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정신 차리자. 이서연.’
나는 황급히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나는 대답 없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옅게 의아함이 배인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다음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마치 말 잘 듣는 학생 같은 말투.
이안과는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말투였기에, 나는 그제야 현실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흠, 그러니까.”
괜히 헛기침하며 내가 말했다.
“중요한 건 저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거예요. 그것만 하셔도 대부분 속아 넘어갈걸요.”
“시선을 안 떼는 것.”
내 말을 곱씹듯 되풀이한 이안이 물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당연하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못 뗀다고요. 제가 더워하진 않는지, 피곤한지, 목말라 보이진 않는지 전부 탐색하겠단 기세로 쳐다봐야 해요.”
나도 뭐 대단한 연애 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인들과 외부 매체를 통해 학습한 덕에 쌓인 경험치가 있었다.
“흐음.”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이안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따라 제 말을 굉장히 잘 들어 주시네요.”
“그야 이런 방면으론 가르침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없잖습니까.”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내가 아무리 실전 경험이 부족해도, 평생 추기경을 목표로 이성 보기를 돌같이 했을 이안보단 사정이 나을 터였다.
“그리고, 음. 이건 당연한 거긴 하지만, 이안 님께서 따라 하실 수 있을지 조금 의심이 되는데요.”
“뭔데 그럽니까.”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곤 말했다.
“웃어 보세요. 절 보면서.”
이안의 얼굴에 살짝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그게 뭐가 어렵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가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한쪽만.
“그건 비웃음이잖아요!”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어요. 누가 자기 부인을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나요?”
이안이 제 입꼬리를 매만졌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번에 제가 목도 휘두를 때, 막 웃으셨잖아요? 그때를 떠올려 보세요.”
“아. 그땐 비웃었던 게 맞습니다만.”
“자랑이십니다!”
이 인간이 진짜……!
내가 울컥하자 이안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지만, 춤을 출 때 지을 만한 은은한 미소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이게 아닌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이안의 입가가 닿았다.
걸핏하면 사람을 협박하고 비웃는 성기사단장의 입매는, 의외로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뭐 하는 겁니까.”
이안이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나는 홱 그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계셔 보세요. 결혼식이 코앞이라고 하신 분은 이안 님이시잖아요?”
“…….”
다시 다가가자 이안이 이번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이안의 입매를 위로 살짝 끌어올렸다. 양쪽을 전부.
“이렇게 살짝만 미소를 지으시면 돼요. 과해도 이상하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안은 내가 만져 준 그대로 옅은 미소를 띤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엔 나를 향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지금 자신이 잘하고 있냐고 묻는 듯한.
“…….”
미소를 유지하느라 이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덕분에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말없이 내가 손본 작품을 올려다보았다.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이안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생소함이 더해진 탓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잠시 순수히 눈앞의 미모를 감상하고 말았다.
‘……과연, 여주인공의 마음을 단번에 훔쳐 갈 만한 얼굴이긴 하네.’
못 볼 것을 본 듯한 기분에 입안이 말랐다.
나는 뒤늦게 이안에게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
“일단은 잘하셨어요. 미소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죠? 결혼식까지 자습이에요.”
“숙제가 생길 줄은 몰랐군요.”
마침내 입을 연 이안이 금세 평소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난 그제야 이안을 다시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저만 노력해야 할 줄 아셨어요? 같이 노력해야죠. 이렇게 어마어마한 사기극을 성공시키려면.”
“그야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안이 순순히 납득했다.
두 사기꾼은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결혼식까지 앞으로 사흘.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만 할 때였다.
* * *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침실에서 눈을 뜬 나는 비장히 천장을 노려보았다.
‘오늘인가.’
성녀 임명식 날에도 이 비슷한 각오로 일어났던 것 같은데.
에휴, 이놈의 인생. 며칠 단위로 각오를 새롭게 갱신해야 하는구만.
그래도 오늘은 성녀 임명식만큼 두렵고 겁나진 않았다.
실패한다고 해서 목이 날아갈 리는 없을 테니까.
다만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수도 사람들 절반은 이 결혼식에 참석할 거라잖아.’
후우, 나는 심호흡을 했다.
레하트 제국에서 결혼식은 삼 일간 이루어진다.
첫날은 즐겁게 먹고 마시는 전야제.
둘째 날은 대망의 웨딩 데이.
셋째 날은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나며, 남은 하객들은 또 신나게 먹고 마시는 날이었다.
오늘은 그중 첫째.
즉, 본식이 있을 둘째 날보다는 덜 긴장되는 날이었다.
전야제는 저녁부터 시작된다. 비교적 한가한 오전 시간, 메르시 씨가 나를 찾아왔다.
