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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161)

25화

이걸로는 부족하다.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겨울 서리처럼 차디차기 그지없었다.

나는 이어서 속닥거렸다.

“그리고 저를, 음…… 케이크나, 마카롱,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소립니까?”

하아아. 나는 답답함에 눈을 마구 깜빡거렸다.

라시드가 있을 땐 그렇게 자연스레 독점욕 연기를 했으면서, 왜 갑자기 이렇게 뻣뻣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보니 이안은 은근히 기복이 심한 타입이었다.

“하, 참. 절 한 떨기 가녀린 장미꽃을 바라보듯 봐 달라고요!”

“…….”

이안의 눈빛에 황당함이 서렸다.

에잇, 글렀다.

나는 오늘따라 손발 안 맞는 이안을 빠르게 포기하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귀부인들에게 이안의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팔을 살짝 끌어당겨 각도를 틀려던 순간이었다.

“읏?”

아까 낮, 오랜만에 한 운동에 하루 종일 삐걱거리던 몸이 돌연 빳빳해졌다. 쥐가 난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내 몸이 기우뚱 앞으로 기울었다.

“으앗!”

넘어진다!

나는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팔을 뻗었다.

다음 순간, 내 이마는 흙바닥 위로 박살이 나……

는 게 아니라, 탄탄한 어딘가에 쿵 부딪혔다.

“……뭐 합니까?”

이안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좋은 냄새가 났다.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현재 이안의 가슴팍에 코를 파묻고 있음을 깨달았다.

“으악. 죄, 죄송해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균형을 잃은 몸은 오히려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니, 미끄러질 뻔했다.

단단한 팔이 나를 고정하듯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나는 거의 이안에게 온몸으로 매달린 형상이 되어 뻣뻣이 굳었다.

“술 먹었습니까?”

헛웃음 실린 목소리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가, 그러니까. 다리 근육통 때문에…… 쥐가 나서…… 잠시만요. 으앗.”

당황해서 그런가, 균형을 잡으려 하면 할수록 몸이 더 삐끗거렸다.

설상가상으로 망할 놈의 쥐가 안 풀려서 종아리가 아려 왔다.

제발 말 좀 들어라, 이 뚝딱대는 몸뚱이야!

“어머나, 맙소사.”

“뜨겁네요. 뜨거워!”

그때 뒤에서 흥분한 속삭임들이 들렸다.

내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귀부인들이 이 치태를 관람하고 있었다.

“어쩜, 허리가 한 팔에 다 감기네요.”

“하아아, 그림이네.”

“저리도 뜨거운 포옹이라니…… 어휴. 덥네요, 더워.”

가만히 놔두면 아주 맥반석 계란도 까 드시겠어.

귀부인들의 열띤 수다에 수치심이 들었지만 일단 목적은 달성한 듯했다.

이안과 내가 뜨거운 연인 사이로 보여야 한다는 목적 말이다.

“발, 접질린 건 아닙니까.”

뜬금없이 떨어진 물음에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꺾자, 정면에서 이안의 얼굴이 올려다보였다.

시리도록 푸른 청안이 겨울 호수처럼 깨끗했다. 내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일 것처럼.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이린?”

이안이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정말 다친 겁니까? 어떻게 혼자 넘어져서 다칠 수가 있지.”

진귀한 것을 보듯 이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한숨 지었다.

다음 순간, 내 몸이 번쩍 들렸다.

“어머나!”

“세상에, 세상에. 깃털처럼 가볍게 드네요.”

귀부인들의 환성이 정원을 메웠다.

이안이 나를 양손으로 안아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내, 내려 줘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내가 버둥거렸다.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됐으니까 가서 치료나 받으십시오. 아직 성당에 남은 치유 신관이 있을진 의문이지만.”

“저 안 다쳤어요!”

이안은 귀찮은 듯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귀부인들이 후다닥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우릴 훔쳐보는 뜨거운 시선은 여전히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얌전히 몸에 힘을 풀고 이안의 품에 안겼다.

“이래서야 추궁도 못 하게 됐군.”

이안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렸다.

‘……지금 환자라서 봐주고 있는 건가?’

넘어지지 않았으면 왜 아기 천사 발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는지 추궁당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얼른 마음가짐을 바꿔 이안의 품속에서 축 늘어졌다.

정말 발목을 크게 다친 환자처럼.

도착한 치유관에서 나를 진찰한 치유 신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군말 없이 근육통을 치료해 주었다.

나는 그저 치유 신관의 신성력 낭비에 조용히 위로를 보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내 침실에서 눈을 뜬 나는 비장히 각오를 다졌다.

‘무조건 검증을 통과한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살아남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건 말도 안 됐다.

나는 다시 한번 계획을 점검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실전은 단 한 번. 실패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의 마음가짐으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따라 날씨가 끝내주게도 좋았다.

