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61)

14화

“그렇군.”

라시드가 잘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반가워서 한 말이다. 네가 드디어 여인을 알게 되었다는데, 친형으로서 어찌 반갑지 않겠느냐. 항상 걱정했었지. 너는 다 좋은데 너무 딱딱한 구석이 있질 않으냐?”

라시드가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이안의 어깨 위로 손을 턱 올렸다.

“하지만 이젠 안심이구나. 그래, 모름지기 사내란 여인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는 법이지.”

웃음기 배인 진득한 시선이 나를 훑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겠다. 네 정혼자만 보고 가려 했거늘 괜히 네 시간까지 뺏었구나.”

“아닙니다, 폐하. 성심껏 수행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하하, 그렇게 딱딱한 말투 쓰지 말라니까. 형제 사이질 않으냐?”

라시드가 이안의 어깨를 툭, 툭 쳤다.

“그럼 또 보자고, 아우님.”

라시드의 뒷모습이 도서관 너머로 확실히 사라지는 걸 본 뒤, 나는 슬그머니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기분이 굉장히 더럽겠지.

나 같아도 그럴 것이다. 다 부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겠지. 그래도 아까부터 잡고 계신 제 어깨는 부수지 말아 주세요.

그런데 올려다본 이안의 얼굴에는 의외로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돌아가죠, 아이린.”

너무나 감정이 없어서,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안이 말없이 자길 쳐다보기만 하는 내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뭐 합니까?”

“아니, 그…… 음. 이거 안 풀어 주시나 해서요.”

나는 어색한 손가락으로 이안이 아직 감싸고 있는 내 어깨를 가리켰다.

“아.”

이안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팔을 풀었다.

서릿발 날리는 인상과 달리, 이안의 체온은 의외로 따스했다.

피부가 떨어지고 나서도, 꽤 한참 동안 잔열을 의식하게 될 만큼.

“그, 흠.”

나는 헛기침을 해 어색한 기분을 떨쳐 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건가요?”

“조안 경이 일러 주었습니다. 폐하가 이곳에 와 있다고.”

아. 나는 조안 경을 향해 속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꼭 실제로도 고맙다고 해야지.

“그런데. 도서관엔 무슨 일로?”

이어 내게 날카로운 질문이 파고들었다.

순간 움찔했으나, 나는 간신히 티 내지 않고 하하 웃었다.

“아시다시피, 제 출신이 그렇다 보니 이곳에 대한 상식이 조금 모자라서요. 책은 지식의 보고이고, 세상을 비추는 창이라잖아요? 그 창 좀 들여다보러 왔죠.”

“흐음.”

이안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런. 너무 말이 많았나? 예로부터 사기꾼은 혓바닥이 긴 법인데.

오버한 것을 반성하며 나는 슬그머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을 들여다보는 건 좋은데.”

흠칫.

서늘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굳었다.

“웬만하면 밝은 낮에 보도록 하십시오. 아무리 대성당 안이라 해도 밤엔 수상한 존재들이 돌아다니게 마련이니.”

“……네, 이안 님.”

“가령, 창문 들여다보기 좋아하는 성녀라든지.”

“…….”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 돌려 이안을 살짝 노려보았다.

시선이 되돌아오는 바람에 얼른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지만.

‘망할 창문 얘기는, 왜 오버를 해서!’

스스로를 욕하며 나는 이안과 함께 내 방으로 향하는 길을 마저 걸었다.

방 앞에 도착한 이안은 내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매의 눈으로 확인했다.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기사라기보다는, 미아보호소에 아이를 데려다 놓는 듯한 모양새였다.

* * *

다음 날, 오전부터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메르시 드레스 숍의 메르시 님이세요!”

아네트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잘은 몰라도 유명한 사람인 듯했다.

‘아, 참. 내일 있을 약혼식 드레스를 골라야 한다고 했지.’

생각해 보면 정말 하드한 일정이긴 했다. 오늘 드레스를 고르고, 바로 내일 약혼식을 치러야 한다니.

내일 있을 약혼식을 떠올리니 새삼 긴장으로 아랫배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홰홰 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뵙자고 해 줘요.”

“네!”

잠시 후, 레이디 메르시가 내 방으로 입장했다.

다섯이나 되는 직원과 거대한 행거를 끌고서.

“안녕하세요, 아이린 님.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이린 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메르시가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고 정중히 인사했다.

나는 어색함을 숨기며 활짝 웃었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안 님의 의뢰는 처음 받아 보는 것이라, 무척 놀랐답니다. 더군다나 다른 레이디를 대신해 의뢰해 주시다니요! 이안 님께서 아이린 님을 몹시 각별히 여기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러셨군요.”

각별히 여기기는 무슨.

요주의 인물로 각별히 주시하고 있긴 하겠지.

소파에 앉자, 메르시가 커다란 카탈로그를 보여 주었다.

“이번 계절 새로이 준비한 작품 중에서도 최상급으로만 골라 왔답니다. 원래라면 완벽히 아이린 님 취향에 맞도록 주문 제작을 해도 좋겠지만, 아쉽게도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어서요.”

메르시의 말은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흘러 나갔다.

내가 카탈로그 구경에 혼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미쳤다. 아름다워.’

