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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161)

23화

확실히, 계속 올려다보고 있자니 목이 좀 아픈 것 같기도.

아무튼 아덴은 절대 아니었다. 아덴 같은 타입은 천 명이 달려들어도 절대 안 넘어갈 자신 있었다.

“취향이 꽤나 확고하신가 봅니다, 내 부인께서는.”

“그럼요. 누구 아낸데.”

나는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농담이 아니었다.

일 년 뒤 계약이 끝나고 나면, 모르긴 몰라도 내 눈은 아주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가짜 부부라곤 해도, 이런 얼굴을 맨날 마주하면…… 미적 감각이 이상해지지.’

역시 이건 내가 손해 보는 계약 같다.

살며시 한숨을 내쉬는데, 이안이 낮게 헛웃음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새 나한테도 많이 익숙해지신 것 같군요.”

“네?”

“처음엔 눈도 못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떠느라.”

이안이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 지.’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안 떨리는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이런 얘길 하지. 설마 눈치 주는 거야?

‘음. 혹시 너무 까불었나.’

나는 슬며시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이 며칠간, 첫 만남에 비해 약간 긴장이 풀린 건 사실이었다.

매분 매초 그때처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살았다간 진작에 정신이 나가 버렸을 것이다.

‘혹시 치사하게 그걸 트집 잡는 건……?’

치사해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약자는 나인걸.

나는 서러움을 삼키며 말했다.

“거슬리시면 초심으로 돌아가 볼까요? 눈도 덜 마주치고, 기타 등등.”

“아니, 싫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부부 노릇을 하려면 지금보다도 더 가까워 보여야 할 테니.”

“……그렇죠.”

부부 노릇이라. 나는 잠시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부 노릇이란 뭘까. 지금 나와 이안은 아직 약혼 관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혼식을 올리고 난 부부는 다르다. 그 뒤엔 지금보다 확실한 연기를 해야 할 터였다.

‘이를테면…… ’

더 친밀하게 대화한다든지, 서로를 정다운 호칭으로 부른다든지.

매일 밤 같은 침실에서 잠이 들고, 매일 아침 같은 침대 위에서 눈을 뜨는 것이다.

이 남자와.

“…….”

나는 메말라 오는 입천장을 혀로 축였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 한다는 건 안다.

그럼에도 괜스레 자신감이 슬금슬금 모습을 감췄다.

날 빤히 내려다보는 청안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더 그랬다.

“……사실, 진짜 용건은 따로 있습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침묵을 이안이 깨뜨렸다.

나는 그제야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본론, 이요.”

방금까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감추기 위해 나는 한껏 사무적인 목소리를 냈다.

진짜 본론이 있었구나.

하긴, 이안이 단순히 남자랑 대화 잠깐 한 걸 추궁하기 위해서 달려오진 않았을 것 같기는 했다.

“케넨 주교의 귀환일이 확정됐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성녀 검증을 주관하는 케넨 주교가 돌아온다. 그 말은, 즉.

“당신의 성녀 임명식은 앞으로 정확히 11일 뒤에 열릴 겁니다.”

“임명식이요?”

내 눈이 동그래졌다.

“검증이 아니라, 임명식이라고 하셨나요?”

“이미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성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내 묵인하에.”

“그렇…… 죠.”

“검증 절차는 형식적으로 거칠 뿐이니 당연히 통과를 전제로 임명식도 같은 날 여는 겁니다.”

“그렇군요.”

나는 담담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리젤로…… 믿는다.’

원작 공인 돈 귀신, 일단 문 의뢰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다는 전설의 해결사. 리젤로 로물루스!

나는 유일한 희망인 리젤로를 향해 소리 없이 간절한 기도를 보냈다.

“더 궁금한 건 없습니까?”

“아. 있어요.”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저희 결혼식 말이에요. 정말 그 날짜에 하나요?”

약혼식 날, 우리 약혼을 주관해 준 주교는 한 가지 의식을 치렀었다.

바로 결혼식 날짜를 정하는 의식이었다.

‘꽤 신기했었지.’

365일이 모두 표시된, 고대 돌 연력 위로 주교가 성수를 떨어뜨렸었다.

그러자 성수 방울이 꼬물꼬물 어딘가를 향해 기어갔다.

방울이 머무르는 날짜가 곧 엘룬 신이 정해 주는 축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정해진 우리의 결혼식 날짜는, 바로 4월 1일.

불과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다.

“그렇습니다. 엘룬께서 정해 주신 날이니.”

“전통이 그렇단 건 알지만…… 너무 빡빡하지 않을까요?”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결혼식에는 굉장히 복잡한 준비가 필요했다.

하물며 이안 정도 되는 인물의 결혼식이면 몹시 화려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준비할 것도 더 많겠지.

싱겁다는 듯 이안이 픽 웃었다.

“그대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준비는 내가 모두 마칠 테니.”

“그, 그렇군요.”

“다만 마음의 준비는 해 두십시오.”

“준비요?”

“그날 그대는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신부가 되어야 할 테니.”

이안이 또다시, 예의 그 성격 나쁜 미소를 머금었다.

“좀 피곤할 겁니다.”

‘……대체, 뭐 얼마나 화려한 결혼식을 열겠다는 거야.’

저 인간이 경고씩이나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슬금슬금 기어올라 오는 불안을 애써 떨쳤다.

