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나저나 이안 님, 바쁘신 분 아닌가요?”
“바빠도 어쩌겠습니까. 결혼식이 이제 정말 코앞인데.”
“결혼식이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요?”
설마 엘룬 교단에선 결혼식에서도 목도를 휘두르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무력의 신을 모시는 종교라 해도 그건 선을 넘는 거였다.
“무도회가 열릴 것 아닙니까.”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이안이 답했다.
아.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성녀 임명식 날 열렸던 환영 연회에서도 왈츠 타임이 있긴 했지만, 나는 이안이 없다는 핑계로 빠졌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인공인 결혼식 무도회에선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원래는 무용 선생을 붙이려 했는데, 아무래도 무용 이전에 기초적인 체력 자체가 없는 것 같아서.”
“그 정도는 아닌데요……!”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으면 다시 자세 잡아 보십시오.”
목도를 쥐고 다시금 자세를 잡자, 이안이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이 목도를 쥔 내 손등 위를 덮었다.
“각도는 이렇게.”
다음은 구두 끝으로 내 발을 건드렸다.
“좀 더 좁혀 서십시오. 네. 그렇게.”
“……됐나요?”
나도 이렇게까지 몸치는 아니었다. 이안이 쳐다보고 있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안이 잡아 준 자세대로 고정한 채, 나는 불안스레 이안을 돌아보았다.
잡아 준 대로 완벽히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훗.”
그때, 나는 똑똑히 들었다.
이안의 웃음소리를.
나는 황당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우스워?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는 꼴이 불쌍하진 않고, 그냥 웃긴 거야?
“웃지 마세요.”
“안 웃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입가에는 뻔뻔스럽게도 여전히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웃을 줄도 알긴 아네.’
비웃는 거 말고, 픽 헛웃음 흘리는 거 말고.
진짜 웃음을 보는 건 처음인 기분이 들었다.
그 청량한 미소에 눈이 정화되는 것 같…… 긴 개뿔.
대놓고 웃으니까 더 약이 올랐다.
“그럼 이안 님이 시범이라도 한 번 보여 주세요.”
울컥한 걸 누르며 목도를 건네자, 의외로 이안은 순순히 받아 들었다.
검을 들자마자 순간 그를 둘러싼 공기가 바뀐 것 같았다.
‘……각이 예술이긴 하네.’
그저 연습용 목도를 쥐었을 뿐인데, 이안에게서는 날카롭게 벼려진 절제미가 뚝뚝 흘러넘쳤다.
이 모습을 그대로 그려서 『미남의 검술 연습』 따위로 아무렇게나 제목을 지어서 내놓으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것 같았다.
팔을 든 이안이 그대로 목도를 내리쳤다.
그 순간, 희끄무레한 반달 같은 것이 검에서부터 내쏘아졌다.
그리고, 파삭!
반달 모양 빛을 맞은 문고리 잠금쇠가 어이없이 깨져 버렸다.
“흐아아악.”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뒷걸음질 쳤다.
검기? 방금 검기 같은 걸 쓴 거야?
미친.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여기가 소설 속 세계가 맞긴 맞구나. 이건 마법을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잠금장치가 허술하군. 새로 달도록.”
이안이 그렇게 말하며 목도를 내려놓았다.
“예, 옛, 단장님!”
아네트가 잔뜩 기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시계를 돌아본 이안이 내게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여의치 않군요. 내일 또 올 테니 조안 경과 함께 단련해 두십시오.”
“어…… 어? 아, 넵.”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도 방금 본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라는 단어를 소설 속 설정으로 보는 일과, 직접 검기가 날아가는 걸 보는 일은 천지 차이였다.
‘앞으로도 이안한텐 절대 까불지 말아야지.’
난 다시금 그런 다짐을 했다.
* * *
“단장님, 여기까지가 오늘 안에 결재해 주셔야 할 사안들입니다.”
루시안이 건넨 산더미 같은 서류를 바라보며 이안은 이마를 문질렀다.
추기경이 몸져누운 뒤, 그녀가 맡고 있던 행정 업무는 모두 이안에게로 넘어온 상태였다.
추기경의 업무에 성기사단장의 업무, 게다가 머지않은 결혼식 준비까지.
몸이 열 개라도 충분치 않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훗.”
상관에게서 흘러나온 웃음소리에, 루시안은 멍한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방금 웃으신 게 맞나?
이안의 입가엔 정말로 선명한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흐아아악.’
단말마 같은 소릴 내뱉으며 뒷걸음질 치던 모습을 떠올린 이안은 또 픽 웃음을 흘렸다.
처음엔 분명 그냥 자세만 보여 줄 생각이었다. 애꿎은 잠금장치를 부술 생각은 그에게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유치한 짓을 했을까.
‘반응이 우습단 말이지.’
그의 가짜 정혼자, 아이린 그레이스는 종종 상상한 적 없는 날것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가끔 그녀를 자극해 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알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전혀 종잡을 수 없지.’
