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61)

30화

살롱은 한창 행운의 색 이야기로 뜨겁던 차인 모양이었다.

다들 내게 자기 색은 뭐냐고 간절한 눈으로 물어 왔다.

현대의 한국에선 한참 전에 유행 지난 소재로 열 오른 사람들을 보니 약간 귀엽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퍼스널 컬러리스트도 아니고, 이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어울리는 색을 찾아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진정해요.”

코델리아가 새침한 얼굴로 딸깍,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이린 양이 부담스러워할 겁니다. 권능이라는 것이 항상 발현되는 편리한 힘이 아니에요. 나도 항상 그대들에게 내 힘이 들어간 차를 타주진 않잖아요?”

“아,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아이린 님.”

“저희가 방정맞았어요.”

코델리아의 위엄 있는 일침에 다들 얌전해졌다.

코델리아는 흠, 목을 고르곤 내게 말을 건넸다.

“차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혹시 차 맛이 어떤가요? 아이린 양.”

“차 맛이요?”

나는 방금까지 별생각 없이 홀짝이던 차를 내려다보았다.

차에 대해 큰 조예가 없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평소에 마시던 차들보다 향긋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것 같았다.

나는 솔직히 그 감상을 전했다.

“꽃 냄새가 무척 좋아요. 어떤 꽃으로 우린 차인가요?”

“그래요? 궁금한가요?”

코델리아의 눈에 찰나 간 기쁜 빛이 스쳤다.

곧 다시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간 그녀가 쥘부채로 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뭐, 별건 아니지만. 내가 피운 꽃잎을 한 장 띄웠어요. 대단한 양은 아니지만.”

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차가 다시 보였다. 무려 성녀님의 능력이 들어간 차였다니!

“이럴 수가. 정말 영광이에요, 코델리아 님.”

“영광이라뇨. 흠. 정말 별것 아닙니다.”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며 코델리아가 말했다.

“그 꽃을 피우는 데 꽤 오래 공을 들였어요. 중요한 얘긴 아니지만.”

“그렇게 정성 들여 피우신 꽃을 제게 대접해 주시다니. 감격이에요, 코델리아 님.”

“흠, 뭐…… 별건 아니었는데.”

쥘부채를 괜히 펄럭거리며 코델리아가 말했다.

나는 얼른 차를 더 홀짝여 보았다.

플라세보 효과인가? 확실히 몸 깊은 곳에서부터 기운이 솟구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벌써 기운이 샘솟는 것 같아요.”

“무, 무슨. 벌써 효과가 나타날 리 없잖아요.”

터무니없다는 듯 대꾸하며 코델리아가 부채를 더 빠르게 펄럭거렸다.

“코델리아 님, 저도 금세 기운이 나는 것 같습니다.”

아덴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코델리아가 깜짝 놀라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응? 아덴의 차엔 권능으로 기른 꽃잎을 넣지 못했는데…….”

아덴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금이 갔다.

“미안해요. 아이린 양을 위해 쓰느라 꽃잎이 모자라서. 하지만 그것도 좋은 잎으로 우린 차이니 효과가 있을 거예요.”

“물론…… 입니다. 정말 향이 좋군요.”

아덴이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날 돌아보는데, 역시 눈빛이 곱지 못했다.

‘어허, 표정 관리까지 잘해야 최고 미남 칭호가 울지 않지.’

저래서야 내년 ‘레하트의 꽃’ 당선은 물 건너갔다. 쯧쯧.

“아. 혹시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한 영애가 화젯거리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마탑에서 이번에 새로운 장난감을 또 발명했대요.”

생각지도 못한 마탑 주제에 나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아, 휴대용 불꽃놀이 키트 말이죠? 신기하긴 하더라고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면 그 모양 그대로 불꽃을 쏘아 올릴 수 있다니!”

“어휴, 막냇동생이 사 달라고 어찌나 어찌나 조르는지. 결국 사용인을 마탑에 보냈는데, 글쎄 줄을 한참 섰다지 뭐예요.”

“이번 대마탑주는 모르긴 몰라도 확실히 돈방석에는 제대로 앉았겠네요.”

“그러게요. 참 안타깝죠? 그런 돈으로도 얼굴 가득 핀 곰보는 고칠 수가 없다니.”

으응?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어머, 곰보요? 제가 듣기론 얼굴에 비늘이 막 나 있다던데.”

“제가 듣기론 검버섯이 엄청나대요.”

“다들 틀렸어요. 제 정보가 확실해요. 주먹코가 어마어마해서 콤플렉스 때문에 가면을 절대 안 벗는 거라고 하던걸요?”

으음.

나는 탁구공처럼 쉴 새 없이 오가는 이야길 들으며 슬그머니 레이를 돌아보았다.

레이 모나한, 그러니까 리젤로가 순진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생긋생긋 웃어 가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군요. 주먹코라. 흥미롭네요.”

그런 추임새까지 넣어 가며.

나는 주먹코는커녕 깎은 듯 잘 빠진 리젤로의 코를 쳐다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낯짝 한 번 두껍구만.’

