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61)

16화

‘다 들립니다, 여러분.’

나는 대기실에서 습, 하, 습, 하,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많이 긴장됩니까?”

내 곁에는 이안이 서 있었다.

짙푸른 예복을 차려입고서.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꾸며 놓으니 말 그대로 존재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랑 손을 잡고, 저 수많은 관객 앞에 나서야 한단 말이지?’

여기 온 하객들은 나에 대한 호기심으로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트집 잡고 싶어 하는 사람도 당연히 많겠지.

안 그래도 긴장되는데, 하필 약혼자가 지나치게 잘생긴 바람에 이만 마르스짜리 드레스로 치장한 보람이 팍팍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누구나 오징어가 된다고!’

“긴장해서 대답도 못 할 정도입니까?”

이안이 의아해하며 내게 다가왔다.

부담스러운 미모가 가까워지자 나는 나도 모르게 퉁명스레 말했다.

“저리 가 주세요. 이안 님 얼굴은 지금 도움 안 돼요.”

“왜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입니까. 어제 마차에서 날 도발하던 사람과는 딴판인데.”

이안이 나를 향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첫날밤을 위해 빨리 익숙해져야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레이디는 어딜 갔습니까?”

그 얘길 지금 하는 건 반칙이지.

나는 살며시 이안을 노려보았다.

……대놓고는 아니고, 살그머니.

“긴장될 수밖에 없죠. 다들 내 약점이라도 발견하면 잘 걸렸다 하고 물어뜯을걸요. 피부가 별로네, 머릿결이 푸석하네 등등…….”

“대체 누가 당신에게 트집 잡는단 말입니까?”

“아, 물론 이안 님의 약혼녀이니 대놓고 그러진 못하겠죠. 하지만 뒤에선 틀림없이―”

“아니, 거울을 보십시오.”

이안이 내 어깨를 잡아 거울 쪽으로 돌려세웠다.

얼떨떨하게 돌아본 거울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표정이 얼어붙은 여자가 서 있었다.

“흠잡을 만한 곳이, 내 눈엔 안 보이는데.”

이안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부터 귓가로 스며들었다.

뭐, 뭐야. 나는 몸을 뻣뻣이 굳혔다.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인간이었어?

‘나름의 응원…… 이겠지?’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장본인의 너무한 미모 때문에, 지금 이 시각에도 거울 속의 내가 실시간으로 오징어화하고 있단 거였다.

‘에휴, 뭐. 그래. 저 인간 옆에선 누가 안 꿇리겠어.’

포기한 나는 케세라세라 모드가 됐다.

남자가 아깝다고 백번 수군거리라지. 어차피 이안 옆에선 안 아까운 인간 찾기가 더 힘들걸.

내 표정에 자신감이 돌아오자, 눈치챈 건지 이안이 픽 미소를 지었다.

“준비됐습니까?”

살짝 고개 숙인 이안이 귓가 옆에서 속삭였다.

솜털이 바짝 솟는 느낌이 귓가로부터 발끝까지를 찌르르 관통했다.

“저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당신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는 꾹 두 주먹을 쥔 채,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빙그레 미소 지은 이안이 도로 상체를 펴고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에게 고갯짓했다.

기사들이 양옆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진짜 연극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 * *

“저 레이디가…….”

“이안 님의 그분이군요.”

문이 열리고, 오늘의 주인공 커플이 입장하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던 좌중이 곧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안의 손을 잡고 등장한 레이디에게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확실히 제도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에요.”

“귀엽게 생겼군요.”

“아니, 저 드레스는 메르시 씨 작품 아니에요?”

“아, 분명 얼마 전에 숍에 걸려 있던 거 봤어요. 그런데…… 세상에. 보석을 도대체 몇 개나 추가한 거람?”

“메르시 씨 드레스는 웬만한 영애도 못 입는 건데 저런 사치까지 추가로…… 굉장한 재력가 집안인 게 분명해요.”

“어디 대형 상단의 상단주가 숨겨 놓은 딸일지도요?”

속삭임이 정신없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와 상관없이 커플은 앞으로 나아갔다. 곧 주교 앞에 선 이안이 제 약혼녀의 손을 맞잡았다.

약혼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니, 지금 이안 님이 웃고 계신 거예요?”

“아아, 눈부셔.”

“그렇게 보기 힘든 미소였는데, 이렇게 손쉽게…… 하아. 진짜 사랑에 빠지긴 하셨나 봐요.”

“도대체 저 레이디한테 어떤 특출난 점이 있기에 이안 님이 푹 빠지신 거죠?”

사람들의 시선이 아이린을 미친 듯이 훑었다.

호감형의 예쁜 얼굴이긴 했지만, 눈이 멀어 버릴 듯한 경국지색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안이 ‘대륙이 낳은 기적’이라고까지 불리는 세기의 미인, 이웃 왕국 비올레 공주의 구애를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일이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비올레 공주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안 님의 미소 한 조각 얻지 못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저 레이디는 성당에서 이안과 불장난을 치르다 못해, 무려 주교 앞에서 결혼까지 약속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거부하지 못할 매력을 지녔기에?

