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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2/161)

32화

물론 약속한 대금인 오십만 마르스는 엄청난 거액이었지만, 그렇다고 괜히 도움 따위를 약속했다간 언제 어디서 더 큰 손해를 보게 될지 몰랐다.

내가 단호히 말하자 리젤로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멜로디의 얼굴로 하니 저 얼토당토않은 표정이 그럴듯해 보여서 문제였다.

“그럼 용건은 더 없으신 거죠?”

나는 조안 경 쪽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조안 경이 이상스럽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긴 해요.”

하지만 이어진 리젤로의 말에 하마터면 대놓고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이안이 오기 전에 빨리 내보내야 하는데. 나는 조급해진 속마음을 감추며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성녀님의 그 예지 능력.”

나는 살짝 몸을 굳혔다.

“나에 대한 미래도, 그 능력으로 본 적이 있나요? 가령 내 계획을 꿰뚫어 볼 수 있다든지.”

그렇게 묻는 순간, 웃고 있는 멜로디의 상냥한 눈매가 문득 섬뜩하게 느껴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적은 없어요. 아시다시피 엘룬 님은 성녀들에게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주시잖아요. 제 능력도 남을 돕기 위한 능력이지, 사생활을 침해하기 위해 있는 능력이 아니랍니다.”

“아하.”

리젤로가 밝게 미소 지었다.

“그럼 됐습니다! 혹시나 성녀님께서 내 사업 계획을 미리 알아낼 수 있다면 큰일이지 않나 싶었거든요. 미리 선수 쳐서 특허를 낼 수도 있잖아요.”

나는 질색하며 부정했다.

설령 내게 진짜 예지 능력이 있다 해도 제정신이 박혔다면 마탑주를 엿 먹일 일은 없었다.

“그럴 일 절대 없으니 안심하시죠.”

“하하, 그럼 전 성녀님 말만 믿고 맘 놓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직도 할 말이 더 남아 있어?

살짝 경계하는 눈으로 리젤로를 바라보자, 그가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탑에 자주 찾아와요. 한 번에 이만한 거금을 쓰셨으니, 앞으론 최고 고객 대우를 해 드리죠.”

마탑의 최고 고객 대우?

솔직히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할인도 되나요?”

“한 번에 오십만 마르스를 쾌척하시는 분이 할인을 원하십니까?”

재밌다는 듯 리젤로가 킥킥거렸다.

당연히 원하지! 천만 마르스는 분명 굉장한 거액이지만, 마르지 않는 샘물은 아니었다.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데 돈이 얼마나 들지도 알 수 없었다.

“흐, 흠. 그, 있는 사람들이 원래 더하다잖아요.”

“그렇죠. 본인이 그 말을 하는 건 처음 보지만.”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멋쩍게 웃음만 흘렸다.

마침내 리젤로가 돌아가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성녀님의 시간을 뺏는 걸로 하죠.”

“아, 돌아가시나요?”

“오 분이라도 더 있었다간 성녀님이 내 엉덩이를 뻥 차서 내쫓으실 것 같은데요.”

헉.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티를 그렇게 많이 냈나.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 굉장히 심각한 범법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라고요.”

“하하, 걱정 마세요. 아무도 눈치 못 챌 테니.”

방긋 웃으며 리젤로가 말했다.

천재 마탑주의 말이니 그래도 신뢰가 가긴 했다.

“그럼 안전히 돌아가세요.”

절대 들키지 말고!

그런 바람을 담아 나는 리젤로를 배웅했다.

“오늘 멜로디 말 들어 줘서 너무 감사했어요, 아이린 님!”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리젤로가 말투를 싹 바꿔 생긋생긋 웃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마탑주가 아니라 배우를 했어도 대성했을 인재다.

‘멜로디 양은 리젤로가 본인 모습을 한 채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고 있단 걸 알까?’

알게 된다면 거의 고소감이었다.

리젤로를 보낸 나는 소파 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진이 쪽 빠진 기분이었다.

“아이린 님! 괜찮으세요? 찻잔을 더 채워 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좀 피곤한 기분이 드는데, 기분만 그런 것 같아요.”

실제로 내 몸은 완전히 쌩쌩했다.

좀 지나치리만큼.

어제 오후부터 이어진 현상이었다. 온몸에 활기가 넘치다 못해 당장 뜀뛰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설마 코델리아가 타 줬던 차의 효능이 아직도……?’

아침부터 메르시 씨와 카탈로그를 가지고 씨름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성녀의 능력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나는 감탄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이 넘치는 활기를 어떻게든 소비해야겠어.

“아네트 양, 산책을 좀 다녀오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앗, 바로 채비할게요!”

삼십 분 뒤 아네트가 깜찍한 피크닉 바구니를 가지고 왔다.

