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 이게 무슨.”
정처 없이 떨리는 눈으로 나는 펜던트를 들여다보았다.
펜던트 한가운데 박힌 새까만 흑요석이 요사스럽게 반질거리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미친 걸까.
바보처럼 굳어 버린 내 머릿속에 문득 단어 하나가 스쳤다.
‘아공간.’
물건을 보관해 두기 위해 여는 가상의 공간.
이안 역시 자신의 보검을 아공간 속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능력만 된다면 아공간을 여는 방법 자체는 간단하다. 물건과 접촉한 채, 그것을 숨기고 싶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알려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펜던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라져.”
그렇게 말하자마자, 펜던트가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췄다.
“……펜던트.”
이번엔 다시 손안에 나타났다.
“하.”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 몸, 76번은 아공간을 열 수 있다.
하지만, 아공간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든 일일 텐데.
“대체, 이 몸은…….”
나는 망연히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 몸엔 어떤 능력들이 숨겨져 있는 거지?
“아이린 님? 괜찮으신 거죠?”
문밖에서 아네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을 너무 오래 허비했나 보다.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곤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요. 곧 나갈게요.”
다행히 흘러 나간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나는 고개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분홍색 머리칼을 한 여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정신 차리자.’
바보같이 당황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똑똑히 정신 차리고, 받아들일 것은 빠르게 받아들여야 했다.
‘일단 이건 숨겨야 해.’
나는 펜던트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나인이 떠넘긴 말도 안 되는 물건.
분명 흑마술과 깊게 관여된 물건일 터였다.
“꺼져 버려.”
그렇게 말하자마자, 언제 존재했냐는 듯 펜던트가 손 위에서 증발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문고리를 돌렸다.
날 기다리고 있던 아네트가 환해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네트 양. 오래 기다렸죠?”
아네트를 바라보며 나는 활짝 웃었다.
* * *
어젯밤 전야제는 늦게까지 계속되었지만, 신부인 나와 신랑인 이안은 자정 전에 자리를 떴다.
당연했다. 가장 중요한 본식이 있는 오늘의 주인공들이었으니까.
아침부터 일어난 나는 오늘도 사용인들의 열띤 손길을 받고 있었다.
“어쩜, 피부 결이 우유처럼 부드러우세요.”
“이런 피부엔 무슨 색이든 잘 어울리겠어요.”
낯 뜨거운 칭찬 폭격에 나는 허허 웃음만 지었다.
장신구까지 완벽히 걸친 내 모습은, 솔직히 스스로 봐도 봐 줄 만했다.
발랄한 색감의 분홍색 머리에, 순웨딩드레스.
나비 날개처럼 하늘거리는 베일과 그것을 고정하고 있는 황홀한 빛깔의 에메랄드 티아라.
완벽한 오월의 신부 그 자체였다.
지금은 사월이긴 하지만, 뭐.
문득 지구에 두고 온 단짝 친구가 떠올랐다.
‘소연아. 나 결혼해.’
그렇게 말하면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냐고 등짝을 맞겠지?
근데 나 진짜 결혼해, 소연아.
물론 일 년 뒤면 파투 날 가짜 결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 년 동안은 눈 돌아가게 잘생긴 미남의 아내가 될 예정이란다.
‘이렇게 말하면, 이번엔 부러워하려나.’
아니다.
어쩌면 그런 것 다 됐으니 얼른 돌아오기나 하라고 울지도 모르겠다.
잘 지낼까? 소연이는.
그 세계의 내 몸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설마, 그대로 죽어 버린 걸까.
그래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
아무리 가짜 결혼이라곤 해도, 메리지 블루라는 게 정말 있는 모양이다.
괜스레 센치한 생각에 젖은 나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감상에나 빠질 때가 아니었다.
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진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러기 위해선 일단 오늘을 무사히 보내야만 했다.
‘자. 정신 차리자!’
거울을 보며 나는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그런 내 모습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직원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감정이 벅차오르시나 봐요.”
“그야 당연히 북받치시겠죠.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의 연을 맺는 날인걸요.”
……나는 그들의 착각을 모른 척 넘기기로 했다.
* * *
“세…… 상에.”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널따란 대성당의 마차장에 마차가 그득그득 차 있었다.
“설마 이게 다 하객들은 아니겠죠?”
“어머나, 왜 아니겠어요! 그럼 미사를 보러 온 걸까 봐요?”