“티아라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메르시 씨가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직원들이 뿌듯한 표정으로 커다란 보석함을 짠 개봉했다.
“……우와.”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나는 순간 넋을 놓았다.
티아라 정중앙에 박힌 큼지막한 에메랄드가 단연 시선을 끌었다.
나는 여태 내가 딱히 보석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반짝거리는 보석은 예쁘긴 하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한 거액을 쏟아붓는 것까진 이해가 안 된다는 파였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보석에 까마귀처럼 홀려 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아름다워요.”
나도 모르게 내가 중얼거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홀릴 것 같은 에메랄드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황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메르시 씨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역작입니다. 베르닐 광산에서 채취한 최상급 에메랄드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신의 한 수였지요.”
“최상급 에메랄드…….”
“이 정도 되는 물건은 광산 측에서 보관만 하고 몇 년간 내놓지 않아 값이 오르는 게 정석인데, 웬일로 흔쾌히 아이린 님께 판매 허가가 났다고 합니다. 잘된 일이지요.”
“정말 그러네요.”
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뭔진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게 분명한 이 보석을 하루만이나마 머리 위에 얹어 볼 수 있다니 참 신나는 일이었다.
‘이러다 눈이 하늘 끝까지 높아져서 일 년 뒤에 고생하는 거 아냐?’
순간 치밀어 오른 의문에 나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아닐 거다. 내 소시민적 감성이 고작 일 년이란 세월에 굴복할 리 없었다.
메르시 씨와 직원들이 돌아간 뒤, 점심 무렵부터 아네트와 사용인들이 날 치장해 주기 시작했다.
오늘은 전야제이므로 웨딩드레스만큼 거창한 옷을 입진 않았다.
대신 나비처럼 하늘거리고, 살짝은 몸에 달라붙은 드레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본 나는 살짝 놀랐다.
그 안에 있는 건, 근 한 달간 매일 보아 왔던 ‘아이린 그레이스’와 약간 달랐다.
‘평소에 입던 느낌의 옷이 아니네.’
엘룬교가 성녀에게 복장을 강제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입는 옷은 대부분 순백색의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옷이 많았다. 몸의 라인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드레스는 고혹적인 보랏빛을 띤 데다가, 꽤나 몸에 달라붙었다.
‘이안은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나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장하고 있을까?
아니, 그 사람 성격에 얌전히 사용인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마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내 예상은, 몇 시간 뒤 완벽히 박살 났다.
“아이린 님, 단장님께서 도착하셨어요.”
아네트가 가까이 다가와서 흥분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오늘 종일 아네트는 나보다 더 신이 나 있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설핏 웃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라 해요.”
창밖으로 내다보이던 해가 어느덧 저물었다.
그 말인즉, 전야제가 시작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미 연회가 열릴 유리 온실에는 수많은 하객이 도착해 있을 터였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셨어요?’
그런 여상한 인사말을 건넬 생각이었는데.
뒤로 고개 돌린 순간, 나는 할 말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
세상에. 맙소사.
나는 기겁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나는 이안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다짜고짜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나를 보며 이안은 꽤 놀란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이안은 안중에도 없이, 그의 앞까지 다가가 이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 이안 님.”
“……왜 그러십니까?”
“오늘 복장 대체 누가 고른 거죠?”
이안은 푸른 빛이 도는 얇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입는 딱딱한 기사단 정복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쪽이 훨씬 캐주얼한 분위기였다.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 드레스 셔츠…….”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이안의 셔츠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너무 파였잖아요!”
이안에게로 고개를 가까이 한 채 나는 황급히 속닥거렸다.
흰색 드레스 셔츠는 목 부근이 정복보다 훨씬 더 파여 있었다. 쇄골은 물론 그 아래까지 살짝 드러날 만큼.
이안이 다소 황당한 얼굴로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가 파였단 겁니까? 지나다니는 남자 모두 이 정도는 입고 있던데.”
“그건 다른 사람들이고! 당신은 그러면 안 되죠. 왜 그걸 모르세요?”
다른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이고, 이안은 이안이었다.
다른 남자들은 고작 목덜미 좀 파였다고 이렇게 눈 둘 곳이 없어지는 분위길 풍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달랐다. 평소에 기사단 정복으로 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하는 그가 이렇게 자유로운 옷차림을 걸치니 충격이 더욱 컸다.
“대체 무슨 소린지…… 아니, 인사도 전에 다짜고짜 화낼 정도로 잘못된 옷입니까?”
이안이 살풋 미간을 찡그렸다. 뭐가 잘못된 건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이마를 탁 짚었다.
이 죄 많은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