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61)

22화

“절 정식 의뢰인으로 받아들인다고 먼저 말씀해 주신다면, 의뢰 내용을 말씀드릴게요.”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리젤로에게 의뢰할 정도로 거물급들은 모두 이런 방식을 취했다.

일단 정식으로 의뢰를 넣고, 그 뒤 의뢰 내용을 말한다.

정 수행하기 어려운 의뢰라고 판단되면 리젤로는 의뢰를 파기할 수 있었다.

단, 이미 들은 의뢰 내용은 어디에도 발설할 수 없다. 그게 ‘정식 의뢰’라는 이름의 계약이었다.

“내가 왜 성녀님과 이런 실랑이를 해야 하죠?”

“정식 의뢰인으로 받아 주신다면, 당신이 레이 모나한이라는 사실을 눈감아 드릴게요.”

리젤로가 번득 눈을 빛냈다.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거래를 제안드리는 거죠.”

레이 모나한이라는 인물은, 리젤로가 꽤나 공들인 가면일 것이다.

쉽게 버리긴 아까울 정도로.

리젤로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몇 초 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디 들어 보도록 하죠.”

됐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의뢰 내용을 듣기만 한다면 리젤로는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전에, 잠시.”

리젤로가 가볍게 허공에 손짓을 했다.

순간, 이상할 만큼 주위가 적막해졌다고 느껴졌다.

“이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우리의 존재감은 아주 희미하게만 인식될 겁니다.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안심하고 말씀하시죠.”

“……감사해요.”

나는 놀람을 감추며 대답했다.

존재감을 옅게 만드는 마법이라니. 과연 온갖 이상한 마법 물품으로 떼돈을 빨아들이는 마법사답게 독특한 마법이었다.

“성력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리젤로가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 못 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나는 준비해 온 대본을 천천히, 흔들림 없이 읊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권능은 예지예요. 혹시 아시나요? 원하지 않아도 남의 미래를 엿보게 되는 고통을.”

“…….”

“번화가에라도 가게 되면, 수많은 미래의 영상들이 저를 덮쳐요. 아직 능력이 미진한 탓인지 전 그 정보들을 선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에 고통받을 뿐이죠.”

선별할 수 없는 정보 더미는 무가치하다.

리젤로는 연구자로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내가 생각해도 꽤 그럴듯한 핑계였다.

“물론 완전히 성력을 지우고 싶다는 이야긴 아니에요. 그저 너무 피곤할 때, 단 몇 초만이라도 성력을 차단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아요.”

리젤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몇 초 뒤, 그는 다소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성녀님의 약혼자는 알고 있나요? 성녀님이 이런 고민을 겪고 있단 걸.”

‘약혼자? 갑자기?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온 가짜 남편 얘기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그 사람은 알면 절대 안 되지.’

이미 경고했는데도 리젤로와 또 몰래 접선한 걸 알면, 이번에야말로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리젤로의 살벌한 질문을 아련한 미소로 받아쳤다.

“그분은 몰라요.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흐음. 모름지기 부부란 슬픔이든 기쁨이든 공유해야 하는 관계 아닌가요?”

거기까지 말한 리젤로가 씩 미소를 지었다.

“아, 하긴. 아직 진짜 부부도 아니었지요.”

묘하게 거슬리는 말투였다.

마치 진짜 부부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약혼 관계이니, 이미 부부인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문제에 난 아주 예민했다. 당연하지. 천만 마르스짜리 계약인데!

“저희 의뢰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기한은 열흘 안이었으면 해요.”

나는 헛기침을 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는 사인이었다.

리젤로는 다행히 더 이상 삼천포로 빠지지 않았다.

“성력을 차단하는 방법이라. 열흘이라는 기한은 빡빡하지만…… 뭐. 재밌는 의뢰긴 하군요.”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재밌는 의뢰 정도가 아니라, 아주 구미가 당기고 있을 것이다.

성력을 연구하는 건 그의 오랜 관심사 중 하나였으니까.

실제로 원작에서 그는 성력을 차단하는 방법을 성공적으로 발명해 냈다.

‘워낙 제약이 많은 탓에, 쓸모라고는 별로 없었지만.’

아무튼 리젤로는 분명 성공했었다. 그게 내가 이 사람을 굳이 찾아온 이유고.

“좋습니다.”

마침내 리젤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 받아들이죠.”

“흔쾌한 수락 감사합니다. 의뢰비로는 얼마를 원하시나요?”

“돈은 됐고.”

리젤로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원작 공인 돈 귀신이 돈을 마다해?

“내가 원할 때 한 번, 성녀님께서 내게 도움을 줬으면 좋겠는데요.”

리젤로가 속닥거렸다.

음험하도록 낮은 목소리로.

‘……무슨 개수작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인간이 원할 때면 아무 때나 도움을 줘야 한다고?

얼마나 곤란할 때 ‘도움’을 들먹일 줄 알고?

볼 것도 없이 불공정 계약이었다.

“아뇨. 돈으로 드리죠. 오십만 마르스. 어떠신가요?”

딱 잘라 말하자 리젤로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흠. 좋습니다.”

마침내 리젤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젤로는 마치 반짝이는 것을 찾아 헤매는 까마귀처럼 돈에 환장하는 속성을 갖고 있었다.

오십만 마르스라는 거금을 마다할 리 없었다.

‘나로서도 엄청난 지출이긴 했지만…….’

흔쾌히 감수할 수 있었다.

아니. 감수해야만 했다. 성녀 임명식을 무사히 통과할 수만 있다면.

“거래 성립이군요.”

나는 리젤로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맞잡은 그는 비밀스레 속삭였다.

“나와 정식으로 의뢰 계약을 맺는 것에 동의하나요?”

