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61)

36화

“…….”

“일단은 칭찬을 해 줄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말 이안 에스테반의 부인 자리를 꿰차다니. 제법이잖아.”

“…….”

“우린 네가 지나치게 무모한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했지. 열흘 안에 시체가 돼서 나올 거라는 쪽에 십만 마르스는 걸려 있었다구. 알아?”

내게로 슬며시 몸을 숙인 놈이 불쾌한 목소리로 속삭임을 이어 갔다.

“어떻게 저자를 꼬드겼지? 스캔들을 진정시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세 치 혀를 놀렸나? 네가 그리 순발력이 좋은 줄은 몰랐는데. 하긴, 뒈지기 직전엔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고들 하지.”

낮고 음험한 목소리가 킥킥거렸다.

“뭐, 아무튼 결과적으로 넌 좀 더 쓸 만한 패가 됐어. 폰이 나이트로 진화한 셈이지. 축하해.”

나는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서연임을, 더 이상 이자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됐다.

나는 가늘게 떨려 오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지금 내 목숨은, 76번의 목숨은 이자들의 손아귀 안에 달려 있다.

“설마 이안 에스테반이 정말 너와 사랑에 빠졌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부부이니 매일 밤 같은 침대에 들기야 하겠지. 자, 네게 이것을 넘겨주겠다. 귀한 거니까 잘 받도록 해.”

차갑고 단단한 것이 은밀히 내 손바닥 위로 닿아 왔다.

나는 차마 고개 숙여 그걸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이게 뭐죠?”

“흑요석이 박힌 펜던트야. 꽤 예쁘지만 이곳 성당 놈들에게 지니고 있는 걸 들켰다간, 글쎄. 아마 화형당할걸?”

그 말을 들으니 손에 쥔 펜던트가 마치 송곳의 끝처럼 느껴졌다.

나인 길드원이 쿡쿡 웃었다.

“이걸 매일 밤, 최소 십 분 이상은 이안 에스테반 근처에 두도록 해. 한 침대 안이면 그럭저럭 범위 안에 들 거야. 그 이상 멀어지면 곤란하고.”

“…….”

“자아. 어렵지 않지? 네가 그냥 품에 안고 자기만 해도 되는 거잖아.”

마치 유치원생을 타이르듯 나인 길드원이 말했다.

나는 펜던트를 꾹 쥐었다.

성당 사람들에게 들켰다간 화형당할 만한 물건.

그만큼 사악한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시작됐구나. 이안에게 거는 사술이.’

원작에서는 어떤 흐름으로 나인이 이안에게 사술을 거는 데 성공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서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운명이 달라졌다. 이 새로운 운명 속에서, 이안에게 사술을 거는 매개체는 나. 즉 76번이 된 것이다.

나는 메마른 입천장을 혀로 축이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죠?”

“그것까진 네가 알 바 없잖아?”

길드원의 목소리에 순간 짙은 짜증이 배었다.

그때였다.

타는 듯한 고통이 허벅지 위를 지졌다.

“흐윽…….”

절로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나는 간신히 억눌렀다.

허벅지, 지난번 나인의 문신이 떠올랐던 부근이 인두로 지지는 듯 아팠다.

고통을 참느라 잔뜩 얼굴이 일그러진 내게 길드원이 더 바짝 다가왔다.

“건방지게 뭘 묻는 거야. 칭찬 좀 해 줬다고 신났어? 그래 봤자 넌 체스판 위 장난감인걸.”

“윽…….”

“잊지 마. 네 인생은 우리 손에 달렸다는 거. 그래도 약속할게. 이번 일만 성공하면, 노예로선 상상할 수 없는 보수를 줄 거야. 그래 봤자 평민도 못 되는 우리 노예지만…… 그래도 돈이 있으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고, 예쁜 옷도 입을 수 있잖아. 좋지?”

좋겠냐, 이 개자식아.

서서히 얼굴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방금 이자는 시동어조차 읊지 않았다. 그런데도 순식간에 내게 이만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에서 내 목숨도 끊어 버릴 수 있겠지.

내 인생이 이자들 손에 달려 있다는 건 내 허풍이 아니었다.

“감사한 줄 알아. 우리 덕분에 하찮은 네가 잠깐이나마 성기사단장의 여자라도 돼 볼 수 있었던 거잖…….”

“아이린?”

낮은 미성이 귓가를 울렸다.

나는 뻣뻣이 몸을 굳혔다. 이안의 목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마침 유리 테이블 위로 얼굴이 비쳐 보였다.

굳어 있는 입꼬리를 풀고, 떨리는 눈동자를 바로 하고.

짧게 심호흡을 한 뒤에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 이안 님.”

루시안과 이야기하고 있던 이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안색이.”

이안의 미간이 살풋 좁아졌다.

“왜 이럽니까.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의 시선이 이번엔 내 옆에 선 나인 길드원을 향했다.

길드원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안이 말했다.

“누구지? 이름과 소속은?”

나는 질끈 주먹을 쥐었다.

