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손쉽게 내 앞까지 도달한 코델리아가 인사를 건넸다.
“임명식, 잘 지켜보았어요. 이제 정식으로 엘룬교의 식구가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코델리아 님.”
가까이에서 코델리아를 마주한 순간, 나는 풋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코델리아는 연보라색 귀걸이와 연두색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내가 저번에 골라 줬던 그 조합 그대로였다.
“이제 권능은 깨달으셨나요?”
코델리아가 물었다.
첫 만남 때와 비슷한 질문이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 같달까?
코델리아의 물음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슬슬 얘기해야겠지.’
나는 머쓱함을 숨기기 위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예, 코델리아 님. 저는 아마, 예지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오오……!”
“예지의 성녀님이셨군!”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코델리아가 호오,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지라. 독특한 권능이군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렇습니다.”
“혹시 나를 보고도 떠오르는 게 있나요?”
새침한 표정으로 코델리아가 물었다.
표정이 저래서 떠보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겠지만, 가까이 서 있는 나는 코델리아의 눈에 서린 게 순전한 호기심임을 알 수 있었다.
새침해 보이는 건 그저 대답을 듣는 게 긴장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솜사탕 기다리는 아이 같기도 하고.’
나는 속으로 코델리아가 들으면 역정 낼 생각을 했다.
하지만 기대로 연갈색 눈을 반짝이는 코델리아는 정말 꽤 귀엽긴 했다.
음. 어쩐다.
이안에겐 아직 떠오른 예지가 없다고 했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만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내 눈에 문득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저건.’
코델리아의 손목에 걸려 있는 팔찌였다.
시퍼렇게 빛나는 원색의 팔찌는 코델리아의 살굿빛 살결과 영 안 어울렸다.
‘또 아덴 상단 짓인가.’
아네트가 말해 주길, 아덴 상단은 보석으로 유명한 상단이라고 했다.
특히 선명한 원색 보석이 상징이라나.
아덴 상단은 그런 자기들의 대표 상품을 일부러 코델리아에게 판매하고 있는 듯했다.
돈도 많이 벌고, 성녀 코델리아가 자기들 상단 마스코트도 되어 주고. 일석이조였겠지.
슬쩍 시선을 돌리자, 코델리아 곁에서 아덴이 경계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주 표독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런 게 무슨 레하트의 꽃.’
미남이 다 얼어 죽었나, 흥.
나는 아덴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코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코델리아 님. 저, 지금 느낌이 왔어요.”
“정말인가요?”
코델리아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델리아 님께선 연한 색깔을 가까이하실수록 좋은 일이 생기실 거예요. 이를테면 하고 계시는 목걸이나 귀걸이 속 보석처럼, 파스텔 톤의.”
“파스텔 톤이요?”
“네. 말하자면 코델리아 님에겐 그게 행운의 색이랄까요?”
“행운의 색……!”
코델리아가 몹시 놀란 표정으로 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네. 특히! 쨍한 원색은 멀리하시는 게 좋겠어요.”
“어라, 그러고 보니.”
뭔가 떠오른 듯 코델리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아이린 양이 추천해 준 이 장신구들을 끼고부터, 부쩍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이게 ‘행운의 색’의 효과……?”
그건 정말 이쪽이 잘 어울려서가 맞긴 하지만.
나는 슬그머니 입을 다묾으로써 부정하지 않았다.
“어머, 정말이에요, 코델리아 님. 요즘 얼굴이 정말 훨씬 좋아 보이세요.”
“더 건강해 보이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마침 코델리아를 둘러싼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을 보탰다.
나는 살짝 아덴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썩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표정 관리를 저리도 못 하다니. 꽃님 실격이었다.
“명심할게요, 아이린 양. 제 ‘행운의 색’.”
코델리아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약간 양심이 따끔거렸다. ‘행운의 색’ 운운은 그냥 운세 사이트에서 본 단어가 갑자기 생각나 튀어나온 것뿐인데, 코델리아가 저렇게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자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아이린 님. 혹시, 제 행운의 색은 뭘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봐 주실 수 있나요?”
여기저기서 수줍은 요청이 들어왔다.
뜨거운 반응에 나는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태어난 달 알려 주시고 대한민국 잡지 한 권만 가져다주세요. 그럼 다 알려 드릴게……!’
미용실에서 시간 때우기용으로 뒤적거리던 잡지가 몹시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행운의 색이라. 재밌군.”
이 목소리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
“폐하……!”
모두 고개를 조아린 방향 끝에서, 라시드가 걸어오고 있었다.
신도복을 입었던 첫 만남과는 딴판인 차림새였다.
누가 봐도 황제임을 알 수 있도록 호화로운 의복 차림에 그를 뒤따르는 엄청난 호위 기사들.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황제 폐하.”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인가. 성녀님의 정인은 어디에 있지?”
“추기경 성하와 말씀 나누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흐음.”
라시드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친형제 아니랄까 봐 이안과 비슷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느낌은 많이 달랐다.
