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정원으로 향하는 입구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비켜나지 않았다.
‘뭐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두 기사를 쳐다보았다.
두 기사 역시 의아한 눈을 하곤 날 마주 보았다.
뭐야?
“비켜라.”
이안이 뭐 하냐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기사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예, 옙!”
“엇, 잠깐. 단장님!”
그때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루시안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뭐지?”
“그, 전통은 안 지키시는 겁니까?”
전통?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무거운 드레스를 둘둘 두르고, 이안이랑 손까지 맞잡고 있으면 됐지, 또 무슨 전통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굳어 버렸다.
코델리아와 살롱 사람들이 말했던 ‘결혼식 전통’. 체통 없다며 코델리아가 탓했던 바로 그 문화.
대체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그놈의 문화!
지금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설마 그걸 안 지키고 있어서 다들 의아해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건 이안이 우리 결혼식에선 없앨 거라고 했었는데?’
나는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몹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전통은 지킬 일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아…… 헉, 죄송합니다. 워낙 만연한 전통이라 당연히 두 분도 지키시리란 착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루시안이 고개를 꾸벅이곤 물러났다.
휴, 그럼 그렇지.
이안이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나는 다시 기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 너머 정원 입구에서, 우릴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비켜서자 나와 이안은 함께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사람들의 눈빛이 요상해졌다.
조금 전 기사들과 똑같은 눈빛.
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냐는 듯한, 몹시 의아해하는 눈빛.
“……이안 님.”
걸음을 멈춘 채 이안을 살짝 당기자, 그가 함께 멈추곤 날 돌아보았다.
나는 그에게 속닥거렸다.
“그 전통이란 거, 원래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떨떠름한 얼굴로 이안이 말했다.
나는 다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 큰 어른들이 마치 솜사탕 장수를 앞에 둔 어린애들처럼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전통, 이 제국에선 다들 지키고 있는 거라 했었지.’
아무래도 다들 우리가 그걸 지키길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끄응, 신음했다.
이 세계에서 그 전통은, 마치 생일 파티에서 케이크 촛불을 부는 것만큼 당연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안 지키면, 다들 실망할 것 같은데.’
에이. 모르겠다.
나는 쯧 혀를 찼다.
아무리 체통 없다곤 해도 명색이 결혼식인데, 그렇게까지 남사스러운 걸 시키겠어.
나와 이안의 결혼은 진짜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 아니다.
즉, 알맹이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 때문에 더더욱, 겉 포장만큼은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었다.
“이안 님.”
나는 이안에게 다시금 속닥거렸다.
“그거, 뭔지는 몰라도 그냥 해요.”
“예?”
이안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난 그의 소매를 재차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 전통, 지키자고요. 다들 기대하고 있잖아요.”
“우린 안 지킬 거라고 했을 때 눈에 띄게 안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땐 그랬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땐 그때고!
“한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눈 딱 감고 해치워 버리죠.”
내 생각에, 안 지켰다간 두고두고 ‘그 결혼식은 다 완벽했는데 한 가지가 아쉽더라!’ 하며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이안이 절대 하기 싫다는 듯 딱딱히 얼굴을 굳혔다.
‘이 고지식한 인간.’
나는 이안의 소매를 쭉쭉 잡아당기며 단호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몇 초간 이안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저도 마음먹었는데, 이안 님은 용기가 없으신 거예요?”
마지막으로 도발하자, 그가 날 내려다보곤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게 되었단 의미였다.
다 넘어왔음을 눈치챈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할 거면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도대체 무슨 전통인지는 몰라도,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를 삶아 먹기라도 할까. 해 봤자 좀 짓궂은 장난일 터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네. 그럼요. 전 완전히 마음먹었어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네. 잘 생각하셨― 꺄악!”
나는 말도 못 끝맺고 꽥 비명을 질렀다.
이안이 내 무릎 뒤쪽으로 팔을 넣고는, 그대로 안아 올린 것이다.
졸지에 시야가 90도로 뒤집힌 나는 어안이 벙벙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각오했다면서.”
“아니, 하,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안길 줄은 몰랐지!
일명 공주님 안기 자세. 이안에게 당하는 건 벌써 두 번째였다.
전통이라는 게 이 자세로 입장해야 한다는 거였어?
“무르고 싶으면 지금 무르시고.”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입가엔 삐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비웃는데 내뺄 순 없었다. 이 정도면 각오했던 것보단 수위가 약하기도 했고.
“아뇨? 전혀 무를 생각 없는데. 가요. 출발.”
이안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몸이 둥실둥실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에게 안겨 정원으로 나서자, 수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이안에게 꼼짝없이 안겨 있는 나를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쩜, 금실이 좋으시기도 하지.”
“정말 완벽한 한 쌍이에요. 전통을 지켜 주시는 모습이 아주 아름답군요.”