“동의합니다.”

내가 대답함과 동시에, 악수한 두 손 위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계약 마법.

효과는 이안과 나누었던 불변의 계약석이 지닌 것과 비슷했다.

나는 의뢰비를 거짓 없이 지불하고, 리젤로는 의뢰를 수행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계약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을 것.

어긴다면 심각한 페널티가 뒤따를 것이다.

계약석처럼 아마 영혼이 손상되는 종류의 페널티겠지.

“좋습니다.”

리젤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정식 고객님이 되셨군요. 성심껏 의뢰를 수행해 보도록 하죠.”

“기대할게요.”

아무도 없는 복도 속, 은밀한 거래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 * *

코델리아와의 티타임에, 리젤로와의 담판까지.

두 건의 스케줄을 해치운 나는 기운이 쪽 빠진 상태였다.

‘오늘은 오후부터 늘어지게 자야지.’

리젤로와의 거래를 담판 지었다는 뿌듯함이 나를 조금은 느슨하게 했다.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약속한 시일을 분명 맞출 터였다.

그건 리젤로라는 캐릭터를 아는 원작 독자로서의 믿음이었다.

원작 독자로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리젤로의 진짜 얼굴을 못 본 게 약간 아쉽긴 했다.

레이 모나한으로 변장하지 않은 상태의 리젤로는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그 아래 얼굴이 원작 여주가 인정할 정도로 엄청 예쁘장하단 묘사가 있었다.

뭐. 잘난 얼굴은 이미 매일같이 질리도록 보고 있었으니 진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눈 호강도 과유불급이다.

‘목욕부터 할까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거처 문을 열었다. 그새 익숙해진 공간에 집으로 돌아온 안도감이 들었다.

흐물거리며 침실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이제 옵니까?”

“으아아악!”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뚝, 뚝 끊어지는 동작으로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거실 소파에 이안이 떡하니 자리 잡은 채 날 구경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놀랍니까? 뭐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죄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나는 싱거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하하 웃었다.

‘미치겠네. 뭘 아는 건 아니겠지?’

조안 경과 아네트는 확실히 저택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리젤로와 내가 접선하는 걸 본 사람도 없었다.

‘자, 침착하자. 이서연. 무서워할 것 없어!’

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숙녀의 숙소에 언질도 없이 침입하시다니. 실례예요.”

“우리 사이에 말입니까?”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어떤 사이긴.

진하게 스캔들 퍼뜨리고 약혼한 사이지.

지금 레하트 제국에서 우리만큼 화끈하게 화젯거리가 된 연인 사이도 없을 것이다.

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이안이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안전거리, 안전거리…….’

나는 불안을 삼키며 슬쩍 뒷걸음질 쳤다.

곧 벽을 만난 탓에 내 거리 확보를 위한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죄지은 게 확실히 있다 보니, 이안을 마주 보는 것이 영 편하지 않았다.

“불쑥 찾아온 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쾌하지 않은 정보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예, 예?”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나는 이번엔 또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의 얼굴에 삐딱한 미소 한 조각이 걸쳐져 있었다.

“그대가 낯선 남자와 독대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설, 설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리젤로와 대화했던 장소엔 분명 아무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리젤로가 먼저 눈치채고 시야를 차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법까지 썼잖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데,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아덴 오델로, 라고 했던가.”

뜻밖의 이름에 귀가 번쩍 뜨였다.

“꽤나 오랫동안 테라스에서 만남을 가졌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아. 그 얘기였구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리젤로와의 일은 들키지 않은 듯했다.

“아덴 님과는 별 이야기 안 나눴어요. 일이 없었던 건 아닌데, 시시한 이야기예요.”

이안에게 목걸이가 어쩌고 강매가 어쩌고 설명하기는 귀찮았다. 이안도 그런 얘길 듣고 싶진 않겠지.

그래서 대충 넘어가려고 한 건데, 이안이 묘한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아덴 오델로. 작년 ‘레하트의 꽃’ 남성 부문 우승자였다고 루시안이 전해 주더군요.”

레하트의 꽃?

그게 뭐더라.

잠시 뒤 나는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레하트의 꽃’은, 매년 제국 최고의 미남 미녀를 뽑는 미인 대회였다.

원작 남주가 얼떨결에 참가했다가 우승하는 에피소드가 있어 떠올릴 수 있었다.

“……정말로요?”

나는 아덴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아름답고 잘생긴 용모긴 했다.

하지만 최고의 미남 상을 탈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안을 훑어보았다.

‘이 사람은 참가를…… 음. 안 했겠구나.’

그래. 당연히 안 했겠지.

나는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만하네요.”

“예쁘장한 쪽이 취향이신가 봅니다, 부인께서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는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묘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아덴 님과는 몇 분 정도 대화한 게 전부예요.”

“그렇습니까?”

“네. 그럼요. 구구절절 설명할 일이 아니라 말씀을 안 드리는 것뿐이지, 진짜 별것 없었어요.”

“흐음.”

이안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양다리는 안 됩니다, 부인.”

‘엥?’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요? 양다리? 아덴 님이랑요?”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벗겨 먹을 게 없어서 성녀님이나 벗겨 먹는 녀석과 내가? 양다리?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려 천만 마르스 짜리 결혼 계약이다.

절세 미남이 살살 웃으며 유혹해 온다 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런 타입은 남자로 안 느껴져서요. 제 취향은 좀 더 어깨도 있고, 키도…….”

마침 앞에 적절한 샘플이 있었다.

나는 고개 들어 이안의 키를 가늠해 보며 말했다.

“이안 님 정도는 되어야죠.”

이안이 슬며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닌가. 너무 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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