도 절대 떨어질 염려가 없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렇게 큰 침대라면 이안과 떨어져서 잠들기 용이할 테니까.

침대는 나비 날개처럼 반투명한 베일이 드리워져 있어 어딘지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베일을 헤치고 이안이 그 안으로 들어서고, 침대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푹신한 침대 시트가 내 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

“…….”

어색해 미치겠네.

하루 종일 실려 다니던 이안의 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없었다.

야릇하게 생긴 침대에 누워 나는 한껏 긴장해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렸다.

침대가 출렁이자 더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질끈 입술을 물곤 황급히 이안에게 손짓했다. 얼른 재킷을 벗으라는 손짓이었다.

‘사람들이라도 빨리 내보내자.’

분명 옷을 벗기 시작하면 나간다고 했었지.

내 손짓을 알아들은 이안이 제 재킷에 손을 댔다.

못 볼 걸 보는 기분에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재킷을 벗은 이안이 그것을 침대 밑으로 던졌다.

분명 재킷이 떨어졌는데도, 사용인들이 나가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 왜 안 나가죠?”

나는 한껏 목소리를 죽여 속닥거렸다.

이안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저 이 상황을 어색해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오금까지 얼어붙었을 서늘함이었다.

“웨딩 가터.”

“네?”

이안이 문득 중얼거린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벗길 때까지 안 나갈 생각인가 봅니다.”

웨딩 가터라면, 분명 아침에 아네트가 직접 채워 준 물건이었다.

내 오른쪽 허벅지에서 지금도 불편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건 신랑이 직접 풀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니까, 입으로.

웨딩 가터를 신랑이 입으로 푸는 결혼 문화 자체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살던 세계의 서양에서도 그런 관습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행위 자체가 생소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나와는 평생 인연이 없을 줄 알았을 뿐.

‘음. 이 미친 하루. 아직도 놀랄 게 남아 있었다니.’

이안 에스테반이 내 드레스 자락 안으로 들어와 가터를 벗겨 가도록 해야 한다고?

그냥 스스로의 머리를 후려쳐서 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냥 모두 물리겠습니다. 황족의 전통을 대성당에서 지키라 할 줄은 몰랐군요.”

“황족의 전통?”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황족만이 지키는 전통인가요?”

“그야 물론. 일반인들까지 이렇게 기괴한 첫날밤을 보낼 리 없지 않습니까.”

“그, 그건 확실히 그렇죠. 어라, 잠시만요. 그럼, 저 사용인들도 혹시?”

나는 슬쩍 반투명한 베일 너머, 멀리 벽 앞에 서 있는 사용인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저들의 복장은 분명 신도복이 아닌 것 같았다.

“황궁에서, 보낸 사람들인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