“장미 정원으로 피크닉 가요, 아이린 님!”

“좋아요! 조안 경도 가실 거죠?”

“저야 어딜 가든 아이린 님을 보필하는 것이 의무이니까요.”

말은 딱딱하게 해도 어쨌든 같이 간다는 소리였다.

피크닉을 간다는 생각에 나는 기분이 꽤 좋아졌다.

좋아, 자연을 바라보며 생각을 좀 정리해 보자.

힘차게 방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으헉!”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 돌린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딱딱히 굳었다.

“루시안 씨?”

“아이린 님! 제가 온 걸 어떻게 아셨나요? 바로 문을 여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아, 이럴 때가 아니라.”

루시안이 다급히 내게 용건을 전했다.

“단장님께서 아이린 님을 찾고 계십니다. 혹 시간 괜찮으실까요?”

“……저를요?”

쿵.

내 심장이 나락까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설마.

리젤로가 왔다 간 걸 들킨 건 아니겠지.

“……혹시 화가 나셨나요?”

“네? 아뇨! 단장님께서 아이린 님께 화를 내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이상한 소릴 다 한다는 듯 루시안이 허허 웃었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인간은 포커페이스가 장기이자 특기니까.

“……갑시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아네트 양. 조안 경. 피크닉은 다음에 가요.”

물론 내가 살아 있다면.

둘을 돌아본 나는 아련히 말했다.

“다녀오십시오, 아이린 님!”

내 긴장한 표정에 덩달아 기합이 들어간 아네트가 외쳤다.

나는 조안 경과 함께 루시안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걷는 우리를 향해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눈길이 쏟아졌다.

‘저기 성녀님이 지나간다’는 속삭임도 함께.

평소라면 부담스러웠을 시선들이 지금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루시안에게 가까이 붙어 속닥거렸다.

“이안 님께서 심기가 안 좋아 보이시던가요?”

“네? 아니요! 아까부터 이상한 걱정을 하시네요, 하하. 저희 단장님께서 간혹 성질이 고약…… 아니, 흠.”

루시안이 큰 말실수를 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저 말해 봐요.”

“그, 흐흠. 간혹 냉정히 구실 때가 있지만, 그럴 만한 사안이 있을 경우에만 그러신답니다. 아무 때나 그러시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하물며 성녀님께라면야 훨씬 정중하시죠.”

그럴 만한 일이라.

잠입한 마탑주와 비밀리에 독대한 것 정도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겠지?

와달달 떠는 동안 나와 루시안은 한 문 앞에 도착했다.

이미 몇 번 와서 익숙해진, 이안의 집무실이었다.

루시안이 정중히 노크했다.

“단장님, 아이린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모셔 와라.”

안에서 들려오는 낮은 미성이 마치 저승사자의 것 같았다.

나는 후우우,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아직 이안이 나를 왜 불렀는지 이유가 정해진 건 아니었다.

어쩌면 리젤로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루시안이 열어 준 문 사이로 발을 들이밀었다.

“왔습니까?”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이안이 나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깃펜을 느슨히 쥔 그의 책상 위에는 종이들이 널려 있었다.

그것들을 슥 밀어내며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콧대 위에 은색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이안 님. 안경 쓰세요?”

이안을 만나자마자 건네려 했던 떠보는 말 대신, 뜬금없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안경을 쓴 이안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문관스러운 모습인데,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렸다.

은테 안경 때문에 한층 더 서늘해 보이는 그는, 건드렸다간 그 손이 그대로 베일 듯 날카로워 보였다.

“가끔만 씁니다. 지금처럼 봐야 할 글자가 모래알만큼 많을 때라든지.”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목소리는 희미한 피로감과 짜증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철야라도 한 걸까?’

나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들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이 레하트 제국을 이안 혼자 책임지는 줄 알 것 같은 양이었다.

“그나저나.”

이안이 안경을 벗으며 내게 다가왔다.

헉.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갑작스러운 안경 속성에 당황한 나머지 중요한 걸 순간 잊었다.

안경이 없어진 이안은 한결 더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왜 그럽니까? 얼굴이 새하얀데.”

본론을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던 이안이 날 마주하곤 이마를 살풋 찡그렸다.

나는 얼른 변명했다.

“제 얼굴이 왜요? 저는 원래 창백한 편이랍니다.”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왜 그댈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죠.”

히익.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알고 있는 건가.’

내 입으로 알아서 불라는 건가? 너무 잔인한 처사였다.

침착하자, 이서연.

나는 급히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안이 어디까지 아는지 몰랐으니, 일단은 시치미를 떼 보는 게 최선이었다.

“글쎄요.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요?”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얼토당토않은 소릴 들었다는 표정으로.

“잊었습니까?”

잊었냐니?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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