비웃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소름 끼치게 만드는 이안과 달리 라시드는 그냥 재수 없어 보일 뿐이었다.
“연인 실격이군. 정혼자를 이런 곳에 혼자 두다니.”
“추기경 성하와 나눌 말씀이 있기도 하지만, 제가 다른 분들과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으로 압니다.”
나도 모르게 대답하며 나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울컥해서 변명했지?
라시드가 픽 웃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 새로운 성녀님께서는 예지의 권능을 지니셨다고?”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설마 얘도 행운의 색을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그럼 무지개색이라고 해 버려야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시드는 그런 귀여운 것을 물어보진 않았다.
“우리 제국의 국운도 예지해 볼 수 있겠나?”
나는 고개 들어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빙글거리는 웃음이 그의 입꼬리에 걸려 있었다.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외람되오나, 폐하. 제가 미진하여 아직 그리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가? 조금 실망인데.”
“면목 없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나는 약간 억울해졌다.
아니, 내가 왜 이 인간한테 면목이 없어야 해?
내가 알기로 엘룬 교단은 일단 제국 황실 아래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군신 관계인 건 아니었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이렇게 제집 안마당처럼 대성당을 헤집고 들어와, 성녀에게 실망이 어쩌고 떠벌리다니.
나야 태생이 소시민이라 얼떨결에 숙이고 있다지만, 황제도 확실히 지나치게 안하무인이었다.
“좋아. 제국같이 거창한 대상은 힘들 수 있지. 짐이 성녀님께 무리한 것을 요구했군.”
“아닙니다, 폐하.”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라시드가 또 빙글거리는 미소를 걸쳤다.
“짐이 장차 성군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느냐?”
“…….”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모두 숨죽여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난 예지의 능력 따윈 없지만, 라시드가 성군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선황제의 이른 죽음으로 소년 나이부터 황위에 오른 라시드는, 결코 좋은 군주는 아니었다.
점점 더 미쳐 날뛰는 세율과, 갈수록 자비를 모르는 치세.
원작 소설에서 황실의 지나친 사치로 우려하는 귀족들이 많다는 묘사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하지만, 내가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성군은커녕, 당신은 폭정을 펼치다가 당신 동생에게 목이 날아가 죽습니다.’
라고는 절대 말 못 하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좀 아쉽지만, 앞으로 노력하시면 나아질 거예요! 파이팅!’
뭐 이런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라시드는 굉장히 쪼잔한 인간이었다. 조금만 마음에 안 차는 소릴 해도 찍힐 게 분명했다.
결국은 입발림해 주는 게 여기선 최선이긴 한데.
그러고 싶지 않은 건 둘째 치고, 그랬다간 여기 모인 사람들이 내 예지 능력에 의문을 품을 터였다.
일단은 대충 얼버무리자.
“외람되오나, 폐하. 제 권능이 언제나 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델리아 님께는 운 좋게 떠오른 것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흐음, 그런가. 아쉽군.”
휴, 이걸로 퇴치했나.
그렇게 마음을 놓으려던 때였다.
“그렇다면 예지는 관두고. 그냥 우리 성녀님의 의견을 여쭈어보지. 성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짐이 존경받는 황제로 기억될 수 있겠는가?”
‘에라이, 치사하고 더러운 놈.’
나는 속으로 잔뜩 황제 욕을 하면서도 착하게 말했다.
“선정을 이어 나가신다면 뭇 백성들과 음유시인들의 칭송을 받으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라시드가 흐음, 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기어코 성녀한테 아부 들으니까 좋냐, 이 자식아!
“그건 짐이 지금은 선정을 펼치지 않고 있다는 뜻인가?”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알겠다.
오늘 황제는 그저 얼굴도장을 찍으러 온 게 아니었다.
이안의 정혼자이자 새로운 성녀인 내가, 자신의 말에 얼마나 복종할지 시험하러 온 것이다.
따라서 라시드는 내게 만족스러운 답을 들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터였다.
나는 후, 작게 숨을 뱉곤 라시드를 올려다보았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가 시선을 마주치자 라시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방금 예지가 찾아왔습니다.”
“호오. 어떤 예지이지?”
나는 생긋, 미소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장차, 최초의 업적으로 역사서에 길이 이름을 남기시게 될 것입니다.”
“호오?”
라시드가 흥미롭다는 눈을 했다.
라시드에게 달라붙어 있던 사람들이 아첨을 던지기 시작했다.
“굉장히 훌륭한 예지이군요, 폐하.”
“최초의 업적이라니, 대단하십니다. 역시 폐하께서는 명군이십니다!”
“후대의 아이들이 모두 역사서에 실린 폐하의 업적을 읽으며 공부하겠군요.”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분명 그럴 테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라시드는 제국 최초의 업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황위를 위해 제 친아버지와 친족들을 살해하고, 끝내 친동생과 수도인들을 통째로 몰살하려 한.
최초의 악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