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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161)

28화

* * *

연회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파했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조안 경과 아네트의 안내를 따라 방으로 돌아갔다.

내 예지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라시드는 내내 연회에 죽치고 앉아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그런 인간과 계속 한 공간에 있었더니 신경 줄이 더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도 드디어 오늘 하루가 끝이 났네.’

내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보였다.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던 순간이었다.

“아이린.”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 앞, 어둠이 드리운 벽에 이안이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깜짝이야……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묻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그리 곱지 않았다.

‘여태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네 형 때문에 내가 얼마나 성가시고 부담스러웠는데!

물론 이안이 있었다고 해도 딱히 의지가 되진 않았을 것이 뻔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인간이 둘로 늘어서 더 위가 아팠을지도.

‘그래도.’

그래도, 당신은 오늘, 성녀 임명식만큼은 하루 종일 나를 에스코트하기로 되어 있었잖아.

그게 성기사단장의 역할이라며.

이안이 없는 대신 루시안이 내 곁을 지켜 주긴 했지만, 그래도 루시안은 이안이 아니었다.

피곤하기 때문일까. 곱지 않은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나서 나는 이안을 살짝 째려보았다.

정말 살짝만 째려봤는데, 그걸 눈치챘는지 이안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어둠 밖으로 걸어 나오며 그가 말했다.

순순히 사과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추기경 성하께서 몹시 위독해지셔서. 혹시 임종을 맞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떠날 수 없었습니다.”

“……아.”

나는 말을 잃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런 줄은 몰랐다.

나는 낮에 내게 성녀의 관을 씌워 주었던 추기경 성하를 떠올렸다.

신관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건 봤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태의 몸인 줄은 몰랐다.

“지금은…… 괜찮아지신 건가요?”

“일단은.”

이안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나는 이안의 눈 밑에 옅은 피로가 배어 있음을 눈치챘다.

추기경 성하는 이안이 성기사단에 입단한 소년 시절부터 그를 돌봐 준, 말하자면 제2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다.

“들었습니다. 당신이 폐하께 예지를 주었다는 이야기.”

“아.”

역시 거기까지 얘기가 퍼져 나갔구나.

나는 이마를 문질렀다. 내 딴엔 덕담이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보통 충분히 덕담으로 들을 만한 일이었다.

“신경 쓰이세요?”

“드디어 당신이 예지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고무적인 얘기긴 하지요.”

“…….”

나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라시드에게 예지해 준 이후, 다른 사람들도 나를 기대하는 눈으로 계속 흘끔거렸었다.

이안 역시 자기에게도 예지해 달라고 부탁하려나, 그럼 뭐라고 얘기하지.

짧게 고민하던 내게 이안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내 아버지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 맞혔을 때.”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나는 갑자기 첫 만남 때 얘기를 하는 이안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건 본 게 없습니까?”

“다른 것, 이요?”

“가령, ……옆에 있는 또 다른 묘라든지.”

듣는 순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안이 묻는 게 제 어머니, 즉 선대 황후의 묘라는 걸.

선대 황후는 이안이 어릴 적 의문사했다고 한다. 부검을 해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옥체에 손을 댈 수 없다면서 라시드가 그대로 황릉에 묻었다지.

이안은 어머니의 유해 역시 되찾고 싶어 하는 걸까.

“죄송해요. 그렇게 자세한 장면을 본 게 아니라, 그저 단편적인 정보가 머리에 들어온 것뿐이어서요.”

“그렇습니까.”

눈을 내리깐 이안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오늘따라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무겁고, 또…… 어딘지 황량하게.

잠시 뒤 이안이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에선 이제 불필요한 감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보다, 한 번도 묻지 않는군요. 왜 내가 선황 폐하의 유해를 간직하고 있는 건지.”

예리한 지적에 심장이 덜컥 뛰었다.

역시 이 사람 앞에선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이안 님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요. 부부 사이에도 비밀은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요.”

“비밀이라.”

이안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그대 역시 내게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되는 건가?”

“하하. 그야, 뭐. 저도 비밀이 아예 없을 순 없죠. 어떻게 전부 솔직하겠어요?”

“가끔 생각합니다.”

불쑥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을 곁에 두기로 한 건 역시 도박 수였다고.”

“…….”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나는 원래 추측하는 것 따윈 좋아하지 않는데.”

그렇겠지.

이안은 확실한 것만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작중 가장 신중한 인물이 그였다.

“그런데도, 이번 계약이 어떻게 끝날지는 꽤 궁금하군요.”

바닥을 기는 뱀처럼 낮은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내가 후회할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이안을 올려다본 채, 겨우 떨지 않고 그 대답을 뱉었다.

“저희 계약은 서로에게 반드시 이로운 결과로 남을 테니까.”

“부디 그렇기를.”

픽 웃은 이안이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안 경과 아네트가 들어오며 굳어 있는 내 안색을 걱정했다.

‘아이고, 이놈의 집구석.’

나는 벽에 주르르 미끄러지며 내 신세를 한탄했다.

집 밖이나 안이나 마음 편할 날이 없구만.

* * *

“이게 다…… 뭐죠?”