내 물음이 재밌다는 듯 아네트가 깔깔 웃었다.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난 10차선 도로도 거뜬히 메울 것만 같은 마차 떼를 보며 망연히 넋을 놓았다.
‘이 사람들이 다 오늘 식을 구경한다고!’
도대체 스케일이 얼마나 큰 거야.
가늠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더 긴장이 됐다.
‘으으, 미치겠네.’
딱히 무대 공포증은 없는 나였는데도, 오늘 그 새로운 병을 얻게 될 것 같았다.
“모두 아이린 님의 기쁜 날을 축하하러 온 거예요!”
제가 다 뿌듯하다는 듯 아네트가 흐뭇한 얼굴을 했다.
조안 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사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하루 내 경호 플랜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안 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무심코 묻자, 아네트가 못 말린다는 듯 우후후 웃었다. 들뜬 건지 오늘따라 그녀의 텐션이 굉장히 높았다.
“그새 보고 싶어지신 거예요? 하지만 오늘만은 안 돼요, 아이린 님. 웨딩 로드를 걷기 전에 신랑 얼굴을 보는 건 금물이라구요!”
손가락까지 흔들어 가며 아네트가 말했다.
나는 그냥 그 인간도 나처럼 긴장하고 있을지 궁금할 뿐이었다.
‘아니. 그 사람은 그럴 리가 없겠지.’
본식 직전까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시간이 되자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느적느적 일어날지도 모른다. 사무적인 스케줄을 처리하러 가듯이.
뭐. 실제로도 사무적인 스케줄이 맞긴 맞고.
나는 결혼식이라는 단어의 핑크빛 기류에 잔뜩 취해 버린 아네트와 사용인들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정작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가, 대국민 사기극을 앞두고 복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건 모르겠지.’
괜찮아. 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를 북돋웠다.
사랑에 빠진 신부 연기, 그것만 잘 해내면 되는 거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왜, 배우들도 그러지 않던가. 극단적인 감정이 오히려 더 연기하긴 쉽다고.
오늘의 나는 극단적으로 행복한 신부다!
기합을 불어넣다 보니 어느새 움직여야 할 시간이 되었다.
“출발해요, 아이린 님!”
아네트와 조안 경의 안내를 따라 움직였다. 놀랍게도, 가야 할 길을 따라 바닥에 눈부신 순백색 융단이 깔려 있었다.
융단은 성당 중앙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융단이 계단 위를 향했다.
우리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최근 조안 경과 친애하는 예비 신랑의 지도를 받아 운동하지 않았더라면 힘에 부쳤을지도 모를 만큼 많이 올랐다.
몇 층 정도 올랐을까, 드디어 계단도 끝이 났다.
다 오른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벽을 따라 선 성기사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경례했다. 내가 걸어갈 때마다, 마치 파도를 타듯이.
기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걸어가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기사가 거대한 문을 열어 주었다.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사월의 햇빛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뜬 순간.
내 머릿속이 찰나 간 하얗게 변했다.
“아…….”
나지막한 탄성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먼저 밖을 향해 길게 뻗은 모양의 테라스가 보였다.
그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면, 땅에 알록달록한 색채가 가득했다.
처음엔 꽃밭이 펼쳐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알록달록한 색깔들은, 하나하나가 사람들이었다.
‘맙소사.’
수도 사람의 반은 결혼식에 참석할 거라던 한 영애의 말이 떠올랐다.
그땐 그게 과장이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어쩌면 사실일지도 몰랐다.
‘무슨…… 스케일이.’
차라리 내 앞에 CG가 펼쳐져 있다고 하는 쪽이 믿기 쉬울 것 같았다.
“와아아!”
내 모습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환성과 박수 소리.
나는 바보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이번 결혼식에 대해서 나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신부는 준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 안 된다는 레하트 제국의 미신 때문이었다.
내가 함께한 건 오로지 드레스나 장신구, 내 몸에 걸칠 것들을 결정하는 일뿐이었다.
‘기절할 거 같아.’
내게 무대 공포증이 없다는 말은 다 취소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손…… 손이라도 흔들어야 하나?’
영화에서 보면 다들 그렇게 하던데……!
소심하게 한쪽 손을 살짝 들자, 땅을 메운 하객들이 팔까지 흔들며 좋아했다.
“와아아아!”
“성녀님이시다!”
기쁘게 외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감격하기보단 죄책감을 느꼈다.
난 아마 지옥 갈 거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사기를 치다니!
그나저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이 지옥 갈 동지는 어디 있지?’
이안의 모습이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