“흔들림 없이 신부를 안고 있는 신랑 좀 봐요. 다른 신랑들은 후들거리는데!”
이런 추임새도 잊지 않으며.
하아, 망할. 나는 몰려오는 수치감에 살짝 얼굴을 이안의 가슴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수모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원에는 하얀 테이블이 아주 많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중 웨딩 아치 앞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이 우리 것이었다.
날 안은 채 그리로 성큼성큼 걸어간 이안이, 그대로 테이블 앞에 착석했다.
여전히 날 안은 그대로.
꼼짝없이 이안의 무릎 위에 앉은 자세가 된 나는 황급히 속삭였다.
“아, 안 내려놓으세요?”
“왜 내려놓습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이안이 날 돌아보았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난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으나, 그래 봤자 이안에게 안겨 있는 내 허리만 보일 뿐이었다.
공주님 안기까진 버틸 수 있었는데, 무릎에 앉아 있는 건 좀 대미지가 컸다.
“설마 피로연 내내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습니까.”
이안이 날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며칠 전 가르쳐 주었던 그 미소였다.
“후회하나요?”
이럴 때 쓰라고 가르쳐 준 미소는 아닌데!
난 뚱한 표정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런데 왜 이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왜 나만 어색해하는 것 같냐고.
그때 누군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결혼 정말 축하드립니다.”
척 보아도 지체가 높아 보이는 부부였다.
유교 문화에서 나고 자란 국민으로서 당연히 일어나 답인사를 하고 싶은데, 이안에게 안겨 있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이안의 무릎에 앉은 그대로 부부를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보기 좋으세요. 부디 행복하시길.”
부부가 몹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축복했다.
다른 하객들도 차례로 다가와 우리를 축하하고 축복해 주었다.
그중 한 영애가 따스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시장하진 않으세요?”
나는 그제야 내가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저곳에서 향긋한 음식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본 나는 뷔페 테이블에 척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한가득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멀리서 봐도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고기에, 싱싱한 녹빛 채소들.
절로 군침이 돌았다.
“식사할 때를 넘기긴 했네요.”
“아, 그릇을 좀 가져다드릴까요, 아이린 님?”
루시안이 눈치 빠르게 물어 왔다.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어요!”
난 이안에게 안겨 있는 의무를 수행하느라 가져올 수가 없으니.
루시안이 활짝 웃으며 끄덕이곤 머지않아 쟁반 가득히 음식 담긴 그릇들을 가져왔다.
“와아.”
하나같이 끝내주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었다.
아침부터 내내 굶은 배가 맹렬히 항의를 시작했다.
드레스 때문에 너무 많이 먹을 순 없겠지만, 조금은 괜찮겠지.
“감사합니다, 루시안 씨.”
루시안에게 인사한 내가 포크를 집어 들려던 순간이었다.
‘응?’
포크를 눈앞에서 뺏겼다.
나는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내 포크를 강탈해 간 이안이 포크로 접시를 가리키며 물었다.
“뭐가 먹고 싶습니까.”
“네? 고기…….”
얼떨결에 대답하자, 이안이 쥔 포크가 스테이크를 담은 크리스털 그릇을 향했다.
방금 구워져 끝내주는 빛깔로 그을린 스테이크 조각이 포크에 꽂힌 채 내 입술 앞으로 다가왔다.
‘……먹여 준다고?’
이것까지 전통의 한 부분인 거야?
나는 남들 몰래 꾹 주먹 쥐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남들 앞에서 ‘아앙~’ 놀이를 하게 될 줄이야.
입을 벌리자, 먹기 좋게 썰린 스테이크 조각이 쏙 안으로 들어왔다.
우물거리며 나는 곱아들려 하는 손가락을 폈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아무래도 피로연 내내 신랑에게 안겨 모든 걸 신랑 손에 맡기는 게 전통인 모양인데, 이 정도면 그래도 그렇게 남사스러운 수위는 아니었다.
그래. 이 정도인 걸 다행으로 알자.
그런데 왜 이게 전부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지?
불길한 생각을 떨치려던 때였다.
‘어?’
문득 시선 끝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레이 모나한. 아니, 그 모습을 한 리젤로가 정답게 영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성기사단장의 결혼식에 마탑주가 신원을 숨긴 채 참석 중인 현장이었다.
어떡하지? 굉장히 못 본 척을 하고 싶은데.
나는 슬그머니 고개 돌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는 바람에 이안과 몸이 더 밀착되었다.
“……아이린. 어디 불편합니까?”
이안의 딱딱한 물음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아, 아뇨. 괜찮― 응?”
나는 문득 무언가를 눈치채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기대 있는 이안의 복근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돌에 기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하.’
나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지.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지.
이안은 지금 이 상황에 사실 나보다도 더 긴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