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이안의 아이디어는 파격적이었지만 그만큼 매력 있었다.
게다가 내가 좀 전에 던졌던 약간의 무리수, ‘분홍 옷을 입고 싶어서 머리를 다른 색으로 염색했다’ 발언과도 잘 어울렸다.
나는 우리 성기사단장님이 제시한 새 거짓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내 방 앞에 도달한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작별할 시간이었다.
“아, 참. 이안 님.”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안을 돌아보았다.
“제 머리카락, 사실 가짜예요.”
“예?”
역시 이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얼른 후속타를 던졌다.
“원래는 분홍색이랍니다.”
“무슨…….”
나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똑 끊어 이안에게 건네주었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들은 금세 마법을 잃고 분홍색으로 변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감춰 놓고 있었는데, 미리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농담합니까? 이런 걸 깜빡했다고?”
“정말 죄송해요. 아, 눈도 원래는 노란색에 가까운 금빛이랍니다. 다음엔 진짜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할게요. 그럼 이만! 밤이 늦었네요.”
“거기 서시죠, 부인.”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나는 우뚝 굳었다.
역시 저 인간이 이런 사안을 그냥 넘어가 줄 리가 없었다.
‘망할 파르아스 백작 놈!’
하긴, 그자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밝혀야 할 일이긴 했지만.
불쑥 가까워진 이안이 내 턱을 쥐었다. 빤한 시선이 얼굴 위를 뚫어지라 훑는 게 느껴졌다.
“……가짜라고, 이게 전부.”
이안의 혼잣말에 나는 도리질을 쳤다.
“색깔만 바꾼 거예요. 말씀드렸다시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요. 노예 상단 놈들이 얼마나 끈질긴지 이안 님도 아시잖아요.”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라.”
이안이 낮게 혀를 찼다.
“역시, 당신. 지나치게 수상한 거 압니까?”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불어 보시죠. 진짜 정체가 뭔지.”
악마처럼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나는 간신히 긴장을 가라앉히며 이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저희, 피차 숨기고 있는 것이 있지 않나요.”
이안이 움찔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진짜 정체를 숨기고 있듯, 이안도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었다.
황제를 끌어내리겠다는 진짜 목적을.
“저도 그렇지만, 이안 님께서도 제게 모든 걸 열어 놓으셨을 리는 없죠. 하지만 약속할게요. 제가 숨긴 게 무엇이든, 일 년간은 당신의 충실한 부인일 뿐이에요.”
“…….”
이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
그때 저 멀리 복도에서 한 무리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릴 발견했는지 다가오던 이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키스해 주세요.”
나는 이안을 올려다본 채 속삭였다.
내가 느낀 인기척을 소드 마스터인 이안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이안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내 뺨 위로 스치듯 입술을 가까이했다.
“당신에게 너무 많은 호기심이 들게 하진 마시죠. 이 이상 의문이 쌓이면 곤란합니다.”
얕은 소름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 * *
다음 날.
수많은 제도민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국의 아침>을 탐독했다.
“다들 오늘 <제국의 아침> 보셨나요?”
“물론이죠. 세상에…… 아이린 님께 그런 과거가 있었을 줄이야.”
티타임을 명목으로 모인 귀족들이 흥분해 속닥거렸다.
“아이린 님이, 왕족이었다니!”
“그것도 먼 섬나라의 공주였다니요!”
평화로운 나날에 젖을 대로 젖은 레하트 제국의 귀족들은, 낭만적이라고 느껴지는 사건에 사족을 못 쓰는 특징이 있었다.
새로이 등장했다는 성녀가 먼 섬나라의 공주였다는 사실은 모두를 흥분케 했다.
어제 뭇 레이디들을 술렁이게 했던 발언, ‘분홍색 옷과 안 어울리니 분홍색 머리를 바꿨다’는 그 말도 이제야 한결 이해가 갔다.