차라리 전부 손바닥 위처럼 훤히 보이는 여자였다면 좋았으련만.
아이린은 마냥 그렇지는 않았다.
유리병처럼 투명해 보이면서도 아이린은 자신을 전부 내보이지는 않았다.
‘부부 사이에도 비밀은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요.’
아이린의 말을 떠올린 이안은 툭, 툭 탁자를 두드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괘씸하지는 않았다.
모든 걸 까발릴 수 없는 건 이안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계약에만 지장이 가지 않는다면, 아이린이 그 손바닥만 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살든지 제 알 바 아니었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호기심이 가는 것은.
아직 계약 파트너로서 그녀를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단장님. 리칼리온에서 어제도 사망자가 열한 명, 중상자가 스무 명 발생했다고 합니다.”
“요즘 마물이 들끓는다는 그 서부 요새인가.”
언제 웃었냐는 듯 금세 서릿발 날리는 표정으로 돌아온 이안이 물었다.
“예.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파견한 성기사단이 일주일 안으로는 그곳에 도착할 예정인데, 어쩌면 그들로도 역부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봄은 대체로 마물이 얌전한 시기다.
이런 시점에 매일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마물이 들끓다니.
“후속 부대도 보내라. 이참에 뿌리 뽑는 게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루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 * *
나는 책상 앞에 앉은 채, 노트 위로 깃털 펜을 톡톡 두드렸다.
아네트와 조안 경에겐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노라 선언한 상태였다.
결혼식까지 불과 일주일이 남은 시점, 난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드레스 고르기, 장신구 고르기. 머리 스타일은 또 무슨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그래도 다행히 오늘 오전만큼은 자유롭게 휴식할 수 있었다.
‘타임라인을 짜 보자.’
일단 성녀 임명식까지는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성공에 자축할 틈은 없었다. 곧바로 다음을 대비해야 일 년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우선, 지금은 원작 시작 시점으로부터 반년 전.’
원작에서 이안이 황위에 오르는 시점은 대략 일 년 뒤고, 나와의 계약이 끝나는 기간도 그즈음이다.
나는 그사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타임라인을 대략적으로나마 채워 보기로 했다.
지금은 원작이 시작하기 이전 시점이므로 딱히 내가 미리 알고 있는 정보는 없다.
하지만 아주 큰 사건은 원작에서도 여주인공 시점에서 몇 번 회상되곤 했다.
‘가령, 서부 국경 지대 간헐천 폭발 사건이라든지.’
큰 사건이었다. 다행히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라 사상자는 없었지만, 지형이 바뀔 정도로 거대한 자연재해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 그래. 최대 규모 소금 광산도 발견됐었지.’
그 사건으로 소소한 상단을 운영하던 원작 여주의 집안이 쫄딱 망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음. 그런데, 내가 원래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원작 소설에 대한 내용이 신기할 정도로 잘 떠올랐다.
기억을 힘겹게 더듬는 게 아니라, 마치 책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펴 보는 듯 내용을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았다.
내 인생 가장 똑똑했던 고3 시절 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설마 이세계인 보정 같은 건가.’
기왕 줄 능력이라면 천재적인 마법 실력이나 검술 실력인 쪽이 좋은데.
실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돌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이 잘 떠오르는 건 좋은데, 그와 별개로 집중은 되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인이, 왜 이렇게 안 나타나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속 편히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놈들은 나를, 76번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의뢰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생각할 테니까.
이안의 정혼자 자리를 꿰찬 데다가, 성녀 검증까지 받은 날 포기할 리가 없지.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놈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캐낼 여지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조심스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린 님, 약속 시각이 다 되셨어요.”
“아. 금방 나갈게요!”
아네트의 목소리에 나는 생각을 쏟아 내고 있던 노트를 북 찢어 벽난로 안에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타오른 종이가 재로 변하는 것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나는 문을 열었다.
“준비 다 됐어요!”
오늘은 수요일.
즉, 코델리아의 살롱에서 정기 친목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약속 시각에 맞춰 베르나데트 저택에 도착하자, 이미 도착한 상당수의 마차가 보였다.
“오늘도 와 주셨군요, 아이린 님. 안내하겠습니다.”
베르나데트가의 집사가 정중히 내게 안내했다.
살롱에 들어서자 코델리아와 그녀의 손님들이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아이린 양.”
우아하게 인사하는 코델리아와 마주한 순간, 나는 풋 웃어 버릴 뻔했다.
코델리아는 그새 ‘행운의 색’의 신봉자가 되어 버린 듯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파스텔 톤으로 치장하다시피 한 그녀는 봄의 요정 같았다.
“어서 오세요! 아이린 님.”
“성녀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른 사람도 열띠게 나를 반겼다.
나는 모두와 인사하며 슬쩍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있군.’
나는 레이 모나한, 아니. 리젤로와 살짝 눈인사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