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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161)

17화

“그대. 신께서 새로이 보내신 성녀라지요?”

오. 처음부터 직구.

난 직구를 던진 주인공을 돌아보았다. 옅은 레몬색 금발을 늘어뜨린 영애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예쁘다.’

원색뿐인 데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들을 두른 여자였는데, 그럼에도 눈이 부신 미인이었다.

“내 이름은 코델리아 베르나데트.”

‘코델리아?’

익숙한 이름에 나는 멈칫했다.

코델리아 베르나데트라면 아는 이름이었다. 분명…….

‘십오 년 전에 부름받았던, 막내 성녀.’

그 뒤 십오 년이나 성녀가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최장기 막내 성녀가 된 사람이었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고 매끄러운 미소를 장착했다.

“코델리아 성녀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린 그레이스라고 해요.”

“반가워요, 아이린 양. 그대가 새로운 성녀라는 소문을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코델리아 성녀는 몹시 돌직구를 사랑하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나는 흠, 살짝 헛기침을 하곤 눈을 내리깔았다. 부끄럽다는 듯.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성당 안이기는 했어요. 보통 성녀님들께서는 그런 식으로 부름을 받으신다더군요.”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겸양.

이미 나는 이안과의 약혼 덕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 몸에 관심을 받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겸손이 필요했다.

“저처럼 미천한 자가 설마 성녀로 부름받았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성녀 검증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기에, 성녀라고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어요.”

“그래요?”

코델리아가 천천히 내 얼굴을 훑었다.

“검증 절차와 상관없이, 정말 성녀라면 권능은 이미 주어졌을 텐데. 느껴지는 힘은 없나 보죠?”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참고로 나는,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그렇게 말한 코델리아는 잠깐 눈을 감고 턱을 쳐들었다.

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이 칭찬하기 적기인 타이밍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꽃을 달여 마시면 굉장한 원기 회복 효과가 있다지요?”

나는 두 손까지 맞잡으며 눈을 반짝거렸다.

“정말 굉장한 권능이라고 생각했어요. 동화 속에 나올 것처럼 낭만적이기도 하고요!”

“흐, 흠. 그런가요?”

아무래도 제대로 타이밍을 맞춘 듯했다.

코델리아는 유일하게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성녀. 사교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 중인 성녀이기도 하다고 들었다.

잘 지내 둬야 앞으로의 일 년간이 조금이나마 순탄해질 터였다.

“언제 한번 꼭 성녀님의 권능이 담긴 차를 마셔 보고 싶어요. 물론 제 소망일 뿐이지만요.”

“흐흠, 뭐. 차 한 잔 정도야 얼마든지…….”

그때 코델리아의 곁을 친위대처럼 감싸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슬쩍 그녀에게 눈짓했다.

코델리아가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했다.

“흠! 아무튼. 그렇다면 이안 님과는 언제부터 친분이 시작된 건가요?”

또 돌직구가 나왔군.

영애들이 호기심과 흥분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엔 탐탁잖은 시선도 분명 존재했다.

‘지금인가.’

나와 이안의 러브 스토리를 털어놓을 때가.

‘내가 이안의 침대에 떨어져서, 꿈인 줄 알고 서로를 탐했다던 그 이야기 말이지.’

감독: 이안,

각본: 이안,

연출: 이안인 그 러브 스토리.

순결남 머리에서 나온 주제에 몹시 난잡하고 음란한 스토리이긴 했지만, 확실히 자극적이었다.

이런 스토리를 풀어낸다면, 만족한 사람들은 그 뒤에 숨은 ‘진짜’를 파헤칠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조금 길고, 또…… 부끄러운 이야기랍니다.”

뺨을 붉히고 그렇게 말하자 모두의 눈빛이 번득였다.

이 이야기의 음란한 정도를 다들 본능적으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들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나는 이안과 나의 가짜 러브 스토리를 못 이긴 척 털어놓기 시작했다.

가릴 곳은 가리고, 드러낼 곳은 드러내며, 상상의 여지가 한껏 남도록.

“어머나.”

“맙소사.”

모두 숨죽일 정도로 집중한 가운데, 종종 그런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한 영애는 거의 피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있었다.

‘저기 레이디, 콧김 닿아요.’

이안이 마침내 내 침의 안으로 손바닥을 밀어 넣었단 대목을 털어놓던 순간이었다.

“아이린 님. 여기 계십니까?”

웬 남자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뭐야! 무슨 일이지?”

“여기에 웬 남자?”

“으! 하필 이럴 때!”

다들 깜짝 놀라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금남 구역. 레이디들만의 파티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살롱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엔 곤란한 얼굴을 한 주교를 대동한 채.

“파르아스 백작님?”

한 영애가 놀란 얼굴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파르아스 백작?’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인 것 같긴 한데.