“그리고, 또.”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오늘따라 말이 많으신 우리 가짜 남편님을 바라보며 나는 착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왜 그러시나요?”

“권능은 그 이후로 발현된 적 없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예지의 권능을 갖고 있다는 것. 그건 내가 이안에게 거하게 친 사기 중 하나였다.

“이안 님을 처음 뵈었던 날 이후론, 아직 소식이 없네요.”

나는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다행히 성녀들이라고 해서 부름받자마자 권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원작 여주인공만 해도, 화려하게 권능을 각성한 날 이후 한동안 능력을 다시 쓰지 못해 애먹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무언가 떠오른다면, 꼭! 이안 님께 먼저 말씀드릴게요.”

“기대되는군요.”

이안이 서늘하게 웃었다.

“첫 번째 예언으론 내 고삐를 쥐었고. 두 번째 예언으론 대체 내게 무슨 일을 벌이게 될지.”

“하하…….”

나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고삐를 쥐긴 뭘 쥐어요.

내가 정말 당신 고삐를 쥐었으면 지금 이렇게 살 떨리게 무섭겠냐고!

속으로만 아우성치며 나는 착한 미소를 유지했다.

이번에야말로 방을 떠날 듯하던 이안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아. 말하는 걸 잊었는데.”

빤한 시선이 내 모습을 천천히 훑었다.

‘뭐, 뭐지.’

나는 슬그머니 눈을 옆으로 피했다.

이 인간이 이렇게 쳐다만 보면 오금이 저리고 식은땀이 난다.

대단한 선행은 안 해도 죄는 안 짓고 살아온 나로선 참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혹시 뭘 들켰나?

심장이 두근두근 박동을 빨리하던 무렵이었다.

“그 머리카락.”

“네?”

“……혹시.”

‘혹시’까지만 말한 이안은 몇 초간 말이 없었다.

뭐야. 뭔데 저렇게 뜸을 들여?

이안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공포에 질렸다.

마침내 이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네. 제발 말씀하세요.”

“만져 봐도 됩니까?”

“……네?”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나는 귀를 믿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자 이안이 미간을 홱 굳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 그래도 차가운 인상이 굳어 버리기까지 하니까 거의 서릿발이 날렸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다시금 물었다.

“제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으시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 맞죠?”

“맞긴 합니다만, 이젠 됐습니다.”

되긴 뭐가 돼!

나는 황당함에 빠져 예비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내 머리카락은 왜 만져 보겠다는 거야?’

살 떨리게!

게다가 분명 만져도 되냐고 물었으면서, 금세 꼬리를 빼는 게 더 수상했다.

대체 뭐지.

‘아. 그러고 보니 이안은 변신 가루를 쓰지 않은 이 모습을 처음 보는 거였구나.’

즉, 이안은 내 분홍색 머리카락과 초면이었다.

‘혹시 이것도 가짜인지 의심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억울했다.

여러 번 확인한 결과, 지금의 모습은 틀림없이 76번의 본모습이 맞았으니까.

하지만 전적이 있으니 이안 입장에선 의심할 만도 했다.

나는 결연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검, 뽑아 주세요.”

“예?”

이안이 뭔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재차 말했다.

“검을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아, 아니다. 여기 있네요.”

마침 테이블 위에 페이퍼 나이프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나이프를 쥐고, 그대로 내 머리칼 앞으로 가져갔다.

“무슨.”

이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나이프를 놀렸다.

금방 사각, 소리와 함께 머리칼이 잘려 나갔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친 겁니까?”

“보여 드리려고 자른 거예요. 보세요. 색깔, 안 변하죠?”

나는 이안에게 방금 자른 머리칼을 보여 주었다.

남김없이 의심을 풀라는 의미에서 한 움큼씩이나 잘랐다.

“……꽤 과격한 방법으로 보여 주는군요.”

“이안 님이 혼란스러워하시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낮게 혀를 찬 이안이 내 머리칼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손바닥을 보여 달라 말하곤 그 위에 머리칼을 올려 주었다.

이안이 손바닥에 닿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간식 같군.”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머리칼을 노려보는 이안의 눈빛은 매서웠다.

인상이 저래서 그런가, 마치 살인사건 증거물을 살펴보는 형사 같았다.

“이제 의심 푸셨죠?”

“오히려 색감으로만 치면 이쪽이 더 가짜 같은데.”

“무슨 말씀 하시는 건가요. 가짜라면 잘랐는데도 색깔이 안 변할 리가 없잖아요.”

아직도 의심을 풀지 않다니, 역시 지독한 인간이었다.

내가 따지자 이안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진짜 모습을 숨겼던 건지는, 아직도 말해 줄 생각이 없으시고?”

“이안 님, 일전에도 말씀드렸죠. 이안 님도, 저도 서로에게 모든 걸 터놓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나는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면, 일 년 뒤 헤어질 때도 불안해질걸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를 탐색하는 눈빛이었지만, 반박해 오진 않았다.

“좋습니다.”

이안이 서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불필요한 정보까지 나눌 필욘 없겠지요.”

“동의해 주실 줄 알았어요.”

“난 정말 당신을 믿고 싶습니다.”

삐딱한 미소와 함께 이안이 말했다.

“우리의 신뢰에 금이 가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죠.”

“……마찬가지예요.”

그제야 이안은 내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주르륵, 소파 위로 미끄러졌다.

정말이지 신경 줄이 남아나지 않는 하루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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