면전에서 자기 뒷담이 오가는 걸 저렇게 재미있게 듣는 이는 세상에 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대마탑주, 리젤로 로물루스는 어딜 가든 절대 가면을 벗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낭설들이 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꺼냈던 영애가 결론짓듯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능력 있고 부자인데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뭐겠어요? 절대 안 벗는 가면 아래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거예요. 확실해요! 아이린 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심지어 리젤로의 시선마저도.

영애가 재차 물었다.

“분명 얼굴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거겠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윤 그거밖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음.”

왜 저한테 이러세요.

나는 리젤로의 빤한 시선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게요. 분명 엄청 못생겼을 듯!’ 하고 맞장구라도 쳤다간, 밤길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유능하고 뛰어난 마탑주님께서,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일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외모를 크게 보는 편은 아니어서.”

“…….”

“…….”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 어째서일까.

주변이 정적으로 얼어붙었다.

몇 초 뒤 내게 말을 걸었던 영애가 미묘하게 썩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 하. 그러시군요, 아이린 님. 외모를 보는 편이 아니셔서, 이안 님과 약혼을…….”

“정말 신뢰가 가네요……! 하, 하, 하.”

음. 뭔가 큰 말실수를 한 것 같군.

괴이쩍게 웃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황급히 수습을 시도했다.

“사실 제 원래 이상형은 좀 다정하고 착하게 생긴 타입이긴 했거든요. 굳이 꼽자면 강아지상이랄까?”

“…….”

“그렇군요. 이상형에 맞지 않는 미남과 약혼하셔서 너무 힘드시겠어요…….”

돌아오는 반응은 이번에도 싸늘했다.

음. 내가 또 내 무덤을 팠군.

수습이 틀렸음을 직감한 나는 다른 미끼를 던지기로 했다.

“그래도, 운명적인 첫 만남 앞에선 이상형 따윈 다 소용없더군요.”

“어머!”

“첫 만남이라면, 아이린 님이 억울하게 납치되어 팔려 가시던 걸 이안 님께서 구출하셨다던 그?”

“네, 맞아요.”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차게 식었던 사람들의 눈에 급속도로 흥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안과 미리 말을 맞춰 놓았던 대로 우리의 첫 만남 스토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안이 떨어지려는 마차에서 날 극적으로 구출한 뒤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하고 물었다는 대목에서는 다들 손뼉까지 칠 기세였다.

“이안 님께선 정말 완벽한 기사세요!”

“과연 모든 기사의 귀감이신 분!”

기사들의 귀감은 무슨.

어제 내 자세를 봐 주며 풋풋 웃어 대던 모습을 떠올리니 콧방귀가 나왔다.

어떤 기사가 레이디를 그렇게 비웃나, 그래.

“정말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예요, 아이린 님.”

“역시 지금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연인들 다우세요.”

“두 분 결혼식에 분명 수도 사람들 절반은 참석할걸요?”

‘……그렇게나 많이?’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 이안 에스테반과 성녀의 결혼식인 만큼 화려하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수도 사람의 반이 참석한다고?

‘결혼식장이 터지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결혼식도 겨우 일주일가량 남았네요. 정말 설레시겠어요, 아이린 님.”

“저희도 다 설레는걸요. 호호호. 긴장도 많이 되시죠?”

“긴장…… 그럼요. 많이 되죠.”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긴장이 되긴 했는데, 방금 이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 두 배는 더 긴장됐다.

사람들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세요. 레하트 제국의 결혼식 문화가…… 아시다시피, 좀 짓궂잖아요.”

“어휴, 악습이죠, 악습. 이젠 좀 타파해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눈은 기대감으로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그렇…… 죠?”

나는 일단 애매하게 맞장구를 치며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로.

그런데 놀랍게도 코델리아가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정말, 체통 없이 무슨 그런 전통이 남아 있는지. 흐, 흠. 유감이에요, 아이린 양.”

그렇게 말하는 코델리아의 뺨은 살짝 빨개져 있었다.

‘결혼식 문화가…… 대체 뭔데?’

체통 없는 문화가 대체 뭔데!

결혼식이라 해 봐야 기껏해야 반지 교환하고, 맹세의 키스 하는 게 전부 아냐?

‘뭔데.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은 결혼식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건데.’

나는 급격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 * *

슬슬 모임을 파할 시간이 되었다.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할 즈음, 나는 리젤로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몹시 태연한 태도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초대 감사했습니다, 코델리아 님.”

리젤로가 완벽한 매너로 코델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젠틀한 자태에 몇 귀부인들이 비밀스레 얼굴을 붉혔다.

새침한 태도로 인사를 받은 코델리아가 리젤로를 배웅했다.

‘진짜 이대로 가는 거야?’

나는 좀 얼떨떨히 코델리아 곁에 선 채 리젤로를 함께 배웅했다.

“아이린 님께서도, 오늘 이야기 나누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젤로가 내게도 정중히 인사를 했다.

단순한 인사에서는 딱히 비밀 암호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하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접선하긴 힘들겠지.’

저번처럼 계속 복도에서만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금은 언제 지불한담. 고민하던 순간, 리젤로가 내 곁을 지나쳤다.

그리고 동시에 은밀한 감촉이 손에 닿았다.

‘어.’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리젤로와 지나치는 순간, 그가 비밀스레 건넨 쪽지가 주먹 안에서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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