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61)

20화

* * *

“아네트 양, 내게 온 카드 같은 것들은 없나요?”

“아, 모았다가 정오에 드리려 했는데 지금 바로 가져다드릴까요?”

“네, 부탁해요.”

곧 아네트가 수북이 쌓인 카드 더미를 가져다주었다.

척 보기에도 상당한 양이었다.

“아이린 님 앞으로 온 초대장이 굉장히 많아요! 제가 가지러 간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도착하고 있더라고요.”

“와아, 감사한 일이네요.”

저 카드 더미는 모두 초대장이었다.

당연했다. 어제 있었던 약혼식은, 말하자면 내 세미 데뷔에 가까웠다.

어제 뒤풀이 연회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이 신나게 초대장을 보낸 모양이었다.

원작 속에서도 여주인공이 데뷔 다음 날 쏟아지는 초대장에 놀라워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 양은 놀랍긴 하네.’

나는 엄청난 카드 더미를 하나하나 뒤져 보았다.

이 안에 내가 찾는 것이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머지않아 나는 더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초대장을 발견했다.

‘우와, 번쩍번쩍.’

순백색과 화려한 황금 장식으로 빛나는 초대장은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얼른 그것을 집어 든 나는 발신인부터 확인했다.

‘역시.’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발신인은 코델리아 베르나데트.

어제 뒤풀이 연회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그 막내 성녀였다.

번쩍이는 초대장은 잘나가는 명문가인 베르나데트 백작가의 재력을 짐작게 했다.

“이건, 코델리아 님의 초대장이네요?”

나는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코델리아 님이 초대해 주시다니…….”

“어머, 당연하죠! 아이린 님도 아직 성녀 임명식만 치르지 않았을 뿐, 엄연히 성녀로 인정받고 계시는걸요. 참석하고 싶으세요, 아이린 님?”

벌써 이렇게까지 성녀 특전을 잔뜩 얻다니.

검증 절차에서 삐끗하기라도 했다간 정말 큰일 나겠는걸. 하하하.

진땀 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일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가고 싶어요.”

내 대답에 아네트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처음으로 친구 집에 놀러 가겠다고 하는 딸을 보는 듯했다.

“오, 초대 날짜가 수요일이네요. 코델리아 님은 수요일마다 정기 친목회를 열기로 유명하시거든요.”

“그렇군요!”

물론 알고 있었다. 그게 이 수많은 카드 더미 중에서 코델리아의 초대장만을 찾아 헤맨 이유였으니까.

“코델리아 님과 친해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친구를 사귈 기회에 부푼 아이처럼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아네트 양, 여기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내 줘요.”

“넷! 아이린 님!”

아네트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리고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지만요.”

아네트가 답지 않게 손가락까지 꼬면서 뜸을 들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뭔데 그래요?”

“이쪽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리세요!”

이쪽 모습?

……아.

나는 내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나는 변신 가루를 쓰고 있지 않았다. 즉, 분홍 머리와 금안인 본래의 모습을 한 채였다.

‘이미 사람들 앞에서 다 까발려졌으니, 계속 변신 가루로 변장하고 다니는 것도 웃기고.’

아무리 그래도, 분홍색 머리라니.

나는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내 머리칼을 응시했다.

솜사탕처럼 밝고 발랄한 색감의 머리는, 과연 암흑 길드원이었던 ‘76번’이 필사적으로 숨길 만큼 화려한 색이긴 했다.

“정말 동화책 속 성녀님 모습 그 자체 같으세요.”

대놓고 하는 찬사가 쑥스러운지 아네트가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하하. 고마워요. 아, 그리고, 아네트 양. 저번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나는 목소리를 홱 낮추고 감사 인사를 했다.

조안 경은 우리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아네트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뭘요.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아네트 양도 알겠지만, 약혼식은 몹시 중요한 날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날 아침에 예상치 못하게 변신 가루의 효력이 다 떨어져 버려서 너무 당황했었답니다.”

“네, 네.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착하고 순수한 아네트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주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아네트 양.

천사이자 요정인 아네트를 속인 나는 분명 지옥에나 갈 것이다.

“약속은 잊지 않을게요.”