아무리 변방의 작은 섬나라라 해도 왕족은 왕족. 곱게 자란 공주라면 그만한 사치가 익숙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몹쓸 놈들이 아이린 님을 납치했다지요?”
“그러니까요. 그걸로도 모자라 노예로 팔아넘겼다잖아요.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미개한 놈들!”
“노예로 팔려 가던 마차를 구한 게 다름 아닌 이안 님이었다니. 이런 극적인 운명이 또 어디 있을까요?”
이안은 소드 마스터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종종 국경 밖으로 마물 토벌을 나가는 일이 있었다.
노예 제도가 엄격히 금지된 레하트 제국과 달리, 이웃 국가들에서는 아직 암암리에 노예 매매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안은 그런 노예 상단을 급습하여 노예들을 풀어 주는 미담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노예로 팔려 가던 공주가, 구출해 준 성기사와 사랑에 빠지다니…….”
“너무 극적이고 낭만적이에요. 이게 현실이라니. 극작가들 전부 실직하겠는걸요!”
“어쩐지. 새로운 성녀님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어제 뒤풀이 연회 자리에 있었던 영애 한 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싶어서 변신 가루를 쓰고 다녔다니.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는 모습에 감탄했지 뭐예요.”
“정말 호화로운 사고방식이에요. 그런 분이 노예로 납치되셨다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 충격으로 부분 기억 상실증을 앓고 계시다잖아요.”
“모두 새로운 성녀님을 대할 땐 조심하도록 해요. 함부로 과거 얘긴 꺼내지 말자고요.”
한 부인의 말에 다들 안타까운 표정으로 동의했다.
“어서 성녀 임명식이 열렸으면 좋겠네요. 새로운 성녀님께선 어떤 권능을 지니셨을까요?”
“궁금해서 못 견디겠네요.”
“좀 걱정되기도 해요. 여태껏 코델리아 성녀님이 아주 오래 막내 성녀님이셨잖아요. 다들 알다시피, 코델리아 님 측근들 성격이 좀…….”
“유별나죠?”
누군가의 일침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제 말이요. 새 성녀님께서 텃세로 당하시진 않을지.”
“에이, 이안 님이 있잖아요. 어제 괜히 파르아스 백작이 덤볐다가 된통 깨진 이야기, 다들 들었죠?”
“백작을 몰아붙이는 이안 님 얼굴이 그렇게 무시무시했대요. 아아, 직접 봤어야 했는데…….”
“제 말이요…….”
아쉬운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 * *
“도망 노예라고?”
황궁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황제의 개인 집무실.
오고 가는 시종조차 적을 만큼 은밀한 공간에 황제, 라시드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하하하하!”
즐거운 듯 떠나가라 웃은 라시드가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보석 하나를 집더니, 보고하러 온 시종에게 휙 던졌다.
“받아라. 짐을 즐겁게 한 대가라.”
“감사…… 감사합니다.”
시종이 얼떨떨한 얼굴로 보석을 받으며 말했다.
라시드는 순식간에 시종에게서 관심을 끄고는 제 황후를 돌아보았다.
“파르아스 백작을 광대로 내세우길 잘했군. 이렇게 재밌는 소식이 들려오다니…… 우리 새 성녀님이, 설마 노예 출신이었을 줄이야. 이거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겠는걸. 그렇지 않소? 황후.”
황후, 로렐라이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많은 것이 달라지지요.”
“아우님도 참.”
라시드가 픽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기에 이제 와서 후사라도 보겠다는 건가, 놀랐었는데. 쟁쟁한 가문의 여자와 맺어지기로 한 거였다면 확실히 의심스러웠겠지만……. 도망 노예라면 얘기가 다르지.”
라시드의 입매에 삐딱한 비웃음이 걸렸다.
먼 섬나라의 왕족이었다는 과거는 쓸모없었다.