나를 발견한 파르아스 백작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외람된 방문 죄송합니다. 레이디들.”

영애들을 향해 고개 숙인 백작이 나를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아이린 님. 당황스러운 제보를 입수한 탓에, 이렇듯 송구함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파르아스 백작, 억측이라니까요……! 이안 님께서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파르아스 백작을 따라온 주교가 난처한 얼굴로 말렸다.

그러나 백작은 막무가내였다.

“이건 아이린 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의혹은 뿌리 뽑아야 하니까요. 아이린 님도 이런 의혹을 남겨 두고 성녀 임명식을 치르고 싶지는 않으실 테니.”

“대체 무슨 이야길 하시는 건가요?”

참지 못하고 묻자, 백작이 묘한 미소와 함께 내게 말했다.

“이곳은 이목이 많으니, 테라스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나와 백작, 주교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봤자 테라스가 두꺼운 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살롱에 있는 사람들이 귀만 기울이면 다 들릴 터였다.

‘대체 무슨 얘길 꺼내려는 걸까.’

나는 마주 선 파르아스 백작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백작이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먼저, 이런 불경한 말씀을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저도 이런 일로 당황시켜 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어젯밤 아이린 님에 대한 불유쾌한 제보가 들어왔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불유쾌한 제보라고 하셨나요?”

백작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예. 아이린 님의 과거에 대한 제보였습니다.”

“제 과거에 대한 제보라.”

나는 느릿하게 그 말을 되풀이했다.

‘설마 나인에 속해 있을 때의 일을 얘기하는 건 아닐 테고.’

나인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 속한 길드원들은 나인에게 모든 것을 철저히 통제받는다.

신원도 이름도 없는 그들은 유령처럼,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임무만을 수행한다.

고작 며칠 짜리 뒷조사로 캐낼 수 있는 과거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나는 파르아스 백작을 향해 순진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떤 과거를 제보받으셨다는 말씀인가요?”

결론은 간단하다. 백작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가 제보받았다는 내 ‘과거’는, 꾸며 낸 함정일 확률이 구십구 퍼센트였다.

“제게 들어온 제보로는 아이린 그레이스 님께서, 이웃 나라 판게나의 도망친 수배범이라고…… 하더군요.”

백작이 민망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수배범이요?”

“예. 사기와 도박을 일삼던 범죄자라고…… 물론 저는 절대, 아이린 님과 그 수배범이 동일 인물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파르아스 백작이 힘주어 말했다.

“의혹이 생겨난 이상, 해명하지 않으시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겁니다. 아이린 님이 성녀로 활동하시기 전부터 이런 오해에 시달리시게 된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백작이 착잡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아이린 님. 아이린 님께서 직접, 성녀로 부름받기 전 어떤 삶을 보내셨는지 밝혀 주십시오. 그러신다면 이따위 난잡한 오해는 완벽히 차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길게 말은 돌려 했지만, 결국 파르아스 백작의 의도는 하나였다.

내 과거를 알아서 불라는 얘기다.

“음.”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참으로, 타당한 말씀이세요.”

파르아스 백작의 사고 회로는 대충 이해가 갔다.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속에서, 파르아스 백작은 황제파 귀족 중 하나로 등장한다.

황제파는 또다시 둘로 갈렸다.

제1 황위 계승권자인 데다, 능력과 인기까지 출중한 이안을 견제하는 파.

그리고, 이안이 여태껏 그래 왔던 황제를 잘 보필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를 두둔하는 파.

파가 갈린 이유는 현 황제가 이안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파르아스 백작은 이안을 견제하는 인물 중 대표 격이었다.

그런 그이니 내 뒷조사도 당연히 신문을 보자마자 진행했을 것이다.

‘조사를 아무리 해도 과거를 캐낼 수 없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곧 이 정도로 꽁꽁 숨긴 과거라면 구린내가 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런 기대로 이런 수를 뒀을 테다.

나쁜 시도는 아니었다.

‘썩 좋은 수도 아니었지만.’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은 잠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곤 품속에서 웬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이 수배지를 보십시오.”

수배지엔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감자에 이목구비만 달아 놓은 듯 엉성한 초상화가.

“화공의 그림 솜씨가…… 그리 좋지 못한 것 같군요.”

“흐, 흠. 수배범에 대한 확실한 몽타주를 손에 넣지 못해 이렇게 애매한 초상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갈색 머리와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성별과 나이대는 아이린 님과 꼭 들어맞더군요.”

하아.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듯, 아이린 그레이스는 아주 흔해 빠진 이름이었다.

갈색 머리와 초록 눈이란 외모 역시 흔했다.

전 대륙을 뒤진다면, 내 외모적 특징과 이름이 겹치는 범죄자를 찾기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범죄자를 찾기 위해 밤새도록 일했을 백작의 부하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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