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61)

15화

* * *

대망의 약혼식 당일.

욕실 속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야?’

내 머리카락 끝이 다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꽃잎 같은 분홍빛으로.

‘뭐가 묻었나?’

물든 머리칼을 벅벅 문지르자,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분홍빛이 점점 더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으악, 왜 이래!”

“아이린 님! 무슨 일이신가요?”

커튼 밖에서 아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울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나는 멍하니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대체 이게 뭐지?’

이제는 손을 대지 않아도 내 머리카락이, 빠르게 분홍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왜 이래!’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거울 속 내 모습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불과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내 머리칼은 거의 완전한 분홍빛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동자 역시 화려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것은, 완전히 다른 머리 색과 눈 색을 갖게 되었는데도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이게 원래 내 모습이라는 것처럼.

‘설마.’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속 여주인공 셀리나는 종종 일탈을 즐겼다.

남주인공이 조달해 온 변신 가루를 사용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시장을 누비며 데이트하는 장면은 몇 번이나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

‘설마, 원래 몸 주인. 즉 76번도 그 가루를 썼던 거라면?’

싸하게 소름이 등골을 타고 퍼져 나갔다.

이 분홍색 머리칼과 금안은 확실히 어둠 속에서 틈타야 할 암흑 길드원에겐 지나치게 화려한 색깔의 것이긴 했다.

그래서 일부러 흔한 갈색 머리와 녹안으로 변장했던 걸까?

‘미치겠네.’

나는 분홍빛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하필 오늘은 약혼식 날 아침이었다.

‘침착하자. 이서연. 침착해!’

나는 심호흡을 했다.

호랑이 굴에 물려 가도 살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일단 식이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이 머리와 눈을 원래 색깔로 바꾸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나는 커튼 밖에서 대기 중인 아네트를 불렀다.

“아네트 양?”

“넷, 아이린 님!”

“혹시 심부름 좀 해 줄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말씀만 하세요!”

“마탑에 다녀와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네……?”

나는 조용히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네트 양.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심부름을 비밀리에 잘 수행해 준다면, 꼭 보답할게요.”

아네트는 신실하고 착한 신도다.

그런 아네트가 가장 혹할 만한 보상이라면, 이거겠지.

“아네트 양도 내가 성녀라는 건 알죠?”

“네? 넷, 물론이죠.”

“자, 약속. 제가 자유자재로 권능을 쓸 수 있게 되면, 꼭 아네트 양을 위해 한 번은 사용할게요.”

“네에?”

커튼 뒤에서 소스라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님, 제게 그런 과분한 일을…….”

“괜찮아요. 일단은 내가 조금 급해서 그러니, 의문 갖지 말고 시키는 심부름을 해 줄 수 있나요?”

“뭐, 뭐든 말씀만 하세요!”

내가 진지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네트가 덩달아 심각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녀에게 대강의 심부름 내용을 말해 주었다.

마탑에 갈 것.

변신 가루를 사 올 것.

옵션은 갈색 머리와 녹색 눈으로.

변신 가루는 값이 비싸서 그렇지, 다행히 돈만 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품이었다.

“세 번째 서랍장을 보면 회색 주머니 속에 금화들이 있을 거예요. 5천 마르스는 가지고 가도록 해요!”

당장 현금이 필요한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이안이 일전에 건네준 금화들이 아주 요긴히 쓰이고 있었다.

5천 마르스라는 돈에 아네트는 조금 더 당황한 듯했지만, 곧 힘차게 대답해 왔다.

“넷!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아네트가 도도도 달려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욕조 안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제발 그녀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를 빌며.

* * *

마탑의 2급 마법사, 로젤린 메이어는 하품하며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손님 접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청결한 외관. 로젤린은 마탑의 ‘손님은 왕’ 정신에 입각해 졸린 아침에도 정리 정돈은 해 두는 편이었다.

‘내가 물건 팔려고 마탑에 들어온 게 아니긴 한데…… 에휴. 빨리 연차 쌓아서 연구 탑으로 들어가야지.’

그때였다. 이른 시간부터 손님이 찾아온 것은.

“아, 안녕하세요.”

갈색 머리를 한 귀여운 인상의 소녀가 쭈뼛거리며 상담실로 들어왔다.

이곳저곳을 눈짓하는 모습이 상당히 어색해 보였다. 아무래도 마탑에 처음 온 손님인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변신 가루를 구하고 싶은데요.”

쭈뼛거리는 손님은 꽤나 대담한 물건을 주문했다.

변신 가루는 만드는 공정과 재료가 굉장히 까다롭지만,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이는 마탑에서는 돈만 내면 구할 수 있었다.

그 돈이 꽤 많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지만.

“주문하신 외양은 특이한 것이 아니어서, 별도의 공정 없이 바로 제공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격은 사천 마르스인데, 결제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전부 현금으로요.”

갈색 머리 소녀가 떨리는 손으로 금화들을 내밀었다.

어색한 손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상당한 양의 현금이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마탑엔 와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사천 마르스라는 큰 금액을 지불하며 변신 가루를 사 가는 손님이라.

‘특이한 고객님이네.’