이안을 보는 순간, 마치 수면 위로 끄집어 나와진 듯 안도감이 들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이안을 보며 안도감 따위를 갖다니.

나인 길드원이 이안을 향해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제야 길드원의 얼굴을 처음 바라보았다. 그는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게 속삭이던 것과는 정반대로,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 길드원이 말했다.

“하하, 단장님께서도 참 딱딱하셔라. 비첸 남작가의 에드워드라고 합니다.”

“에드워드 비첸이라.”

이안이 읊조리듯 그 이름을 말했다.

신원을 밝혔지만 에드워드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차디찼다.

“그래서, 내 신부에겐 무슨 용건으로?”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하하.”

“가벼운 담소를 듣던 얼굴이 아닌데, 내 신부께선.”

이안이 찌푸린 얼굴로 내 표정을 훑었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찌를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속 살을 꼭 깨물었다.

허벅지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가 온몸을 잠식했지만, 감정적으로 굴 때가 아니었다.

‘정신 차려야 해.’

나는 활짝 웃었다.

아주 활짝.

“이분이 재밌는 얘길 많이 해 주셔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이안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자, 이안은 믿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재밌는 얘기?”

“네. 굉장한 이야기꾼이세요. 너무 열중해서 들었나 보네요. 제가 자릴 오래 비웠죠? 지금 돌아갈게요.”

“잠깐.”

발걸음을 옮기려는 나를 이안이 멈춰 세웠다.

“루시안.”

“예! 단장님.”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루시안이 이안의 부름에 얼른 다가왔다.

이안이 스윽, 고개를 기울이며 에드워드를 내려다보았다.

“에드워드 비첸이란 자에 대해 조사해 봐라. 특히 평판에 대해.”

나는 깜짝 놀라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 안색이 엉망이었나?

마지막으로 확인한 얼굴은 분명 멀쩡했었다. 평소보다 약간 하얗긴 했지만, 그리 다를 것은 없었다.

“예, 단장님.”

“이안 님, 하하. 절 의심하다니 너무하십니다. 저는 그저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것뿐인걸요.”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

이안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에드워드는 당황한 것 같긴 했지만, 완전히 궁지에 몰린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 에드워드 비첸이란 신원 자체에 문제가 없는 거겠지.

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곤, 얼른 표정을 바꿔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님, 이분이 무안하시겠어요. 그나저나 이 젤리 좀 드셔 보실래요? 엄청 달고 향긋하던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뷔페 테이블 위 분홍색 젤리를 집어 이안의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이안이 무슨 짓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빨리요, 빨리. 손 아파요.”

내 애교에 모두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안 역시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곧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나는 또 소리 낮춰 속닥거렸다.

“먹을 만하죠?”

“더럽게 답니다만.”

젤리 때문에 살짝 뭉개진 발음으로 이안이 짜증을 냈다.

그럼에도 뱉지 않고 씹어 삼키고 있으니, 장하다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빨리 떠나지 않고 뭐 하냐는 물음을 담아서.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부디 좋은 밤 되시길.”

“아, 신원이 확인되시기 전까진 저와 함께 있어 주셔야겠습니다.”

루시안이 방긋 웃으며 에드워드를 데리고 멀리 떠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에드워드의 뒷모습을 잠깐 노려보았다.

망할 자식. 하필 이런 날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물건이나 떠맡기고.

“그냥 이따위 것, 증발해 버렸으면 좋겠…….”

‘어라?’

오른손을 꾹 쥐어 본 나는 멍청히 눈을 깜빡거렸다.

없었다. 펜던트가.

방금까지만 해도 이 손에 쥐고 있었는데.

“아이린? 또 왜 그럽니까?”

이안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젤리 또 드실래요?”

“아뇨.”

절대 싫다는 듯 이안이 단호히 말했다.

그 얼굴에 놀리듯 씩 웃으면서도 나는 속으로 패닉에 잠겼다.

‘어디 갔지?’

흘렸나?

나는 슬며시 바닥을 훑어보았다. 역시 펜던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그런 물건을 흘릴 리 없었다.

“저 남자가 정말 이상한 소린 안 했습니까?”

“정말 안 했어요. 걱정 마세요.”

“걱정한 게 아닙니다. 결혼 전야제에 다른 남자와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는 신부가 어딨습니까.”

“아, 그런 문제였어요? 죄송해요. 은근히 독점욕이 있으시다니까.”

“독점욕 문제가 아니라…….”

이안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거의 하얗게 변해 있었다.

펜던트가 대체 어디로 갔지?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레하트 제국 귀족 문화에서 이 말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단 뜻이기도 했다.

이안은 살짝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아이린 님, 안내해 드릴게요!”

이안의 눈짓에 아네트가 얼른 내게 따라붙었다.

그래도 다행히 화장실 안까지 따라오진 않았다.

혼자 남은 나는 내 몸을 구석구석 더듬었다.

흘리진 않았다. 그건 분명했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대체, 그새 펜던트가 어디로…….”

그때였다.

손에 아까와 같은 차가운 무게감이 돌아왔다.

‘어?’

나는 멍하니 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처럼, 손안에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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