다음 날 아침, 나는 반쯤 혼이 나간 채 앞에 늘어놓인 것들을 바라보았다.

“웨딩드레스와 보석 장신구 카탈로그, 그리고 샘플들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그저 예시일 뿐이고, 아이린 님께는 세상에서 유일한 드레스를 지어 드릴 겁니다.”

메르시 드레스 숍의 메르시 씨가 프로페셔널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다.

“결혼식을 제게 맡겨 주신 것, 다시 한번 크나큰 영광에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감사합…… 아니, 그런데 정말 오늘 이걸 다 들춰 봐야 하나요?”

카탈로그가 두꺼워도 너무 두꺼웠다.

내 넋 나간 표정을 눈치챈 메르시 씨가 얼른 말했다.

“마음에 드시는 것을 몇 개만 골라주시면, 비슷한 것들로 저희가 추리겠습니다.”

“이번에도 가격 하한선이 있나요?”

“이번은 확실히 전부 하한선 이상의 드레스들만 골라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은, 이 카탈로그에 있는 드레스들이 전부 최소 이만 마르스 이상이라는 거겠지.

‘아니지. 그때는 약혼식 드레스였고, 이번엔 웨딩드레스이니 더 비싸려나.’

가격 하한선이 얼마냐고는 묻지 말자. 심장에 해롭다.

한참이나 카탈로그를 보며 마음에 드는 디자인들을 짚은 뒤에야 메르시 씨는 만족하고 떠나갔다.

‘종일 예쁜 것만 보면서 지내는 것도 은근 지치는 일이구나.’

오늘 종일 한 일이라곤 아름다운 드레스와 보석 구경하기 뿐이었는데도 진이 쪽 빠졌다.

아직 밖은 햇살이 창창했다.

살짝 낮잠을 좀 자 볼까, 그런 욕구가 고개를 들 무렵이었다.

“아이린 님! 단장님께서 찾아오셨는데요!”

“…….”

잘 가렴, 낮잠아.

나는 휴식을 향해 아련히 작별 인사를 건네고 이안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안 님. 이렇게 대낮부터 어쩐 일…….”

순간 말이 멈췄다.

오늘의 이안은 평소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뭐가 다르지?’

고민하던 나는 곧 정답을 알아냈다.

오늘의 그는 예복이나 갑갑한 정복이 아닌, 헐렁한 셔츠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 그런 차림으로,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이런 차림?”

이안이 툭 시선을 제 몸으로 내렸다. 제 복장의 문제점을 모르는 눈치였다.

답답해진 나는 허,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명색이 성기사단장인데 저렇게 문란한 차림으로 다녀도 되는 거야?

‘달랑 셔츠 한 장이라니. 말세다, 말세야!’

평소보다 훤히 드러난 목이나 쇄골 같은 부위 때문에 눈 둘 곳이 없었다.

누가 볼까 남사스러워 나는 얼른 이안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무튼 빨리 들어오세요. 그나저나 진짜 어쩐 일…… 아니, 손에 뭘 들고 계신 거죠?”

나는 뒤늦게야 이안이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의 손에는 목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잡으시죠.”

이안이 내게 목도를 던지듯 건넸다.

얼떨결에 받은 나는 두려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우와! 정말 묵직하고 좋은 목도네요. 잘 만져 봤어요. 그럼 다시 돌려드릴―”

“들었습니다. 조안 경과 목도로 수련하셨다고.”

“……그러셨군요.”

조안 경을 원망 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조안 경이 미안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작 그 정도 단련을 했다고 그날 밤 그렇게 쥐가 났던 겁니까.”

“그땐 그냥, 흠, 흠. 삐끗했던 거예요.”

“걷지도 못해서 나한테 안겨 갔던 것 생각 안 납니까?”

그건 엄살 부리느라 그랬던 건데!

억울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이안이 쯧 혀를 차더니 내 손에 다시금 목도를 쥐여 주었다.

“휘둘러 보시죠.”

“갑자기요?”

“조안 경에게 방법은 배웠을 것 아닙니까.”

“…….”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목도를 휘둘렀다.

현재 제국에서 유일하다는 소드 마스터 앞에서 엉성한 폼으로 검을 휘두르려니 민망해서 죽을 맛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숨 쉬는 것부터 엉망인데.”

“저도 숨 쉴 줄은 아는데요…….”

거기부터 지적당할 줄은 몰랐던 내가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하아. 가만히 있어 보십시오.”

한숨을 뱉은 이안이 내게 다가오더니, 내 배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깜짝 놀란 내 몸이 흠칫 굳었다.

“들이마셔요. 내 손이 있는 곳까지 숨이 오도록.”

“흡.”

“지금 가슴까지도 안 왔습니다.”

“흡……!”

“다시.”

몇 번이나 ‘다시.’를 반복했지만, 만만해 보였던 복식 호흡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안이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래 놓고 숨 쉴 줄은 안다고?”

“……몰랐으면 진작에 질식해서 죽었지, 어떻게 살아 있어요.”

확실히 입은 팔팔히 살아 있다는 듯 이안이 날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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