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61)

24화

* * *

“아네트 양, 오늘은 내게 온 편지가 없나요?”

넌지시 묻자 아네트가 토끼처럼 부산히 움직였다.

“어휴, 산더미처럼 많죠, 아이린 님! 얼른 가져올게요.”

요즘 나는 세 시간에 한 번씩 내게 온 우편물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네트가 가져온 은쟁반에는, 그새 또 카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대부분 이런저런 가문이나 사교회에서 보낸 초대장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 즐겁게 친목이나 다지며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었다.

임명식까지 앞으로 3일.

내 목숨이 끝장날지도 모르는 날까지 고작 3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눈에 띄는 건 딱히 없……. 응?’

초대장들을 뒤적이던 나는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금색으로 장식된 순백색 카드. 이건 코델리아의 초대장이었다.

‘와 줘서 고마웠다는 카드는 며칠 전에도 받았는데. 새로운 초대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열어 본 카드 내용은 묘했다.

정말 평범한 안부 인사 카드였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보낸 내용을 왜 또 보냈지. 딱히 또 초대한다는 얘기도 없고.

갸웃거리며 끝까지 읽어 내린 나는 머지않아 추신까지 도달했다.

「p.s. 제 카드는 꼭 아무도 없을 때 읽어 주셔야 해요. 저는 수줍음이 많으니까.」

응?

나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코델리아는 이렇게 애교 있는 말투를 쓰지 않는다.

“아이린 님, 읽고 계세요. 차도 금방 내올게요.”

아네트가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섰다. 조안 경은 현재 거실에 있었으므로 응접실에는 나만 남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들고 있던 카드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허, 헉.”

카드에 새겨진 잉크가 실시간으로 춤을 췄다. 곧 카드는 전혀 다른 내용을 내보였다.

나는 너무 놀라 헛숨만 들이켰다.

「오늘 오후 9시, 장미 정원. 막내 천사의 하프 소리가 둔탁하다. 오십 마리는 조만간 분양받으러 감. ―R」

‘리젤로.’

나는 멍하니 그 이름을 떠올렸다.

‘오십 마리’는 분명, 내가 그에게 대금으로 약속한 오십만 마르스를 말하는 거였다.

‘막내 천사 어쩌고는 무슨 소리지?’

기왕 이렇게 마법적인 트릭을 쓸 거면 확실히 좀 알려 주지……!

아무튼 오후 아홉 시, 아홉 시란 말이지.

나는 초조히 시계를 돌아보았다. 아홉 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초조함에 절어 살았다.

하도 손가락을 탁자 위에 딱딱거려서 조안 경이 무슨 일이 있냐고 넌지시 물어 올 정도였다.

그냥 오늘따라 잡생각이 많다고 하자, 조안 경이 진지하게 조언했다.

“잡념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 그런가요? 하하, 제가 운동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

“알려 드릴까요?”

차마 조안 경의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렇게 해서 나와 아네트, 조안 경은 거실에 나란히 선 채 목도를 휘둘러야 했다.

이 세계로 온 뒤 한 번도 안 한 운동을 하려니 온몸이 삐걱거렸다.

“아이고, 삭신이야……. 아이고.”

“네? 아이린 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네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는 소파 위로 엎어졌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근육이 찢어지셨을 테니 내일은 쉬시고, 모레 뒤부터 다시 단련을 시작하셔도 좋을 것 같군요.”

조안 경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찢, 찢어져?

뭐가……? 근육이? 그런 게 찢어지면 안 되지 않아?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비틀비틀 욕실로 향했다.

‘미친개 조안’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처음으로 조안 경이 두렵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소동을 거치고 나니 머지않아 해가 떨어졌다.

여덟 시 반이 되었을 때부터 나는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휴…… 답답하다.”

“어라. 많이 답답하세요, 아이린 님?”

“스트레칭을 도와드릴까요, 아이린 님.”

“네? 아뇨, 아니에요.”

걱정하는 아네트의 말에 이어 조안 경의 스트레칭 발언에 황급히 고개 저은 나는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속이 답답할 땐, 바깥 공기를 쐬는 게 최곤데.”

“바깥 공기요? 으음, 지금은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휴, 자연이 보고 싶다…… 예쁜 꽃이랑 풀을 보면 속이 확 풀릴 것 같은데.”

내 노골적인 혼잣말을 들은 아네트와 조안 경이 눈빛을 교환했다.

아네트가 짝, 손뼉을 쳤다.

“그런 거라면 성당 안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세요! 성당 안에 잘 조경된 정원이 얼마나 많은데요.”

“정말인가요?”

나이스, 아네트 양!

역시 아네트 양은 내 마음을 잘 알았다.

“특히 장미 정원엔 지금 한창 봄 장미가 만발해 있을 거예요.”

장미 정원. 거기다. 나는 눈을 반짝였다.

“꼭 구경해 보고 싶어요. 제가 장미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어머나, 진작 구경시켜 드렸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가 보실래요?”

“네!”

그렇게 늦은 시간의 나들이가 결성되었다.

은은한 빛으로 밝힌 한밤의 장미 정원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와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자, 아네트가 흐뭇해했다.

“아름답죠? 꽃도 예쁘지만, 저 가운데 있는 동상도 진짜 아름다워요.”