* * *

“이…… 이게 다 뭐예요?”

드레스룸 한 벽면을 가득 차지한 옷가지들을 보며 나는 경악했다.

“엘룬교의 전통 복장입니다, 아이린 님.”

루시안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또 경악했다.

이걸 전부 다 걸쳐야 한다고?

“끈은 왜 이렇게 많고, 둘러야 하는 건 또 왜 이렇게 많아요?”

순백색과 황금색으로만 어우러진 옷가지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긴 했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이런 걸 다 껴입었다간 무거워서 걷지도 못할 것 같았다.

“늘 이렇게 입어야 하는 건 아니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그럽니다.”

벽에 기댄 채 사태를 관망하던 이안이 느리게 입을 뗐다.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부기 하나 없이 단정한 얼굴은 오늘도 완벽 그 자체였다.

나는 이안의 빈틈없는 예복 차림을 슬쩍 감상했다.

새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그는 오늘도 현실감 없는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참 외모 하난 성스럽긴 하네…….’

비록 걸친 표정은 한량처럼 나른하고 권태롭기 그지없었지만.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왕이면 첫인상은 성녀답게 정숙하고 기품 있어 보이면 좋지 않습니까? 뭐. 정숙으로 치면 당신이나 나나 피차 그르긴 했지만.”

‘저 인간이.’

아침부터 왜 루시안을 따라 찾아온 건가 했더니 내 속을 긁으려고 그랬나 보다.

난 몰래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옷가지들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린 님. 옷시중은 제가 들어 드릴 겁니다.”

조안 경이 말했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말인가요?! 이것들 착용하는 방법을 전부 아시는 거예요?”

“네. 전통 복식 입는 방법은 성기사단에 입단할 때 필수로 배우는 덕목 중 하나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조안 경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곤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무언의 축객령에 루시안은 물론 이안까지 군말 없이 드레스룸을 나섰다. 나는 조안 경의 박력에 약간 반하고 말았다.

침의를 벗은 나는 조안 경과 아네트의 도움을 받아 옷을 하나하나 입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도 더.

시계를 보자 어느덧 사십 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나는 내 허리춤 부근에서 끈과 싸우고 있는 조안 경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좀……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배운 적이 있다곤 해도, 기사인 조안 경이 이렇게 치렁치렁한 복식을 입을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네트까지 가세했지만 사태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죄송해요, 아이린 님. 제가 손재주가 없어서…….”

아네트가 울상이 돼선 사과했다.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루시안이 놓고 간 착의 설명서를 들여다봐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특히 매듭! 이렇게 무식하리만큼 복잡한 매듭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래도 여차여차 우리는 마침내 착의를 끝냈다.

“우와.”

거울을 바라본 나는 탄성을 흘렸다.

순백색 옷감을 타고 흐르는 은은한 황금빛.

날씬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는 얇디얇은 천을 몇 겹이나 둘러 나비의 화려한 날개 같았다.

호화로운 옷감과 반대로, 머리에는 보석이 몇 개 달린 끈만을 둘러 장식했다. 빛의 방향에 따라 반짝이는 보석 끈이 눈을 홀릴 것처럼 아름다웠다.

“와, 예쁘네요…….”

“잘 어울리십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이린 님!”

나는 거울 앞에서 한 바퀴를 돌아보며 감탄했다.

무슨 옷가지가 이렇게 많냐고 욕하긴 했지만, 막상 다 걸치고 나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긴 했다.

‘진짜 성녀 같아.’

지금 내겐 마치 이안 같은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옷은 날개라니까!

크게 자신감을 얻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룸 문을 열고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이안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나는 가슴을 당당히 폈다. 이안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지금 내 모습이 예복을 잘 소화하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이안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그는 잠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약간, 아니. 꽤나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왜 이래.’

내 성녀다운 모습에 갑자기 신앙심이라도 솟아오르시나?

날 겁박했던 과거가 후회되고 그래?

이제라도 날 경건히 대해야겠단 생각이라도 들…….

“여기.”

이안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는 흡, 숨을 집어삼켰다.

“뭐, 뭔가요.”

“어깨끈이 제대로 안 묶였습니다.”

아.

나는 아래로 고개를 숙여 어깨끈을 쳐다보려다가, 곧 딱딱히 몸을 굳혔다.

이안이 말없이 내 어깨끈을 쥐었다.

“매듭이 아주 엉망인데.”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까워진 이안에게선 묘한 냄새가 났다.

약초 냄새 같기도 하고, 바람 냄새 같기도 한.

선명히 불어오는 타인의 체향에 나는 괜스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장미 정원에서도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었지.’

그때 일을 떠올리니 더 기분이 미묘해졌다.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내 입이 저절로 열렸다.

“향수 쓰세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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