“그 소문, 들었어요? 저 영애가 실은 이번에 부름받은 성녀라더군요.”

“네?”

“뭐라고요?”

한 부인의 은근한 속삭임에 모두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실 부인은 이안이 미리 심어 놓은 사람이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못 들었어요. 성녀 검증 절차를 주관하시는 케넨 주교님이 현재 부재중이시잖아요? 검증을 받기 전까진 성녀로 공인할 수 없는 게 전통이니, 아직 소문에 불과하긴 하지만…… 듣기론 바로 저 영애께서 십오 년 만에 나타난 새로운 성녀라더군요.”

“맙소사.”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그럼 성기사단장과 성녀가……?”

충격적인 소식에 사람들이 희번덕거리며 눈을 빛냈다.

“두 분이 이안 님 침실에서 그렇고 그런, 흠흠. 모습으로 발견되었던 것에도 사연이 있었다고 해요. 정확한 이야긴 두 분께 직접 들어야 하겠지만요.”

“대체 무슨 사연일까요?”

“잠깐, 성녀님들은 부름받으심과 동시에 성당 속 아무 곳에나 강림하시잖아요. 혹시 저분께서 강림한 곳이 이안 님의 침실이었던 건 아닐까요?”

“어머나?”

사람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마주 선 이안을 올려다보는 그대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들으며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 잘되고 있네.’

하객들 사이에 사람을 심어 놓은 건 이안이었지만, 이는 두 사람이 함께 꾸민 계획이었다.

처음엔 이안과 아이린의 사이를 그저 추문으로만 알던 사람들이, 이제는 러브 스토리로 인식하고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조그맣게 입을 벌려, 이안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더 짙게 웃어 봐요.”

옅게 웃고 있는 지금도 심장이 해로운 얼굴이긴 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부추기기 위해선 더, 더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다.

살짝 멈칫한 이안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얼음 호수 같던 얼굴 위로, 이질적인 미소가 마치 봄볕처럼 번져 나갔다.

“이러면 됩니까?”

이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이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네. 된 것 같아요.”

몇 초 뒤에야 아이린은 간신히 대답했다.

저 얼굴은 몇 번을 마주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 * *

‘슬슬 피곤하긴 하네.’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약혼식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주교 앞에서 결혼도 약속했고, 결혼할 축일도 잡았다.

하지만 오늘의 진짜 일정은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나라엔 전통이 있었다. 약혼식이나 결혼식을 치른 뒤에는, 반드시 남자 측은 남자들끼리, 여자 측은 여자들끼리 뒤풀이 연회를 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연회가 이루어질 살롱 앞에 서 있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혼자서도.”

“괜찮다니까요.”

이안이 재차 물었다.

물론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날 혼자 두면 내가 사고 치지 않을지를 걱정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연회 같은 건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안 되죠. 이 나라에선 다들 지키는 전통이잖아요? 우리만 안 지키면 엄청 이상하게 여겨질걸요.”

나는 홰홰 고개 저으며 말했다.

혼자 사교계 인사들 속으로 뛰어들자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작에 불과했다. 벌써 겁먹어선 앞으로 일 년을 버텨 낼 수 없다.

“절 믿으세요, 이안 님. 다녀올게요.”

가슴을 툭툭 두들긴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그때 저 너머에서 한 무리의 영애들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황급히 도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볼에 작별의 키스! 빨리요!”

“예?”

“저쪽에서 쳐다보고 있잖아요. 얼른요!”

우린 지금 불타는 사랑에 빠진 연인이란 설정이었다.

잠깐 헤어지는 것도 못 견딜 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

굿 바이 키스 정돈 당연히 해 줘야 했다.

“……알겠습니다.”

눈을 내리깐 이안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촉, 가벼운 감촉이 뺨을 내리눌렀다.

따뜻하면서도, 말캉한 감각. 깃털로 쓰다듬는 듯한 간지러운 느낌이 퍼져 나갔다.

그때였다.

“조금 늦으시― 꺄앗!”

살롱 문이 달칵, 열렸다.

우릴 발견한 영애가 소스라칠 듯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죄, 죄송해요!”

얼굴이 새빨개진 영애가 황급히 부채질하며 비켜섰다.

동시에 살롱 안에 있던 수많은 영애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나. 어머나.”

“뜨거워라……!”

이안이 작은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네. 이따 뵈어요.”

지극히 사무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대화의 내용을 모르는 영애들은 괜히 더 뺨을 붉혔다. 밀어라도 나눈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안을 보낸 나는, 문을 닫고 살롱을 돌아보았다. 진짜 사교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내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 말을 걸까, 하는 긴장이 살롱 안을 가득 채운 것이 느껴졌다.

그때 또박또박 다가오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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