“어휴! 보답 같은 건 정말 괜찮은걸요.”

우리는 밀수 중인 도굴꾼들처럼 쑥덕거렸다.

조안 경이 우리를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기에, 나는 슬그머니 고개 돌려 조용히 차나 마시는 척을 했다.

다행히 조안 경이 다가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전부 불라며 닦달하는 일은 없었다.

* * *

“아이린 님께서는 성당 생활에 잘 적응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그런가.”

루시안의 보고에 이안이 흘려듣듯 응했다.

“예. 오늘은 코델리아 님의 티 파티 초대장에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하셨다더군요.”

“코델리아라.”

이안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코델리아 베르나데트는 유일하게 아이린과 나이대가 같은 성녀로, 아이린으로선 친해지면 좋을 인재이기는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단순한 계산만으로 그 사람이 움직였을까?

이안의 머릿속으로, 어젯밤 제 손에 분홍색 머리카락을 쥐여 주며 뻔뻔히도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다음엔 진짜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할게요. 그럼 이만! 밤이 늦었네요.’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안은 낮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란 말이지.’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저 제게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싫지는 않았다. 대하기는 그편이 쉬울 테니까.

그런데.

‘볼에 작별의 키스. 빨리요!’

‘저희, 피차 숨기고 있는 것이 있잖아요.’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 이안은 벌써 수차례 그녀에게 놀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여자. 내일이 되면 또 어떤 행동으로 의외의 면모를 보여 줄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안은 변수를 싫어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용수철처럼 튀어 다니는 그녀에게로 시선이 흐르는 것은.

“파르아스 백작 쪽은 어떻게 되었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은 분명한데요.”

“비욘틴 공작 쪽을 파 봐.”

“알겠습니다.”

대표적 친황제파인 비욘틴 공작의 이름에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아스 백작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든,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꼭대기에 누가 있을지는 뻔했다.

제 형의 낯짝을 떠올린 이안은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신은 일전 맹세한 적이 있었다.

다시는 소중한 것을 그에게 잃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아이린 그레이스는, 현재로서 그의 꽤나 귀중한 전략적 파트너였다.

‘예측이 힘들다는 게 흠이기는 하지만.’

“코델리아 성녀의 초대에 참석한다고 했지.”

“아이린 님이요? 예, 그렇습니다.”

“내 마차를 보내라.”

“아, 넵! 알겠습니다.”

루시안은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곧 경례와 함께 대답했다.

* * *

“이건?”

나는 거대한 마차를 올려다보았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오라를 풍기는 마차였다.

청금빛으로 장식된 순백색 마차.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차는 마치 신화 속에서 신이 끌고 다닐 법하게 눈부셨다.

아네트도 놀란 눈을 했다.

“이건 이안 님의 마차인데……! 조안 님, 정말 이안 님께서 이 마차를 보내신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우와…….”

아네트가 헤 벌린 입을 하고 반짝이는 눈으로 마차를 감상했다.

아네트의 반응으로 보아 아무리 약혼녀라곤 해도, 남에게 자기 마차를 보내는 게 흔한 일은 아닌 듯했다.

‘떡하니 애인 이니셜이 쓰인 전용기를 타고 가는 느낌인가.’

뭐, 나쁠 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내부는 놀랍도록 아늑해 보였다.

여러 방어 마법도 작동 중이라며 조안 경이 설명을 곁들였다.

말만 들으면 무슨 마차 모양을 한 최첨단 방어 요새 같았다.

덕분에 나는 요새 안에서 코델리아의 저택까지 아주 안락히 이동할 수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지않아 우리는 베르나데트 백작가 앞에 도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린 그레이스 님이 맞으시지요?”

베르나데트가의 집사로 보이는 인물이, 경외감 어린 눈으로 내가 타고 온 마차를 흘끔거리고는 정중히 인사했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디 이쪽으로.”

나는 집사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이동했다.

사용인들의 시선이 무수히 내게로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집사가 커다랗고 화려한 살롱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에서부터 밝은 빛과 음악, 그리고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웃음소리는 몇 초 후, 모두 나를 발견하면서 뚝 끊겼다.

“와 주었군요. 아이린 양.”