카탈로그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중 내 이목을 특별히 사로잡는 드레스가 있었다.

솜사탕처럼 귀여운 분홍색 원단에, 웨딩 베일처럼 아름다운 레이스.

꼭 동화책 속 공주님 드레스를 그대로 구현해 놓은 것 같았다.

‘고아원에서는, 이런 드레스가 그려진 동화책 페이지는 꼭 누가 찢어 가곤 했는데.’

멸종한 줄 알았던 동심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고 외쳤다.

“이걸로 해도 될까요?”

“네? 그건…….”

메르시가 처음으로 난색을 표했다.

‘아. 너무 비싼가?’

하긴, 주렁주렁 레이스와 보석이 달린 것이 몹시 값비싸 보이긴 했다.

아쉬운 기분으로 카탈로그를 마저 넘기려던 때였다.

“그건 가격대가 너무 낮은 편이어서요.”

“예?”

뭘 잘못 들었나?

나는 당황한 눈으로 카탈로그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드레스 밑에 적힌 가격표에는 0이 굉장히 많이 달려 있었다.

“이안 님께서, 일정 금액 이하로는 고르지 말라는 당부를 특별히 주셨거든요.”

“……네?”

“정 그 디자인이 마음에 드시면, 보석을 더 달아 드릴까요?”

이 사람, 팔려는 물건이 너무 싸다면서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고 있다.

‘너무 비싸서가 아니라, 너무 싸서 안 된다니.’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충격이 나를 강타했다.

“어디 보자. 이곳, 이곳, 이곳에 다이아몬드를 단다면 최소 금액을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최소 금액이 얼마인가요?”

“이만 마르스입니다.”

‘맙소사.’

옷 한 벌에 그만한 돈을 쏟아붓는다고?

심지어 그게 최소라고?

‘금전 감각이 이상해질 것 같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린 님? 이만 마르스 이상 라인을 보여 드릴까요? 아니면 이 드레스의 가격을 높여 볼까요?”

“으음.”

나는 잠시간 격렬히 고민했다.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이 드레스에 보석을 더 달아 주세요.”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워낙 기본적으로 세련된 디자인이라, 보석을 추가해도 과한 느낌이 없을 겁니다.”

‘보석을 더 단다면, 나중에 떼다가 비상금으로 쓸 수 있겠지.’

물론 이안이 계좌에 거금을 꽂아 줄 예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현찰은 언제 가치를 다할지 모르니 보석이란 이름의 비상금을 마련해 놓는 건 아주 좋은 계획 같았다.

“그럼 저희 쪽에서 작업을 마친 뒤, 내일까지 배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가져온 드레스들을 입어 보실 수 있을까요? 아이린 님의 느낌을 알아보기 위해서요.”

메르시의 부탁에 못 이긴 척 나는 그녀가 가져온 드레스들을 몇 벌 걸쳐 보았다.

‘패션쇼 부럽지 않다.’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채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입을 쩍쩍 벌렸다.

살면서 이런 옷을 입어 볼 날이 올 줄이야.

“너무너무 아름다우세요, 아이린 님!”

아네트가 연신 환호해 주는 덕에 피팅 쇼는 갈수록 열기를 더해 갔다.

* * *

“아이린 그레이스. 아이린 그레이스…… 제기랄! 왜 하필 이름이 그따위냔 말이야!”

현 황제의 오른팔, 비욘틴 공작가.

그 가주인 비욘틴 공작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렇게 흔해 빠진 이름이라니! 동명이인이 백만 명은 있겠어. 빌어먹을!”

“지, 진정하시지요. 그래도 머리 색 등 외양을 통해 추려 내고 있는 중입니다, 각하.”

“머리 색과 눈도 흔하디흔한 색이질 않나! 제기랄, 이상하군.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과거가 안 털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안 님이 워낙 꽁꽁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미 얼굴이 드러난 상황이질 않나. 누구 한 명이라도 그 계집을 안다는 사람이 나와야지!”

비욘틴 공작이 부득, 이를 갈았다.

그의 보좌관이 안경을 추어올렸다.

“이렇게까지 과거가 감추어져 있다는 건, 역시 의도적으로 덮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군.”

비욘틴 공작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 고귀하신 성기사단장께서, 어지간히도 뒤 구린 여자한테 반한 모양이지? 어쩌면 이름조차도 가명일지 모르지.”

“가능성 있습니다. 절대 드러나면 안 되는 과거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덮고 있는 거겠죠.”

“내 생각도 그렇다. 혹시 모르지. 범죄자였거나, 혹은 창부였을지도.”

비욘틴 공작이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벌집을 쑤셔 봐야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말 그대로, 쑤셔 보는 거야. 토끼굴에 불을 붙여 보는 게지. 당황한 토끼가 튀어나와 날뛰도록.”

“아이린 그레이스는 현재 성당 밖으로 두문불출 중이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내일이 약혼식이죠. 이안 님이 자기 약혼식에서마저 그 여잘 꽁꽁 숨겨 놓진 않을 겁니다.”

“좋아. 그자의 약혼식이라면 하객도 꽤나 몰려오겠지. 딱 알맞은 무대군.”

비욘틴 공작의 낮은 웃음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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