그러나 마탑에 오는 특이한 손님이 어디 한둘인가.

이 손님에게도 아마 독특한 사연이 있겠지만, 손님들의 사연 모두에 하나하나 관심을 가졌다면 로젤린의 신경 줄은 애저녁에 닳아 없어졌을 것이다.

대금을 치른 갈색 머리 소녀는, 변신 가루가 든 마법 보따리를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갔다.

보따리가 아니라 갓난아기라도 안은 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귀여운 손님이네. 로젤린이 픽 웃으며 다시 앉으려던 때였다.

“방금 그 손님, 누구죠?”

“흐아악!”

로젤린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문간에 장신의 남자가 기대 서 있었다.

훤칠한 키와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듯한 흑발.

무엇보다 얼굴에 걸친 기괴한 문양의 가면.

이 수도에 저런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마, 마탑주님.”

로젤린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언제 오셨습니까?”

“하하. 놀라게 했나? 미안해요. 그런데 방금 온 그 손님, 뭘 사 갔죠?”

“변신 가루였습니다, 탑주님.”

“흐음, 변신 가루라.”

휘적휘적 창가로 걸음을 옮긴 마탑주가 창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마탑주의 시선에 지금 막 마탑을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갈색 머리 소녀의 모습이 비쳤다.

“교단 쪽 사람이 변신 가루는 무슨 일로 필요했을까.”

“네? 교단 쪽 사람이라고요?”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엘룬교의 신도가 마탑에 들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교단과 마탑 간의 왕래는 몹시 드물었다.

성력과 마력은 겹치는 부분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었다.

“탑주님께서는 어떻게 아신 건가요?”

“하하. 성력 냄새는 딱 맡으면 알죠.”

“아…….”

로젤린이 눈을 굴렸다.

난 전혀 모르겠던데. 역시 천재는 후각도 좋은 건가?

로젤린의 의문과 상관없이 흐음, 하며 마탑주가 턱을 쓰다듬었다.

“변신 가루를 사러 본인이 직접 오진 않았을 것 같고. 흠…….”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탑주님?”

로젤린이 넌지시 물었다.

최고 상사가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으니 그녀는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로젤린을 돌아본 마탑주가 씩 웃었다.

“아, 미안해요. 그냥 이 기회에 교단과 마탑 사이에 교류가 활발히 생겼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느라.”

“교류요? 아, 네에…….”

로젤린은 떨떠름한 표정을 가까스로 숨기며 말했다.

성력과 마력은 서로 이해가 완전히 불가능한 영역이라 교류해 봤자 득 될 것이 없는데.

역시 자신의 최고 상사는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로젤린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다시금 생각에 잠긴 듯한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꽤 흥미로워질 텐데.”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꼬리가 시원스레 올라갔다.

* * *

나는 초조히 욕조 턱을 두드리며 아네트를 기다렸다.

그동안 머리칼은 완벽히 분홍빛으로 물들어, 이제 갈색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변신 마법 소녀도 아니고, 이게 뭐야. 미치겠네. 진짜.’

욕조 턱을 너무 두들겨 손가락이 아려 올 무렵.

드디어 아네트가 돌아왔다.

“아이린 님, 부탁하신 물건 가져왔어요!”

아네트가 조심스러운 다람쥐처럼 소리 낮춰 속닥거렸다.

나는 욕실 커튼 밖에 있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곧 손에 실크 재질의 주머니가 닿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을게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도움드릴 수 있는 일이라 다행이었는걸요.”

“갑작스러운 부탁 다시 한번 미안해요. 당황스러웠겠지만, 비밀. 지켜 줄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아이린 님.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네트는 사실 천사나 요정이 아닐까?

나는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아네트가 건넨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엔 오색 빛깔의 변신 가루가 들어 있었다.

가루를 욕조 속에 풀자, 물이 금세 환상적인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신 나는 욕조의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잠시 뒤, 다시 물을 헤치고 나온 나는 허겁지겁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됐…… 다.”

거울 안에선 이전처럼 갈색 머리와 녹색 눈을 한 여자가 날 마주 보고 있었다.

‘됐다. 일단 됐어.’

급한 불은 껐다.

나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드디어 기나길었던 목욕을 끝냈다.

‘어떻게 된 인생이 다른 몸에 들어와서도 바람 잘 날 일이 없냐.’

나는 속으로 온갖 불평불만을 일삼았다.

남은 하루는 제발 무사히 지나가길 빌며.

* * *

대성당은 오전부터 활기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성전을 가득 채운 하객들이 열띤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전 아직도 못 믿겠어요. 이안 님께서 약혼을 하시다니요.”

“그래도 그 여성분과 진지한 관계였던 것 같아 다행이에요. 하룻밤 불장난이었다면, 전 앞으로 세상 모든 남자를 못 믿게 될 뻔했다니까요?”

“그 조각상 같던 이안 님께도 사랑의 열병이 닥치다니…… 아아. 역시 안 믿겨요.”

“대체 어떤 레이디이기에 그 이안 님이 추기경 직위까지 내버리신 거죠?”

“오늘 모인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그거죠. 대체 약혼녀는 어떤 레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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