아네트가 가리킨 방향엔 커다란 동상이 서 있었다.

엘룬 신으로 보이는 동상 주변을 아기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형상이었다.

나는 매의 눈으로 천사들을 쏘아보았다.

‘저기 있는 건가, 막내 천사는.’

“정말 운치 있네요.”

나는 또다시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딱 좋아 보이는 공원이에요. 혹시 혼자 조용히 거닐어도 될까요?”

조안 경은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나는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안 경은 성실한 호위 기사였다. 도서관에 라시드가 찾아왔을 때도, 나중에 알고 보니 이안을 불러온 게 다름 아닌 조안 경이었다고 했으니.

성당 안이라 그런지 다행히 조안 경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편히 둘러보십시오.”

나는 천천히 정원 속을 혼자 거닐었다.

동상 앞까지 다가간 나는 감상하는 척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다 똑같은 아기 천사는 아니구나.’

엘룬 신 주변을 날아다니는 천사들은 자세히 보니 나이대가 다양했다.

‘저건 청소년 천사. 저건 영유아 천사. 그리고 저건…….’

제일 아래 있는 천사를 발견한 나는 눈을 빛냈다.

누가 봐도 갓난아기 천사였다.

막내 천사는 과연 손에 하프를 쥐고 있었다. 아직 들기엔 무거운지 반쯤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지만.

‘막내 천사는 하프 소리가 둔탁하다.’

카드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프 소리가 왜 둔탁할까?

그건, 아마 현에 이물질이 닿아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살그머니 동상으로 손을 뻗었다.

조안 경이나 아네트의 위치에선 내 손까진 보이지 않았다.

막내 천사의 하프를 더듬은 순간.

‘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봉투가 손끝에 만져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는 눈들이 있어 당장 대놓고 확인해 볼 순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리젤로가 제대로 된 물건을 보냈다는 걸.

원작에서도 리젤로는 성력을 차단하는 마법진을 만들어 냈었다.

그것으로 여주인공을 돕는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종이봉투 속 이 바스락거리는 것의 정체는, 마력을 부은 약초들이겠지.

이것들을 빻아 낸 진액으로 마법진을 그리면, 그 부위에 닿는 성력을 잠시나마 차단할 수 있을 터였다.

‘좋아. 일단 가지고 돌아가서 진짜 그 물건이 맞는지 확인해야지.’

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종이를 품속에 쑤셔 넣었다.

그때였다.

“달밤에 산책입니까?”

‘허어억.’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나는 제발 내가 생각한 이가 아니길 빌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내 귀가 틀릴 리가 없었다.

이안 에스테반. 달빛을 받아 평소보다도 더 발광하는 미모를 가진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이 미친 타이밍은 뭐냐고, 대체!’

“이, 콜록, 이안 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근처를 지나가는데 조안 경이 보이기에. 그런데 뭐 합니까?”

이안이 내 뒤에 서 있는 동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피가 싸하게 식는 것 같았다.

“뭐 재밌는 거라도 있나? 이 안에.”

“하하. 재밌다기보단, 아름다워서요. 넋을 놓고 구경 중이었답니다.”

“천사 발이 그렇게 아름다웠습니까?”

망할.

이안은 내가 아기 천사의 하프가 있는 아랫부분을 뚫어져라 본 것까지 지켜본 모양이었다.

어떡하지.

심장이 폭발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격렬히 뛰었다.

그때였다. 정원 밖에서 소란스러운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아니 글쎄, 프리먼 남작이 결국 불륜 현장을 딱 들켰다잖아요.”

“어휴,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말했잖아요? 눈빛이 탁한 게 언제 한 번 사고 칠 것 같았다고.”

한 귀부인 무리가 정원 입구로 몰려들었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우릴 발견했는지, 정답던 귀부인들의 이야기 소리가 뚝 끊겼다.

“어머, 어머.”

“저건 이안 님과 그 약혼자인 성녀님……!”

“어머나. 데이트 중이셨나 봐요.”

“달밤에 장미 정원에서 야회라니, 세상에, 세상에.”

‘그런…… 거 아닌데요.’

귀부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이 동네 귀족들은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

이안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내가 들은 소리를 이안이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너무 낭만적인 연인이에요.”

“어쩜 저리 선남선녀일까.”

미치겠네.

나는 정처 없이 떨리는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현재 우리는 본의 아니게 야밤 데이트 중인 커플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귀부인들의 인기척을 알아챈 티를 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저기요, 이안 씨. 절 무슨 범죄자 바라보듯 쳐다보고 계신데요.’

나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이 지독히도 차가웠다.

내 수상한 행동을 목격한 직후이기 때문이겠지.

누가 연인을 저런 눈으로 보냐고!

이대로라면 곧 귀부인들도 이안의 저 눈빛을 발견하고 말 것이다.

“이안 님, 제 뺨.”

나는 빠르게 속닥거렸다.

이안이 슬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뺨?”

“제 왼쪽 뺨에 손 올리세요.”

“…….”

“빨리요. 빨리.”

잠깐 말이 없던 이안이 순순히 내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따스한 체온이 볼 위를 감쌌다.

“어머나. 어머나.”

귀부인들의 환성이 터지는 것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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