세계는 가늠할 수 없이 넓고, 나라와 왕족 역시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다.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하잘것없는 왕국의 왕족 따위야, 황제 라시드에게는 위대한 레하트 제국의 평민보다도 가치 없는 존재.
‘중요한 건 그 여자가 한 번이나마 노예 명부에 적을 담았었다는 사실이지.’
라시드가 천천히 제 턱을 쓰다듬었다.
노예는 노예.
아무리 레하트 제국이 노예 제도를 엄격히 반대하고 이국의 노예 구제에 진심이라지만, 황실과 관련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황실은 가장 보수적인 집단. 이국의 노예를 황후로 들인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안이 정말 그 성녀를 부인으로 맞는다면, 그건 곧 그에게 황위를 노릴 의지가 없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했다.
“역시…… 내 아우는 믿음직하단 말이야.”
라시드가 입술을 핥으며 울었다.
“충실하고, 쓸모 있는…… 개새끼.”
최강의 무력.
아름다운 얼굴.
그에게 충성하는 수많은 성기사들까지.
적으로 돌리면 무서울 존재였으나, 목줄 쥔 개일 땐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리고…… 노예든 뭐든. 확실히 재밌는 여자긴 했어.”
라시드가 느릿한 동작으로 턱을 괴었다.
자신이 이안 ‘경’이라는 말실수를 한 순간, 아이린의 표정은 분명 미묘하게나마 달라졌었다.
‘내가 황제라는 걸 눈치챈 것이었겠지.’
특이한 건 그다음이었다.
보통 황제를 배알하는 이들은 둘 중 하나의 태도를 보인다.
두려워하거나. 혹은 경애하며 아부하거나.
아이린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와 거리를 두려는 듯한 느낌이었지.’
황족 앞에선 평민이든 귀족이든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기 마련.
그런데 그 여자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
“그 새로운 성녀란 아이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겁니까?”
황후, 로렐라이의 목소리가 라시드의 상념을 끊었다.
“하기야 십오 년 만의 성녀라고 세상이 시끌벅적하니, 폐하라고 다르실 것은 없겠지요.”
“하하. 새로 들어온 후배라고 견제하는 것이오?”
라시드가 즐겁게 웃더니, 로렐라이의 머리칼 끝을 살짝 잡아 그 위에 입 맞췄다.
“새 성녀님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그대만큼 신의 사랑을 받는 성녀는 어디에도 없을 테지. 나의 황후여.”
“말씀은 잘하시는군요.”
로렐라이가 입가에 빙그레 호선을 그으며 웃었다.
* * *
“파르아스 백작이 신성 모독죄로 구금되었대요!”
간식 담긴 트레이를 끌고 온 아네트가 신나서 외쳤다.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신성 모독죄라고요?”
“범죄자가 아니냐며 감히 성녀님을 추궁했다는 거지요! 아직 임명식이 열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미 아이린 님이 성녀라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 이안 님이 인정하셨으니까요!”
“하하…… 그런가요.”
성녀 임명식이란 단어에 나는 물에 불린 미역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약혼식은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진짜 관문은 이제부터였다.
‘어떻게든 성녀 임명식을 통과해야 해.’
성녀 임명식을 주관하는 케넨 주교가 돌아오기까지, 앞으로 열흘 남짓 남았다.
그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든 수단을 마련해야만 했다.
‘으으. 그때 리젤로를 만났어야 했는데!’
다시 마탑을 찾아가 볼까?
그때 이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 마탑이 궁금하다면, 내게 부탁하십시오. 동행해 줄 테니.’
나는 힘없이 고개 저었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굳이 또 혼자 마탑을 찾아간다면 이번에야말로 의심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몰래 탈출할 수도 없고…… 이 일을 어쩌나.’
젖은 빨래처럼 의자 위에 늘어져 있던 나는, 문득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왜 이게 이제야 떠올랐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생각났다. 마탑에 가지 않고도 리젤로를 만날 수 있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