코델리아가 고고한 자태로 내게 다가왔다.

꿀 같은 금발에 살굿빛 뺨을 한 그녀는 오늘도 몹시 예뻤다.

‘패션 센스는 여전히 몹시 독특하지만…….’

코델리아는 이번에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원색 옷과 장신구를 걸친 상태였다.

특히 새빨간 루비 목걸이와 새파란 사파이어 귀걸이의 놀라운 부조화가 눈길을 끌었다.

‘저래도 예쁘다니, 역시 얼굴이 깡패야.’

“안녕하세요, 코델리아 님! 초대해 주셔서 몹시 기뻤답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코델리아에게 마주 인사했다.

코델리아가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곤 날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미 자리해 있던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오델로 백작가의 아덴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이린 님. 알로이스 남작가의 로레나입니다.”

아덴이라는 영식과 로레나라는 영애는, 내가 오기 전까지 코델리아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최측근인 듯했다.

인사해 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나는 코델리아의 안내대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코델리아가 말을 건넸다.

“온 수도 사람들이 그대 이야기를 하더군요.”

“과분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아니죠. 그대는 그 이안 경께서 처음으로 택한 연인이니.”

그때 로레나가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오늘 자 <제국의 아침>에 실린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아이린 님께서 납치되었었다는―”

“로레나 양.”

딸깍, 소리가 나도록 코델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로레나가 깜짝 놀란 얼굴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너무 내밀한 이야기는 묻지 않도록 하죠.”

“아, 네. 죄송합니다, 아이린 님…….”

로레나가 풀 죽은 얼굴로 사과해 왔다.

나는 살짝 놀라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혹시, 내가 아픈 과거를 떠올릴까 봐 그러는 건가?’

살짝 놀랐다.

코델리아는 의외로 꽤 마음이 여린 타입인 모양이었다.

‘인상이랑은 딴판이잖아.’

나는 이 막내 성녀님이 조금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날씨 얘기 같은 실없는 대화를 살짝 나누는 동안, 또다시 살롱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활기찬 인사와 함께 수 명의 사람들이 엄청난 크기의 행거를 끌고 들어왔다.

행거엔 온갖 휘황찬란한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다.

“이번 저희 오델로 상단에서 입수한 신상품을 모두 가져왔답니다.”

“저희 알로이스 상단에서는 서방 왕국에서 수입한 최고급 실크로 특별한 감성을 자아내 보았어요.”

잘 차려입은 직원들이 앞다투어 코델리아에게 영업하기 시작했다.

코델리아와 그의 친우들은 익숙한 태도로 그 모습을 관람했다.

‘음. 이런 콘텐츠가 있었군.’

화려한 옷과 장신구의 향연이 펼쳐졌다. 눈요기로는 괜찮은 구경거리였다.

‘근데 왜 하필 저런 걸?’

머지않아 나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오델로 상단과 알로이스 상단에서 나왔다는 직원들이 각자 코델리아에게 장신구를 권하고 있었다.

거의 시뻘겋게 빛날 정도로 색이 강한 보라색 귀걸이와, 희멀건 하늘색 목걸이를 두 직원이 각각 코델리아에게 채워 주었다.

‘아이고, 아무리 얼굴이 깡패라지만 저건 좀…….’

나는 나도 모르게 혀를 쯧쯧 찼다.

‘잠깐. 그러고 보니 오델로 상단과 알로이스 상단이라면…… 혹시?’

나는 코델리아의 최측근인 아덴 오델로와 로레나 알로이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흐뭇한 얼굴로 제 상단 직원들이 열띠게 영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너무너무 잘 어울리세요.”

“이 색상을 이렇게 완벽히 소화하시는 분은 처음 본다니까요.”

직원들의 칭찬 폭격에 코델리아는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 양. 그대 생각은 어떻죠?”

그때 코델리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보라색 귀걸이와 하늘색 목걸이를 찬 채로.

보라색과 하늘색도 어울리는 톤이라면 어울릴 텐데, 저 두 장신구는 놀라울 정도로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자신의 미모가 너무나도 뛰어나 사람들의 시력이 다칠까 봐, 자체 다운그레이드를 시키고 있는 것이라 해도 믿을 수 있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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